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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형제들과 함께 여름 나기

등록|2010.08.17 16:01 수정|2010.08.17 16:01
2박 3일, 우리 4남매 가족들이 뭉쳤다. 일정이 겹친 3인을 뺀 13명이 이 좁은 집에서 바글바글 그야말로 원 없이 땀 빼고 갔다. 아무리 격의 없는 형제들 모임이라지만 이 더위에 더구나 화장실도 하나인 불편한 환경에서 객이나 주인이나 괴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 동생네 식구들 환영하겠다고 담장의 나팔꽃까지 나섰다. 그전까진 앵돌아진 심술딱지처럼 얼굴 보여주지도 않더만... ⓒ 조명자


그래도 시골 정취를 느끼게 하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으니 알뜰한 휴가처로는 이보다 더 편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손이 굼뜬 나는 손님이 오기로 돼 있으면 며칠 전부터 설쳐대며 준비를 해야만 가닥이 잡히는 스타일이다. 13명이 깔고 덮을 이불 준비, 2박 3일 동안 먹을 찬거리 준비, 어디 그뿐이랴. 어디어디를 데려가야 구경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관광코스 짜는데 또 골머리를 썩인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매일매일 한끼씩 맛 집 순례를 시키면 편하겠지만 집에서만 먹기로 했다. 한 끼에 몇 십 만 원 우습게 나가는 외식비용, 나도 힘들고 동생들도 힘들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지역 특선이라는 음식을 맛보이려고 노력했다.

매일 메인 음식은 고기로 했다. 첫 날은 껍질까지 붙은 흑돼지 삼겹살 구이, 둘째 날은 떡갈비, 셋째 날은 병어조림으로 메뉴를 정하고 사이사이 잔치 국수, 오징어 죽순 초무침,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 샐러드에 돈가스 그리고 여러 가지 나물을 만들어 비빔밥도 먹게 했더니 모두 환상적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 동생들 왔다고 옆 집 할머니가 텃밭 반찬거리를 장만해 보내주셨다. ⓒ 조명자


비록 내가 직접 지은 야채는 아니지만 옆집, 뒷집 텃밭에서 방금 따온 싱싱한 호박, 가지, 오이, 고구마 줄기에 우리 텃밭의 쌈 채소, 방울 토마토까지 거둬들여 상차림을 하니 어느 한정식 집 못지않았다.

가는 길에 집집에 나눠 줄 보따리를 챙겼다. 서울에선 진짜 신안 산 소금을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소금 가마니부터 챙기고 된장, 간장, 텃밭의 들깨 잎 그리고 옆집 할머니께서 주신 오이, 가지, 고구마줄거리까지 챙기니 벌써 짐 보따리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동생들은 물론 올케까지 마치 친정 집 다녀가는 것 같다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동안 힘들었던 게 한순간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특히 친정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작년에 어머니까지 여읜 우리 올케, 그 아이에겐 친정엄마 빈자리를 메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시누이 집이라고 어려워하지 않고 즐겁고 편하게 지내고 가는 것 같아 얼마나 기쁘던지...

이 맛에 힘든 것 마다 않고 손님치레를 하는 것 같다. 서울에 도착한 동생들, 순서대로 전화를 해댔다. 자기들 눈에는 내가 한 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아침 먹으면 어느새 점심 준비, 사이사이 팥빙수에 과일에 간식 해다 바치랴. 종종걸음으로 일에 몰두하는 나를 보며 모두 감동했다나.

조카들까지 큰 이모 대단하시더라고 한 마디씩 하더란다. 형제지만 저희들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 할 정도의 헌신성. 언니 같은 든든한 울타리가 없었으면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동생들의 끝없는 칭찬이 나중에는 조카들까지 세뇌시킨 탓일까. 큰 이모의 위치를 대폭 상향시키는데 주저없이 동참한 조카들을 보자니 너무 재미있었다.

이래서 전설은 만들어지는구나. 어떤 대상에 자기가 믿고 싶고 희망하는 이미지를 덧칠하는 것. 비록 환상과 착각일지라도 그 속에서 위안과 행복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본능은 종종 전설을 만들어낸다.

우리 집안에서 나는 전설이다. 딱히 몰락한 집안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나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설이 되었다.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 해 동생들을 거두고, 아버지가 진 빚까지 해결하면서 식구들 거리로 나앉지 않게 한 일등공신이 바로 나란다.

따지고 보면 동생들이 나보다 더 고생을 하고 몰락한 집안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는데도 말이다. 맏딸이라고 대접 받고 무한한 신뢰까지 한 몸에 받으며 살았던 세월. 내 그늘에 가려진 동생들은 만년 '따까리'였는데도 이 아이들은 억울해 할 줄을 모르니 이 무슨 해괴한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동생들에겐 힘들 때마다 "언니가 있으니까, 큰 누나가 있으니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 그것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고 그 다음은 잊어버리는 무심한 나에 비해 동생들은 부모, 형제들이 겪는 고초에 더 애달파 하고 보태주지 못해 안달하는 편이다. 헌신성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작은 일엔 연연하지 않는 편인데 반해 동생들은 수시로 친정 집 들락거리며 노부모님 챙기고, 무슨 기념일 때마다 모시고 나와 외식을 시켜드리는 효자, 효녀들이니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건 물론 귀찮아서 따라 갈 생각도 애초부터 없다.

자기들이 좋아 멋대로 전설을 만들어 냈으니 그 앞에서 깨춤이라도 추는 시늉을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설이 될 생각이 없다. 실망하든 말든 제 알아서 하라 하고 앞으로도 '쭈욱~' 내 멋대로 살판이다.

제 그릇의 분수를 모른다면 종내는 저 깨지고 남 깨지고...남는 거 하나도 없더라.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인터넷 한겨레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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