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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세운 안양사(安養寺) 찾았다

문헌속 7층 전탑, 1100년 만에 발굴... 경주 황룡사에 맞먹는 가람 규모

등록|2010.08.06 10:25 수정|2010.08.06 10:25

1100년만에 그 실체를 드러낸 안양사 7층 전탑'신증동국여지승람'등 기록속에 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안양사 7층 전탑(塼塔)이 남쪽 방향으로 쓰러진 형태로 벽돌-기와-벽돌 순으로 쌓여있다. ⓒ 최병렬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번지 옛 유유 안양공장이 세워진 중초사(中初寺) 터가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세운'안양사'(安養寺) 였다는 사실이 안양사 명문기와 발굴에 어어 문헌속 안양사 7층 전탑 터가 1100년 만에 발굴됨으로써 확인됐다.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이 유유 안양공장 부지에 대한 1, 2차 발굴조사를 통해 고대가람 안양사 흔적을 찾고 문화재청이 4일 현장에서 지도위원회를 열고 실체를 확인함으로써 안양이란 지명이 고려시대 안양사에서 유래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안양(安養)' 지명의 유래가 된 '안양사(安養寺)'는 '동국여지승람' 금천불우조(衿川佛宇條)에 삼성산에 '안양사(安養寺)가 있어 남쪽에 고려태조가 세운 7층 전탑(벽돌탑)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안양사지 발굴 현장승방지, 강당지, 금당지, 전탑지, 중문으로 연결되는 거대 사찰 가람의 실체로 회랑이 연결되는 양쪽은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 발굴된 곳 또한 정밀 조사가 필요하지만 인력과 예산, 시간상 어려움으로 중단된 상태다. ⓒ 최병렬




문화재청이 주관한 제4차 지도위원회문화재 전문가들이 한울문화재연구원으로 부터 안양사 발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최병렬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안양사 실체 1100년 만에 확인

안양사 터는 역사적으로 중초사지로 불리우며 유유 안양공장이 자리했던 곳으로 안양시가 2007년 매입했으며 한울문화재연구원이 지난 2009년 6월부터 발굴을 실시하여 왔다.

2009년 6월-10월까지 3개월간 실시된 1차 발굴에서 정면 9칸(41.4m) 측면 3칸(14m)의 대형 강당지와 승방지, 동.서 회랑지 등이 발굴되고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이 출토됐다.

향토사학자들은 '중초사'와 문헌속 '안양사'의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는 발굴 현장에서 약 700미터 정도 떨어진 인근에 현재 '안양사'라는 자그마한 사찰이 존재하고 있으며, 유유 공장 부지인 같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의 중초사와 고려시대의 안양사가 각각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했다.

이곳에는 국내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유일하게 조성연대를 확인시키는 명문이 새겨진 중초사지당간지주(보물 제4호)와 중초사지삼층석탑(지방문화화재 격하)이 존재해 중초사지로 인식돼 왔으나 향토사학자들은 문헌속 '안양사' 일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안양사 7층 전탑문헌속의 안양사 7층 전탑이 남쪽 방향으로 쓰러져 벽돌-기와-벽돌 순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 최병렬



▲ 7층 전탑의 탑면 기와에 부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 최병렬




이에 2010년 6월-8월까지 33일간 진행된 2차 발굴 조사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등 기록속의 안양사 7층 전탑(塼塔)의 터와 흔적들이 1100년만에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세운 '안양사' 였음을 확인시키며 역사문화의 보고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번에 발굴한 안양사 7층 전탑지는 공장 사무동과 공장동 건물 중간으로, 남쪽 방향으로 쓰러진 형태로 벽돌-기와-벽돌 순으로 쌓여있어 옥개석(屋蓋石·지붕처럼 덮는 돌) 위에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추정돼 전탑의 구조와 축조방식도 어느 정도 파악됐다.

