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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뭔 소리, 이게 현대식 개똥참외라고?

개똥으로 지은 참외농사,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또 있으랴

등록|2010.08.08 17:51 수정|2010.08.08 17:51

▲ 한 달여 전 아주 젊은 시절에 처음 익기 시작한 참외 ⓒ 김수복


작년에 개똥을 거름으로 생강 수확을 엄청나게 많이 해서 그것을 처리하느라 잔머리깨나 썼던 터라 금년에는 생강을 딱 다섯 쪽만 심었다. 다섯 쪽이 작년처럼 풍성하게 새끼를 친다면 오십 쪽 아니 백 쪽도 무난하게 달성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생강을 심고 사흘 뒤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얼음이 얼고 별 이상한 둔갑을 다하는 날씨 탓에 모두 얼어 죽고 말았다. 생강이 얼어 죽은 자리에 참외를 심었다.

이런저런 작물을 마당에 심어서 제법 성공을 한 경우도 많았지만 참외나 수박은 아직 한 번도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참외 모종 천원어치를 사다가 심으면서도 뭐 별 기대는 없었다. 그저 시장에서 할머니가 그것을 팔고 있으니까, 견물생심이라기보다는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고 몇 마디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그 재미를 누리고 싶다는 마음에, 그러니까 말문을 트는 하나의 소재로써 참외모종 천원어치 다섯 포기를 이를테면 갈아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 일 년 동안 묵힌 개똥과 흙을 섞어서 거기에 참외모종을 심어놓고 물이나 한 번 주었을까, 풀이나 몇 번 뽑았을까, 뭐 별 기대가 없었기에 그 정도의 관리나 겨우 했을 뿐인데 이것들이 넝쿨을 사방으로 쭉쭉 뻗는다 싶더니 어느 날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로 애기 손가락 같은 열매가 삐죽삐죽 보이는 거였다.

야아 이게 뭐냐, 참외네, 참외가 열렸네. 참외모종에 참외가 열리는 것이야 너무도 당연하건만, 마당에서 저절로 나고 자란 개똥참외나 몇 개 구경했을 뿐 내 손으로 참외를 가꿔서 수확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그렇게도 신기해 보일 수가 없는 거였다. 신기해서 이파리들을 들춰보는데 어마 이게 뭐냐, 열린 참외가 한 둘이 아니다. 대여섯 개도 아니다. 열 개 아니 스무 개도 넘게 열려 있는데 아직 멀었다는 듯 계속 꽃이 피고 열매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아침마다 들여다보았다. 매일 아침 볼 때마다 열매는 자라나 있었다. 그 자라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하루하루 크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감격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파랗기만 하던 열매에 흰색이 섞인다 싶더니 흰색은 사나흘 뒤에 다시 노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원래의 파란색이 노란색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파란색이 노란색을 감추고 있다가 이제 때가 되어 서서히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하여튼 그렇게 참외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익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었다. 한 개가 익기 시작하니까 시샘이 발동한 것처럼 옆에서도 익고 그 옆에서도 익고 무려 대여섯 개가 동시에 익어가고 있었다.

▲ 이십여 일쯤 전, 그러니까 이제 끝물이구나 여겼던 시절의 익어가는 참외와 노쇠한 넝쿨들 ⓒ 김수복


그리고 그 향기, 익어가는 참외가 자신의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발산시키는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서 우두커니 선 채로 코를 킁킁거리는 날이 이틀이었던가 사흘이었던가, 보기에도 이제 수확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지만 차마 그것을 뚝 따낼 수가 없어서 며칠 더 보기로 했는데 그런데 이게 뭐냐. 코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치에게도 있다는 듯이 어느 하루 이른 아침 마당에서 까치 소리가 요란한 거였다.

