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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만 다른 시간을 공유한 추억 이야기

[행복한 책 읽기] 문학 속의 서울

등록|2010.08.06 09:20 수정|2010.08.06 09:20

▲ 문학 속의 서울 ⓒ 김원규




같은 시간, 같은 곳을 바라보거나 추억하는데도 그 시간 그 곳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그 내용은 전혀 다르게 나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성장과 번영을 위한 70·80년대가 누군가에게는 철저히 살기 위한 투쟁, 거창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필요도 없이 정말로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기억되듯이.

조정래씨의 소설 '한강'의 시대적 배경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이 책의 서울은 과거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진 군사정권 시절에 '잘 살아보자'라는 명분하에 막무가내로 진행되었던 서울 개발이 낳은 부작용이라는 그늘을 문학이라는 장르를 빌려와 애틋하면서도 우울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서울이란 곳이 개발될 때부터 어떤 목적성과 계획성을 갖고 개발된 곳이 아니어서 그 과정에서의 부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일거리가 적어진 농촌에서 먹고 살겠다고 올라온 수많은 타지 사람들은 당장 먹고 잘 곳이 없어 임시 거처를 만들고, 그런 임시 거처는 또 다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철거되고, 그러면서 못 가진 자들은 또 다시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서울은 점점 비대해져 가지만 정작 주인이 없는 도시, 실제 거주자와 소유자가 전혀 다른 이상한 도시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지켜본 그 시대의 문학가들-소설가 및 시인들-은 그런 상황에 탄식하며 소설가들은 소설로 시인들은 시로써 당시의 우울한 시대상을 노래한다.

최수철이라는 작가는 <소리에 대한 명상>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피부가 코끼리나 하마나 악어의 가죽처럼 죽은 후에도 형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와 시체를 발견할 때 그 시체가 바로 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이처럼 뼈저리게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인간의 정이었다. 하지만 서울 하늘 아래 그는 늘 혼자였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서울은 원래 주인이 없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구성이 된 곳이다. 그렇다 보니 수많은 경쟁 속에서 내가 살아남아야 하고 그런 경쟁 속에서 점점 자신의 이해 타산에 따라 현상을 판단하는데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하여 결국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일정한 거리를 둘 때 비로소 편안해진다. 그럼으로써 결국은 스스로를 외로움 속으로 몰고 가게 되며 결국엔 지독한 외로움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마는 비극을 낳게 되는 것이다.

반면 장정일씨는 <지하인간>이라는 글에서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찬사"라는 희망적인 얘기를 하지만 알고 보면 바꾸려야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위안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서울은 완벽한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다. 외국 드라마의 열풍 속에 무차별적으로 유입된, 아무 의식 없이 외국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며, 그에 따라 소위 특권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생활 방식을 따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반면에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와 이기적인 투기 광풍이 맞물려 집 값이 천정부지로 솟으면서 서울 시내에 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 버렸고, 이 모습은 밀어 붙이기식 개발 시절이나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더 화려해지고 더 역동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갖추었지만, 속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로 곪아 버린 현재의 서울을 문학 작품에서는 어떻게 표현할는지. 그리고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현재의 서울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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