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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막에 웬 홍수?

[실크로드 역사 탐방⑦] 쿠차에서 악수로 가다 만난 홍수

등록|2010.08.11 14:09 수정|2010.08.11 15:07
희망제작소 호프메이커스 클럽 회원들과 함께 중국 실크로드 역사탐방을 다녀왔습니다. 특히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는 약 160만㎢의 면적으로 중국 전체의 1/6을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중국 최대의 분지, 최고의 고원, 대사막, 대초원, 대고비, 대삼림은 웅대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서방의 황금과 중국의 비단을 바꾸고 불교와 이슬람문화를 전한 동서문물 교류의 접합점입니다. 신장의 실크로드는 사막과 낙타로만 여겨지던 과거 버려진 길이 아닌 천태만상의 자연환경과 다채로운 민속, 유전과 가스로 이어지는 막대한 지하자원을 가진 성장잠재력이 무궁한 곳입니다. 우루무치에서 카스까지의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7박 9일간의 여행을 연재 중 입니다. <기자주>

▲ 다리위 주민들. 20년 만의 홍수로 위험수위에 오른 다리를 걱정하고 있다 ⓒ 오문수


7박 9일의 실크로드 여행 중 4일이 지났다. 몇 시간씩 계속되는 장거리 사막 여행의 강행군에도 적응이 됐다. 오후 9시나 10시쯤에 먹는 저녁식사는 다반사가 됐다. 키질석굴 탐방을 마친 일행은 악수를 거쳐 카스로 길을 떠났다. 혜초 스님은 이 길을 한달 동안 걸었지만, 버스론 13시간이면 족하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서유기>를 읽으며 꿈꿨던 상상속 실크로드 여행! 호기심 많고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이국적인 풍경과 거리 모습을 즐겼지만, 아찔할 때가 많았다. 때론 내 차인 줄 알고 브레이크를 밟느라 왼발에 힘을 주기도 했는데, 그런 나를 발견할 때마다 피식 웃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자동차나 당나귀가 끄는 마차, 오토바이에 깜짝 깜짝 놀랐기 때문. 투르판에서는 횡단보도에서 오토바이 사고를 목격하기도 했다.

느긋해진 일행이 신발 끈을 풀고 잠을 청하려는 찰나, 앞서가던 차들이 정차해 있다. 사고가 난걸까? 10분이 지나도 차가 꼼짝하지 않자 가이드가 내렸다. 홍수가 나서 다리를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막에 홍수라니... 1년에 50mm 밖에 안 내린다고 했는데. 하긴 몇 시간 전 천산신비대협곡에 10mm쯤의 비가 오긴 했다. 그래도 설마! 사막에서? 땅덩어리가 크긴 크다. 2~3일 전 수백km 떨어진 천산산맥에 비가 내렸을 거라는 가이드의 얘기다.

일행은 다리 구경에 나섰다. 다리 위에는 홍수구경을 나선 주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나는 다리 아래 교각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건 보통 상황이 아니다. 시뻘건 흙탕물이 교각에 세차게 부딪치고 있었다. 저게 견딜 수 있을까? 섬진강가에서 자란 나는 부드럽고 순하기만 하던 물이 홍수가 되어 밀어닥치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안다. 집, 다리, 10여m에 달하는 흙더미도 순식간에 휩쓸려 간다.

당국자들이 다리에 측정기를 설치하고 위험정도를 조사했지만 통과할 수 없단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면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이 10시간도 더 걸린다고 한다. 도로에서 기다리는 차량은 이미 수백m에 달했다. 100여m쯤 되는 다리의 건너편 마을쪽 둑이 터졌다. 30분이 지나 통과가 결정됐다. 가이드는 이 지역에서 20년 만에 보는 홍수란다. 차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넌다. 제발 우리가 건널 때까지는 참아줘라. 아이~휴!

▲ 백여 미터 건너편 둑이 터져 마을쪽으로 범람하고 있다 ⓒ 오문수

카스에 도착해서 안 일이지만 이 다리도 우리가 건넌 이후로 완전히 폐쇄됐고 천산신비대협곡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을 비롯한 700명이 인민해방군의 도움으로 구출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미 비는 그쳤지만 비가 내린 흔적은 곳곳에 널려있다. 밭도 푸르고 먼지도 가라앉고 뜨겁던 기온도 선선해졌다. 두 번째 다리는 안심하고 건넜다. 한 시간이나 갔을까 또 차들이 정지해 있다. 이번에는 끝이 안 보인다. 한참 만에 돌아온 가이드는 다리 한 쪽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걸 어쩌지!

일행은 예정에도 없던 도시 배성(Baicheng)현으로 방향을 돌려 저녁을  해결한 후 호텔을 잡기로 했다. 하지만 방향을 돌린 차 중에는 다른 팀들도 있다. 조그만 도시에 이 많은 사람이 들어갈 방이 있을까? 67명을 5개의 호텔에 분산해야 한다니…. 그나마도 방이 부족하단다.

우선 노인들을 위해 방을 마련하기로 한 가이드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며 전화하느라 바쁘다. 간신히 커다란 식당을 자리 잡았으나 갑작스레 대식구가 들이 닥친 식당에서도 정신이 없을 수밖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될대로 되라지 뭐. 급할 건 없다. 일행은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얘기꽃을 피우느라 떠들썩하다. 위구르인들은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다. 식당을 찾은 주민들은 일행의 심정을 알지 못한 채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춤 솜씨가 상당하다. 쿠차의 음악이 우리나라에 전래됐다는 설에서 그런지 경쾌한 우리의 음악과 비슷하다.