일단 소리를 질러대며 뛰쳐나갔다. "저눔의 까치 새깽이덜이" 어쩌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는데 가던 중에 그만 달팍 넘어지고 말았다. 마당에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눈이 뒤집혔다고나 할까,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까치뿐이고, 머릿속의 생각은 오직 다 익은 참외를 '저눔의 까치 새깽이들'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다 보니 마당에 늘어놓은 화분은 그야말로 안중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화분 하나를 정통으로 밟아 깨버리고, 나는 넘어지고, 까치들은 재미있다는 듯 허공을 선회하며 까작거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더라고, 넘어진 채로 한참을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키득키득 웃어대며 일어나서 앉았다. 앉아서도 한참을 키득거렸다. 내 꼴이 참 말이 아니게 싸구려가 되고 말았다는 부끄러움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까치는 거기에 잘 익은 참외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내서 왔다기보다 참외의 구조신호를 받고 달려온 게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다. 아니 그럴 것 같았다. 참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람이 참외 자신을 수확해서 먹는 것보다는 까치가 먹어주는 것이 훨씬 이로울 터이었다. 사람은 참외 씨앗을 이빨로 깨트리거나 수채 구멍에 버려서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하게 하지만, 까치는 씨앗을 뱃속에 넣고 다니며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하는 식으로 배설물과 함께 배출해서 그야말로 여기저기 도처에 참외의 종족을 퍼뜨려 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고사리를 꺾는다고 산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호랑가시나무 어린 묘목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정말이지 뒷산에는 호랑가시 어린 나무들이 많고도 많았다.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으나 두 번 보고 세 번 보는 동안 의문이 들었다. 근처에 호랑가시나무는 찾아볼 수도 없는데 이게 뭔가 하는 생각, 그 생각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것이 까치들이었다. 아아, 까치들이 저 먼 어딘가에서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먹고 여기에서 배설을 한 것이겠구나.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기 참외가 이상하게 보였다. 그것을 먹고자 했던, 혼자 먹겠다고 까치를 쫓으러 뛰쳐나왔던 내가 무슨 희귀종인 것 같은 느낌조차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참외를 심은 것은 까치가 아니고 사람이었다. 사람 중에서도 나 자신이었다. 게다가 나는 현금투자에 노력봉사까지 한 사람이었다. 설령 참외가 자신의 권익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자신과 까치 사이의 어떤 암호로만 통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될 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는 한 일단 참외의 소유권자는 참외 자신도 아니고 까치도 아니고 사람인 바로 나 자신이다, 하는 이런 도덕적 법률적 이론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이 제법 편안한 마음으로 참외를 독식할 수 있게 되었다. 참외가 혹시 개똥을 너무 먹어서 개똥 냄새를 풍기면 어쩌나 하는 바보 같은 걱정도 처음에는 있었지만, 개똥 냄새는커녕 단내만 물씬물씬 풍겼다.

물론 다소의 불편과 손해는 감수해야 했다. 참외가 아주 농창하게 익기를 기다리다가는 까치에게 선수를 빼앗길 염려가 있으므로 미리서 따 버리는 그런 손해와 불편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보름도 아닌, 무려 한 달여에 걸쳐 참외를 평균 하루에 한 개 혹은 두 개씩 참으로 맛나게 먹고 이제는 끝났구나, 아쉽다, 하고 있는데 어렵쇼, 이게 또 뭔가.

▲ 참외는 이제 끝났으니 나팔꽃이나 보자 했는데 나팔꽃과 경주를 하자는 듯이 참외가 열린다. 그리고 각종의 벌레들이 그 표피를 갉아먹는다. ⓒ 김수복


참외 잎이 누렇게 변색되고 더 이상 넝쿨도 안 뻗는 것 같고 해서 이제는 끝물이다, 끝났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순이 나오고 있었고, 새로운 넝쿨이 뻗기 시작하고 있었고, 새로운 꽃봉오리와 새로운 열매가 맺어지고 있는 거였다. 마치 노동현장의 일꾼들이 죽어라고 몇 시간 동안 일을 하고 삼십분쯤 새참 시간을 가졌다가 다시 일을 하는 식이었다. 기가 막혔다. 얘들이 대체 왜 이러나 하고 몇 시간씩 들여다보기도 했다. 비우면 채워지고 또 비우면 또 채워진다는 화초장이란 것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런 거야?