또한 금당지와 전탑지, 답도, 중문지 등을 추가로 조사해 고려시대 가람배치와 관련 중심사역의 건물배치를 추정할 수 중요한 단서를 얻었으며, 전, 막새류, 청자연봉, 청자상감 뚜껑편 청자 접시편, 청자 저부편 등을 무수히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2009년 6월-10월까지 3개월간 실시된 1차 발굴에서 중초사지가 안양사 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이 출토됐다. ⓒ 최병렬




도깨비 형태의 와편안양시 석수동 안양사(중초사지) 절터에서 발굴 ⓒ 최병렬




"안양사 가람 경주 황룡사와 같은 규모로 상당했다"

연구원은 "이번 2차 발굴을 통해 안양사는 황룡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로, 경기서남부에 이 같은 규모의 사찰이 발굴되기는 처음이다"고 강조하며 "150미터 떨어진 안양예솔공원 주차장옆에 있는 마애종도 안양사와 연관된 것으로 보여 안양사 경내가 옛 유유산업 부지 경계를 넘어 인근 지역까지 포함되는 대규모 사찰임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한 "고려시대인 900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된 안양사와 통일신라시대인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인 827년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중초사(中初寺)와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도 과제로 정확한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양사 터 인근에 있는 마애종은 국내에 유일하게 현존(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하는 것으로 암벽(535×505cm)을 다듬어 '승려가 범종을 치는 장면'을 음각과 양각을 활용하여 새긴 암각화로 당시 사찰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연구원은 "1100년 만에 실체가 확인된 안양사의 존재는 안양시 정체성과 직결되는 역사적 사안으로 문화재 발굴 자체를 장기적 과제로 인식하고 교육체험의 장으로 활용하는 등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지도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안양사가 경주 황룡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임을 확인하면서 "금당지의 정확한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동쪽과 서쪽으로의 확장 등 발굴지역 확대 조사가 필요하고, 정밀 발굴조사도 실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양사지 2차 발굴 현장과거 유유 공장건물(건축가 김중업 설계작품)인 왼쪽 공장동과 오른쪽 사무동 중간에 7층 전탑이 있으며 건물 하단으로 사찰 회랑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최병렬




▲ 안양사지 추정 가람 복원도 ⓒ 최병렬




안양의 역사와 정체성 찾기 결국 안양사 찾아냈다

1천여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세상평화을 기원하고 수행했던 안양사(安養寺) 흔적이 땅 밑에서 잠자다 1천년만에 새상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한 석공이 암벽에 종을 치는 스님을 새겨 넣으면서 꿈꿨던 마애종에 담겨진 안양세계(安養世界)가 깨어나고 있다.

안양시는 2007년 6월 (주)유유와 240억원 3년 분할로 해당부지를 매입했다. 이후 한국의 손꼽히는 건축가인 김중업(金重業,1922∼1988)씨가 설계해 1959년 5월 준공한 산업건축물인 공장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에 앞서 발굴 조사를 벌여왔다.

이는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안양(安養)' 지명의 유래가 된 '안양사(安養寺)'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속에 지역원로인 정덕한(67)씨가 안양의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한 유물이 매장돼 있을 것이라며 발굴조사를 요청하는 청원을 시에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결국 문헌속에서만 기록돼 있던 안양사 실체가 사실로 확인되고 그 규모가 예상밖으로 커 3차 발굴에 따른 사업 연기 등 현대 산업건축물을 문화유산으로 활용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하며, 유유부지 활용문제도 새로운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화재관리법이 없던 1950년대 절터에 공장이 건축되면서 소중한 문화유산이 마구잡이로 훼손된 사실도 발굴과정에서 드러났다. 그나마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청동용두와 사자향로발 등 당시 발굴된 유물들이 현재 (주)유유 서울 본사에 전시돼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마애종 안양사지 발굴 현장에서 150미터 떨어진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옆에 있는 마애종도 안양사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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