▲ 오후 10시 반. 인민해방군이 동원되어 복구한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넜다. 경찰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차내에서 촬영한 사진이라 흐리다 ⓒ 권태준


가이드들은 "죄송하다"고 하지만 천재지변을 어쩌랴! 오후 10시 반, 인민해방군이 동원되어 임시로 다리를 가설했다는 소식이다. 긴급 소집된 조장회의에서 예정된 일정인 악수로 가기로 결정했다.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는 차창 너머로 열심히 복구 작업하는 인민해방군의 모습이 보였다.

고마운 군인들. 그런데 6․25를 기억하는 나에게 복잡한 심사가 들었다. 고마운 군인들? 통일을 방해한 중공군? 동행했던 하나투어 권희석 대표는 "아이고 이제 다리만 보면 후들거리네!"하며 농담이다. 악수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2시 반이다. 피곤해 녹초가 된 일행이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무사고 돌발 변수는 여행의 추억거리다.

실크로드의 한족 섬 악수

악수는 여타 실크로드 도시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소수민족보다는 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도시로서, 특히 상하이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독립운동 등의 여파로 정책적인 외지인, 특히 한족의 신장지구 유입을 장려해 왔다. 이주하면 집과 토지 등을 지급하는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외지인들이 선호하는 이주지역이 되었던 악수는 다른 실크로드 도시보다 좀 더 현대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넓은 도로와 깨끗한 길, 공원,  녹지시설 등도 잘 꾸며져 있다.

▲ '악수'의 거리 모습. 한족이 많아 여타 실크로드의 모습과는 다르다. ⓒ 오문수


이곳은 기원전 2세기경 구자국이 점차 확대되면서 불교문화가 발전했다. 당시에 발전된 불교음악은 세계 불교문화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악수의 불교문화도 신장 지방을 휩쓸고 지나갔던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지금은 고대 불교문화의, 신비한 유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서쪽으로 갈수록 이슬람의 영향권이 넓어져

밤늦게 호텔에 도착한 일행은 한 시간 늦춰 카스로 향했다. 도중에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춘 '아차향'이란 조그만 마을. 마침 오늘이 장날인가 보다. 식당에서는 양고기 꼬치구이와 면음식이 나왔다. 일행은 지금까지 먹어본 중국 음식 중 최고란다. 담백하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아 맛있다는 반응이다.

한국인의 음식 습성은 참 유별나다. 몇 명이 주방에 부탁해 라면을 끓이자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여행 잘하는 비법 중 하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 것이다. 현지 음식을 먹어봐야 우리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아는 법.

▲ 악수에서 카스로 가는 도중 들른 식당. 담백한 맛이 입에 맞았다고 ⓒ 오문수


▲ 아이들은 어디서나 천사의 모습이다. ⓒ 오문수


점심을 얼른 먹은 후 100여m 떨어진 시장에 갔다. 우리나라 오일장 같은 분위기와 거의 흡사하다. 흥정을 하는 사람, 구경꾼, 물건 사라고 외치는 사람. 마이크를 끼고 쉰 목소리로 뭐라 외치며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모습은 야바위꾼과 같다. 어떤 이는 캠코더로 사진을 찍자 얼굴을 대고 찍으라며 들이대고,  손자를 시장에 데리고 와 좌판을 벌려 놓은 할머니도 옷매무새를 고쳐 잡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말 한마디 못하는 건 답답한 일이다.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할 뿐만 아니라 여기는 중국어와도 잘 통하지 않는다는 위구르 지역이다. 영어가 조금이라도 통할 만한데 전혀 아니다. 그래도 웃음으로 대하며 포즈를 잡아주는 쪼글쪼글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 시장 주변의 나무 그늘에 앉아 쉬는 노인들. 사진 찍겠다는 시늉을 하자 순순히 응해줬다. ⓒ 오문수


▲ 물건을 팔기 위해 손자(?)와 함께 시장에 온 할머니들 ⓒ 오문수


하지만 이들은 하얀 터번을 두르고 턱수염을 기른 이슬람교도들이다. 마음 한 켠이 께름칙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서구의 매스컴과 교육의 영향으로 이슬람은 무섭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탈레반과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들에게 선뜻 다가가기가 겁난다. 이슬람교도는 우리가 배척할 대상인가?

이슬람(Islam)이라는 단어는 원래 '순종'과 '평화'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으로 승화되면서 유일신 알라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통해 인간의 몸과 마음이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는 종교적 함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은 알라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복종자, 즉 '무슬림(Muslim)이라고 한다.

▲ 당나귀타고 시장에 오는 식구들. 그렇다고 60년대의 한국모습이라고는 착각하지 마시라. ⓒ 오문수


▲ 자! 왔어요 왔어 돈 놓고 돈 먹기 입니다. 애들은 가라... 야바위 장사 같은 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 오문수


세상에는 이슬람교의 전파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와 왜곡이 아직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다. 그 결과 이슬람교는 무서운 '폭력의 종교'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원래 이슬람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신앙을 '칼'로 강요하지 않는다. 코란경에는 '종교는 강제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을 강요해서는 믿음을 갖게 할 수 없다'는 등 신앙의 자유를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슬람 문명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헬레니즘 문명을 비롯한 페르시아 문명과 인도문명, 중국문명 등 주변 문명을 두루 섭취 후 이슬람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독창성을 가미한 수준 높은 문명이다. 다만 폭력적인 군사적 정복활동을 통해 이슬람을 전파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이 역기능을 불러왔을 뿐이다.

인류는 서로 다른 문명과 종교에 대해 이해와 공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호 배척하고 자신만이 우월하다는 배타주의는 또 다른 종교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실크로드의 시골 장터에서 만국 평화에 대한 씨앗을 봤다.
덧붙이는 글 '희망제작소'와 '네통'에도 송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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