화초장이야 뭐 실없는 공상이었다 해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과거의 데이터를 놓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게 또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싶었다. 절기로 보자면 8월도 초순이니까 이제야 여름이 한창인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살려보니 참외밭 주인은 대개 참외 넝쿨을 걷어내고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무렵에까지도 어린 참외가 주렁주렁 열려 있어서 그것으로 장아찌를 담그곤 했다는 기억도 부가적으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집 마당의 참외는 사람의 나이로 치자면 이제야 겨우 삼십대 중후반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따먹은 참외보다도 훨씬 많은 참외가 앞으로 열릴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거였다. 오, 이렇게도 수지가 좋은 농사를 내가 지을 수도 있었다니, 참외 넝쿨을 볼 때마다 미소가 절로 피어나는 날들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렇게도 기분좋게 흘러가는 세월의 어느 날, 그러니까 사흘 전에 낯선 기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어디서 무슨 애기를 들었는지 고창에서 제기되고 있는 각종 의혹사건들에 대해 정보공유를 좀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정보공유가 아니라 내가 수집한 것을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달라, 하는 뭐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싫다, 안 한다, 하는 얘기를 차마 대놓고 할 수는 없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나 몇 마디 나누다가 마당으로 나섰다. 그때 그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참외넝쿨이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이 자랑스러운 참외를 누구 낯선 사람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하고 그에게 참외자랑을 하기로 했다. 개똥을 비닐포대에 담아서 일 년여 동안 잘 익힌 뒤에 흙과 섞어서 참외를 심었더니 이렇게도 왕성하게 지칠 줄 모르고 늙을 줄도 모르고 언제나 청춘으로 계속 열매를 맺고 있다고, 그렇게 한참을 신명이 나서 떠들고 있는데 이 사람이 일도양단, 한 마디로 딱 잘라서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아, 그러니까 이게 개똥참외로군요?"
 "에? 뭐요? 개똥참외?"

▲ 끝났다고 여겼던 참외 넝쿨에 새 순이 나오고 새 꽃이 피고 새 열매가 맺었다. ⓒ 김수복


뭐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녀석이 다 있나 이거, 하는 심사로 그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소중한 참외를 건방지게 함부로 개똥참외라고 마치 데려온 자식 취급을 하다니, 나중에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섭섭함이라서 부끄러운 웃음조차도 잘 안 나오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순간에는 나 자신이 뭔가 평가절하를 당하는 기분이어서 조금은 화난 표정으로 그를 교육시키고자 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보세요. 뭘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개똥참외라는 것이 말이에요. 그게 원래 사람이 참외를 먹고 똥을 누면 개가 그 똥을 먹고 여기저기 아무 데나 똥을 눈단 말이거든요. 그러면 개똥 속에 들어 있는 참외씨가 흙속의 수분을 만나서 싹을 틔우는 거예요. 지금도 사실 내 자신이 그렇기도 하지만 옛날 농촌에서는 참외를 깎지도 않고 씨를 골라내지도 않고 그냥 우걱우걱 베어 먹었단 말이거든요. 그때 씨앗이 씹혀서 깨지기도 하지만 안 씹히고 고스란히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씨앗들이 소화가 안 된 채로 똥을 따라서 항문을 빠져 나가는 거예요.

물론 소망이란 이름의 똥통 속으로 빠진 똥은 씨앗도 그대로 썩거나 하여튼 생명을 잃어버리지만 옛날에 농촌 사람들이 화장실을 찾아가는 경우란 집에 있을 때 외에는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게 수풀 속에 똥을 누면 개들이 뭐냐 그, 사람 먹을 것도 귀한 시절이라 개들이 항상 배가 고프단 말이에요. 그래 개들이 사람의 똥을 거의 주식으로 하던 시절이라, 이 똥을 먹고 뭐냐 그, 개들은 원래 그렇잖아요. 아무 데서나 똥이 마려우면 그냥 싸잖아요. 그러면 그때 사람의 똥을 먹을 때 함께 먹었던 참외씨가 개의 뱃속에서도 역시 소화가 안 된 채로 똥에 쓸려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 씨앗이 살아 있으니까 싹을 내고 넝쿨을 뻗고 열매를 맺고 하는데 그것을 일명 개똥참외라고 했다, 이겁니다."

