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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63회)

회음도(會飮圖) <1>

등록|2010.08.10 11:00 수정|2010.08.10 11:00
사내는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명이 끊겼다. 평전건이 빠꼼히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삼사의 서리로 짐작됐으나 가지가 셋인 매화나무 그림과 관인이 나오자 어렵지 않게 신분이 밝혀졌다. 그는 도화서 화원이었다.

손이며 옷소매에 먹물 자국이 있는 건 그의 신분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지만, 술상을 받은 사내가 벽에 의지한 채 정신을 놓았다면 마음자리가 넉넉한 주모는 굳이 깨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대왕 땐 반세기 동안 금주령이 내려 술 먹는 걸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정조가 보위에 올라 열네 해가 지나는 동안 장안의 술집 풍경도 멋스럽게 치장되고 운치있게 변해갔다. 상감이 신임한 채제공이 영상으로 있으면서 장안의 술집변화에 대해 흥미있는 기록을 역사 한 귀퉁이에 흘려놓는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술 파는 집의 술 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했다.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교묘해 지며 신기한 술 이름을 내기에 힘쓰고 쇠고기를 파는 곳이나 시전(市廛) 생선을 따질 것도 없이 태반이 술안주로 들어간다. 진수성찬과 맛있는 탕이 술 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렸으니 시정의 연소한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오로지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어울려 술을 마신다. 이로 인해 빚지고 신세 망치는 사람이 태반인데다 시전의 찬물(饌物) 값이 날이 갈수록 뛰어오르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채제공은 금주령이 참혹했던 영조 때엔 술집 안주란 게 고작 김치나 자반이었으나 정조 때엔 술의 종목과 안주가 개발돼 쇠고기나 시전 생선이 상 위에 올랐다고 풀어놓는다.

정약용이 모습을 드러낸 이곳은 술집이었으나 여느 곳관 달랐다. 당시 한양엔 목로술집을 비롯해 사발막걸리집, 모주집이 대부분이었으나 이곳은 내외술집이었다.

목로주점이 서서 술 마시는 선술집이라면 내외술집은 행세하는 집의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넌방이나 뒷방을 치워 술을 팔았으므로 다른 곳관 다른 격이 있었다.

생계로 인해 문을 열었지만 색주가처럼 몸 파는 등의 천박스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객방 곳곳엔 해묵은 산수화가 걸리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내외술집에서 명이 끊긴 사내는 나이가 서른은 돼 보였고 이곳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지만 주모와 통성명을 나누진 않았어도 그가 상대하는 인물들의 면면으로 봐선 삼사의 서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운신의 폭이 넓었다.

밤이 꽤 깊었기에 몇몇 사내가 술에 취해 떠들었지만 살인사건이 났다는 점에 화달싹 깨어 그 자릴 모면하자 횅한 술청에 사내를 누이고 검시에 들어갔다. 몽둥이나 칼에 맞은 외상이 없다면 당연히 독물 중독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어서 현장에 나온 서과는 은비녀를 뽑아 사내의 입에 찔렀다가 눈 앞으로 뽑아 독성을 가늠했다.

독물에 중독됐다면 당연히 새까맣게 변해야 하는 데 은비녀는 약간 누런빛을 띠었다. 그걸 확인하면서도 서과는 고개를 약간 갸웃댔다. 독을 먹고 죽었다면 입술이 찢어지고 혀가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입안은 검거나 검붉고 손톱 역시 푸르다. 사내가 독을 먹었다면 입에 넣은 은비녀는 당연히 검을 수밖에 없는데, 누렇다.

'독을 먹지 않았단 얘긴가?'

서과가 의아심을 갖기 마련이지만 독물 흔적이 나타나지 않으니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벌레의 독도 생각해 봤으나 이 역시 합당치 않았다.

벌레의 독을 맞았다면 몸의 위아래를 비롯해 머리나 가슴이 짙은 푸른색이나 검게 변한다. 간혹은 배가 부풀거나 피를 토하기도 하고 항문에서 피를 쏟지만 입안이며 외부로 드러난 정황이 깨끗한 것으로 보면 벌레의 독에 중독된 건 아니었다.

과실이나 금석약에 중독된 경우는 시체의 위아래에 한두 군데 푸르게 부어오른 데가 있기 마련이고 손톱이 검게 변하는 게 특성이지만 사내의 몸은 그런 점도 없었다. 정약용이 한마디 건드린다.

"서망초란 게 있다. 벌레의 중독과 비슷하나 이에 중독되면 입술이 찢어지고 청흑색이 된다. 이 독은 하루가 지나면 귀와 눈, 입, 코, 항문, 요도 등의 아홉 구멍에서 혈즙이 나오는 특성이 있다, 살펴라!"
"주검이 너무 깨끗합니다, 나으리."

그렇다면 비상이나 단장초를 먹은 것인가? 그도 아니었다. 비상이나 단장초에 중독됐다면 온몸에 작은 포진이 발생해 청흑색이 된다. 눈동자는 터져 나오고 혀 위엔 혓바늘이 돋고 입술이 파열된다. 당연히 두 귀는 커지고 복부가 팽창한다.

항문은 부어서 벌어지며 손톱과 발톱, 입술은 청흑색으로 변하니 그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정약용이 마음에 둔 게 있었다. 남방의 독으로 알려진 것으로 비단을 먹여 그 똥을 사용하는 금잠(金蠶)이었다.

금잠의 독을 맞으면 시체는 야위고 파리했다. 온몸이 황백색으로 가라앉고 눈동자는 꺼진다. 입과 치아가 드러나며 상하의 입술은 오그라들며 복부도 꺼지지만 은비녀를 찌르면 누런색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이 사낸 금잠에 중독된 것이야.'

