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란다의 빨래세상 때를 다 벗은 말간 얼굴의 빨래 ⓒ 염정금
오전 8시, 어김없이 출근한 남편과 등교한 아이들이 흩어 놓고 간 집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다. 먼저 아침 밥상을 치우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책과 자잘한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해 둔 뒤 허물처럼 벗어 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애벌빨래를 한다.
변함없는 나의 일상이지만 유독 생각이 많은 시간은 빨래 시간이다. 말간 물에 옷을 적셔 비누질을 하노라면 오만가지 상념들이 나를 옭아맨다. 참 힘든 빨래지만 한편으로 나에겐 수많은 상념을 안겨주는 귀한 시간이다.
하루 종일 힘든 줄 모르고 뛰어놀던 아이들의 흔적이 깃든 양말은 여간 시간을 요하는 빨래. 그래서 덩달아 나의 상념도 길어진다. 간밤 학기말 시험 대비 문제를 풀 때 집중하지 않은 딸을 혼냈던 일이 마음 한자락에 자리 잡는다. 공부 좀 못하면 어떠냐 싶다가도 아니지 지금 떨어지면 안 되지 하는 두 마음의 갈등이 두 손 바닥에서 비비적거리는 양말만큼이나 갈피를 못 잡는다. 꼭 비벼도 비벼도 희미하게 남는 양말 때자국 같아 피식 웃기까지 한다. 하기 사 수능에서도 복수 정답을 인정하는 세상이니 교육에 정답이 어디 있겠으며 세상살이 정답이 어디 있겠냐 싶어 거품 난 양말을 말간 물에 휘휘 헹궈낸다.
아침저녁으로 우리 식구 얼굴을 어루만져 주듯 세안 후 물기를 제거해주는 반가운 수건, 늘 빨래할 때면 두 서너 장이 반갑게 인사한다. 이 수건을 빨 때는 유독 기분이 좋다. 비누 거품도 풍성할 뿐 아니라 파란. 분홍, 노란색이 선명해 왠지 마음까지 고와지려해 내 상념까지 고와진다.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는 우유배달 아주머니의 광고가 뇌리 속을 스친다. 정말 이런 사람이 많으면 햇살에 마른 수건처럼 포근한 세상이 될 텐데...
애벌빨래를 한 뒤 세탁기에 넣고 한 스푼의 세제를 넣어 말간 물을 가득 채우노라면 윙 소리와 함께 잘도 돌아간다. 양말, 셔츠, 바지, 잠바, 조끼, 수건....
모두 모양도 색도 용도도 다른데 세탁기 안에서는 잘도 어우러져 빙빙 맴돈다. 누가 더 세상 때를 더 내는지도 모를 정도로 휘휘 돌고 돌아 거품 속에 세상 흔적들을 쏟고 또 쏟는다.
수억대를 운운하는 사이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은 고사하고 세 식구 중 두 사람만이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모순된 세상, 우리네 세상도 저 세탁기 안의 빨래처럼 모양도, 색도 , 지위도 무시한 채 세상살이의 온갖 오욕, 탐욕, 시기 등 자잘못이 다 씻기고 말간 물 닮은 얼굴로 세상 줄에 널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덧붙이는 글
아침에 눈 뜨면 빨래 바구니에 든 빨래처럼 여러 사건으로 얼룩진 세상 빨래를 본다. 평소 빨래를 하며 상념에 젖는 사람으로 세상도 빨래를 하는 세탁기 속의 말간 물 같은 사랑, 인정, 배려로 온갖 오욕, 탐욕,시기, 모순이 다 씻겨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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