나는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강의 같은 설명을 했다. 그 사람 또한 진지하게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 모습이 고마웠다. 나는 아마 그때 마침내 그를 납득시켰다고, 내 생각을 존중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하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도 일도양단, 한 마디로 딱 잘라서 나를 어리벙벙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건 과거의 개똥참외일 뿐이죠. 지금 이것은 현대의 개똥참외고, 안 그래요?"
 "과거요? 현대의 개똥참외라고요?"
 "지금은 개가 사람의 똥을 먹는 시절이 아니잖습니까. 사람 또한 아무 데나 똥을 누고 다니지는 않잖아요."
 "그야 뭐, 그렇지, 요."
 "그런데 지금 이 참외는 개똥을 흠뻑 먹고 자란 거라면서요. 그것도 맛나게 잘 익힌 개똥을 말이에요."
 "맛나다니. 뭐가 맛나요? 개똥이?"
 "사람의 입에 그렇다는 게 아니고 참외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맛날 것 아닙니까."
 "아, 그야, 그렇죠, 당연히 맛난 음식이죠."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개똥참외라는 거죠."
 "가만 있어봐, 얘기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게? 뭐죠?"
 "뭐긴요. 현대식 개똥참외라는 거죠."

오 이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래 너 잘났다. 평생 그런 식의 냉철한 기자질이나 해먹고 살아라,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빙빙 돌고 있었지만, 이미 주눅이 들어버린 내 입은 꾹 닫혀진 채로 열릴 줄을 모르고, 얼굴에서는 불이 났는지 기름에 튀겨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무엇인가가 확확거리고, 가슴은 마구 두근두근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깔끔하게 항복선언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깔끔할 수가 없는 항복이었다. 내가 졌다, 당신은 안녕히 가시라 하고 그렇게 헤어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놈의 항복문서를 곱게 인정할 수가 없는 거였다. 현대식 개똥참외라, 이게 가당한 말인가? 아니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이지? 개똥을 주식으로 먹고 자란 참외이니 개똥참외라 해서 안 될 이유는 도무지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되면 본래적 의미에서의 개똥참외는 어떻게 되는가. 개똥에서 나온 참외와, 개똥을 먹고 자란 참외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 그늘 속에서도 해를 찾아 부지런히 고개를 내미는 참외꽃 ⓒ 김수복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가 도대체 오늘날 개똥을 주식으로 참외를 기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흔히 하는 말로 필이 확 꽂혔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한 의미에서의 개똥참외는 개똥으로 참외농사를 지은 나 한사람에게만 적용될 뿐이고, 따라서 그가 말한 현대식 개똥참외라는 것을 보통명사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특수한 것을 일반화시키는 아주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어쩌고 뭐 그런 이론이 내 머릿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거였다.

이렇게 되면 그와 나는 재토론을 해야 한다. 현대식 개똥참외라는 말이 가능한가 아닌가를 놓고 불꽃 튀는 설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숨도 못 쉬게 끓어대는 이 삼복더위에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아주 없지도 않지만, 엄밀하게 계산을 해보면 지난 사흘 동안 더워도 더운 줄을 모르게 지냈으니 이보다 더 큰 이익도 없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내 집 마당에서 개똥을 먹고 자란 참외는 이중 삼중으로 나를 기쁘게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까치에게 참외를 완전히 넘겨야 하나 어쩌나 하는 은근한 고민도 생긴다. 살아 있는 것들과의 공존에서는 이렇게도 많은 고민과 기쁨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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