금잠은 일반인들이 누구나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남방까지 여행을 다녀와야 구할 수 있는 희귀품이기에 어찌 보면 아주 특별한 경우에 사용됐다. 상감의 명을 받거나 왕실의 지친으로 남방에 나갔을 때 구해올 수 있었지만 그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사내의 신원이 밝혀졌다. 그림을 그리는 화원으로 나라에 귀속되지 않은 자였다. 상감이 즉위한 후 그림 배우는 생도가 열다섯 명에서 서른 명으로 늘어나자 도화서에 몸을 담았으나 곧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 돼 여러 화원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한 인물이었다.

"이 자의 호패에 서명하(徐命河)라 써 있으니 견평방(堅平坊)에 자리한 도화서 출신 화공이네. 요즘 큰소릴 내는 차비대령화원의 한사람이네."

"무슨 일을 하는 화원입니까?"
"관직이나 녹봉이 다른 화원들관 다르니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혹여···."
"무슨 일이냐?"

"소인이 저 자의 몸을 조사하던 중 두 가지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가지가 셋으로 나뉜 매화나무이고 다른 하난 산수도였으나···."

"매화나무와 산수도?"
"매화나무는 가지가 셋이나 산수도는 그냥 그림이 아니라 명당비처를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약용은 여러 겹으로 접은 산수화를 서과에게 건네받았다. 여러 등성이가 있는 산자락엔 무봉(舞鳳)이란 글귀가 초서체로 달리고 있었다.

가지가 셋인 매화나무는 정순왕후와 벽파, 그리고 문인방을 이끌었던 송덕상의 패거리가 연합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반면, 무봉은 풍수 용어인 무봉형(舞鳳形)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서과가 그 부분을 가만히 건드렸다.

"나으리, 소인이 무봉형에 대해 말씀 올리겠습니다. 소인이 궁에 있을 때 들었던 얘기는 시절이 세종대왕 때로 기억됩니다. 태종의 헌릉 옆에 쓴 세종의 능을 하루 빨리 옮겨야 한다는 신숙주의 주장이 있었기에 예종 임금은 전일의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신숙주가 능을 옮기라고 권한 건 무덤 안에 물이 찰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이 붕어한 건 경오년 2월 17일로 재위 33년인 보령 쉰 넷이었다. 왕이 죽기 전, 소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아버지를 모신 현릉 가까이 능 자릴 정했는데 풍수사들은 상서롭지 못함을 내세웠으나 주장을 일축했다.

"제왕이라한들 다른 곳에 복지를 얻는 게 어찌 선영만 하겠는가. 그곳이 좋지 않다는 건 전연 근심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사후 같이 묻되 실(室)은 다르게 하라는 유교를 남겼기에 곧 장사 지냈는데 신하들이 여전히 묘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자 예종은 한성부윤 서거정을 불러 좋은 땅을 고르라는 명을 내렸다.

왕명을 받은 일행들이 북청산 기슭에 올라 사방을 휘둘러보는 데 갑자기 먹장구름이 일어나 빗발이 사납게 쏟아졌다. 그들이 가까운 묘막에 들어가자 하늘이 씻은 듯 맑아지며 햇살이 눈부시자 지관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군왕의 땅입니다. 일반사람이 묻힌 건 좋은 일이 아니니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합니다. 다만, 앞산의 좌향으로 볼 때 아래쪽 검은 바위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천지를 가르는 뇌성이 울고 눈앞에 섬광이 일어나 검은 바위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지관이 탄성을 터뜨렸다.

"이젠 걱정할 바 없습니다. 이 자리야말로 명당입니다."

지관들이 이구동성으로 감탄한 자린 바로 이인손(李仁孫)이 잠들어있는 곳이었다. 그는 광주 이씨 3대조로 태종 17년 무과에 급제하고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었다. 조부는 고려 말의 문장가 둔촌 이집 선생이고 다섯 아들은 모두 벼슬자리에 나갔다.

큰아들 이극배는 절도사와 관찰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둘째아들 이극감은 형조판서, 셋째아들 이극중은 좌참판, 넷째아들 이극돈은 좌찬성, 다섯째아들 이극균은 좌의정이었다. 이인손은 근력이 있을 때 나이 들어 묻힐 장소를 지관과 찾아다니다 이곳으로 정하고 당부의 말을 남겼다.

"너희들이 나를 장사지낼 땐 결코 차일이나 솥을 걸어선 안 된다."

그러나 장사 지낼 때 비가 거칠게 쏟아지자 부득이 차일을 쳤는데 뜻밖에 서거정 일행이 찾아온 것이다. 하늘의 뜻이었다. 그곳이 천하에 둘도 없는 제왕의 땅으로 밝혀지자 이인손의 후손들은 다른 곳으로 이장하려 봉분을 헐었다. 뜻밖에 글이 쓰인 돌덩이가 발견돼 후손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면 이곳에서 연(鳶)을 띄워 그게 떨어진 곳으로 정하라.>

이인손은 자신이 누운 자리를 세종에게 뺏길 걸 알고 그런 조처를 해놓은 것이다. 후손들은 연을 띄우고 줄을 끊었다. 한참 후 연이 떨어진 곳에 이장하니 마을 이름이 생겼다. '연줄리' 또는 '연하리'였다. 능을 이장한 세종의 능은 두 마리 봉황이 춤을 추는 무봉(舞鳳)이란 선경이었다.

[주]
∎평정건(平頂巾) ; 각 사의 서리가 쓰던 건
∎견평방(堅平坊) ; 지금의 한국일보 자리
∎무봉형(舞鳳形) ; 신선이 춤추는 형상의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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