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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을 견디는 나비의 발버둥은 희망일까요?

등록|2010.08.18 19:21 수정|2010.08.18 19:21
8월 18일 오늘 재벌가의 한 가족 구성원이 투신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밤(8월 14일) 비가 억수로 퍼부었습니다. 머리 바로 위에서 천둥이 울고 벼락이 곧 숫구멍을 내리칠 듯했습니다. 밑동 굵은 느티나무의 가지들이 모두 세차게 흔드는 총채 자락처럼 나부꼈습니다. 키 큰 자작나무는 좌로 30도를 누웠다가 다시 우로 40도를 돌아누웠습니다. 하늘이 불 같이 노했음이 분명했습니다.

참개구리조차도 놀라서 모티프원의 서재 앞 베란다로 피난을 왔습니다. 개구리를 보자 이 개구리보다 작은 미물들은 도대체 이 태풍을 어떻게 견디나 궁금해졌습니다.

▲ 태풍을 피해 베란다로 올라온 참개구리 ⓒ 이안수


낮을 울던 그 많은 참매미와 쓰름매미 그리고 애매미들은 모두 어디에서 두려움을 이길까?밤을 울던 방울벌레와 긴꼬리와 베짱이는 이 태풍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천지가 성나서 으르렁대는 그 밤에 저는 모티프원의 정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것들의 거취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좀작살나무의 가지를 살피고 무궁화잎 뒤를 뒤졌지만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자작나무의 허리를 70도의 폭으로 흔들고 돌개바람에 휘말린 좀작살나무의 가는 가지 하나가 제 뺨을 후려쳤습니다. 저는 마침내 다른 생명체 찾기를 포기하고 서재로 다시 들어오려고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방충망에 붙어 있는 풀표범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 태풍을 견디는 풀표범나비 한 마리 ⓒ 이안수


그 나비는 이 밤에도 날개를 나붓거리고 있었습니다. 해바라기꽃 위에서처럼 양 날개를 나풀거리는 날갯짓이 아니라 두 날개를 마치 한 장처럼 붙인 채 180도로 나풀거렸습니다. 감거나 3단쯤으로 접을 수 없는 곧추선 나비의 날개. 자신의 몸집보다도 수십 배가 넓은 화려한 그 날개는 센바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깃발처럼 나부꼈습니다. 좌우 180도로 대책 없이 방충망을 때리는 그 날개의 시맥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위태로웠습니다.

꽃술을 더듬던 긴 더듬이는 이 밤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눈을 감을 수조차 없는 겹눈이 차라리 애처로웠습니다. 단지 방충망을 움켜진 앞다리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뻗어 힘준 앞다리와 접어 오므린 뒷다리에 불뚝 선 근육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명주실의 한 올처럼 가는 그 다리에 힘이 풀리면 마침내 바람에 휘말려 어느 나무둥치에 머리를 처박고 날개는 산산조각날 것이 분명했습니다. 실낱 같은 희망은 오직 방충망의 가는 쇠 가닥을 움켜진 다리가 견뎌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나비가 안간힘으로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태풍이 지나고 다시 해바라기꽃 위를 나풀거릴 '희망'일까요? 아니면 유전자속의 '본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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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찔끔 눈물이 났습니다. 생명의 숭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비는 그날 밤 제게 생명의 숭엄함을 그렇게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은 그것이 '희망'이던든'본능'이든 이처럼 처절하게 지켜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삶이 고단할 때 군대 생활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진흙탕물속을 뒹굴고, 외줄 자일을 타던 유격훈련과 영하 40도 얼음 위에서의 혹한기 훈련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위로 받았습니다. 이제는 군에서의 훈련보다도 더 구슬픈 나비의 그날 밤 발버둥을 기억할 것입니다.

큰 기업의 CEO이기도 했던 그 재벌가 식솔의 투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태풍 속에서도 삶을 붙잡으려는 나비의 안간힘의 노력에 비해 참 부끄러운 선택이다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과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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