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얼마나 굶기려고 이걸 먹이냐?"
제주올레 160리, 일흔 부모와 떠난 '불효 여행'
▲ 2009년 1월에 찍은 제주올레길2코스 광치기 해변(왼쪽 위), 8코스 중문해수욕장(오른쪽 위), 10코스 화순 해수욕장(왼쪽 아래), 10코스 소금막 주상절리(오른쪽 아래) ⓒ 김태희
"엄마, 금요일에 시간 있어? 제주도 안 갈래? 엄마 올레길 가고 싶어 했잖아."
지난 12일 목요일 아침, 장마철에 청개구리 뛰어들 듯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항상 하는 일이 많았던 엄마이지만 시간이 있다고 하신다.
"응, 방금 인터넷 검색해 보니까 있네."
"그럼 아빠도 데리고 가자."
우여곡절 끝에 엄마와 나는 13일 금요일 아침 비행기로 먼저 출발하고, 아빠는 토요일 아침에 합류하기로 하셨다.
엄마를 쫄쫄 굶긴 '불효 여행' 첫날
제주도는 엄마 아빠가 신혼여행으로 처음 가 보셨던 곳이다. 그때 택시로 이곳저곳을 관광했었고, 기사님이 사진도 참 잘 찍어 주셨단다. 30년 후 동생이 우리도 가족 여행이라는 걸 한 번 가 보자고 하여 온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했다. 그때 동생은 '뽀다구'를 콘셉트로 잡았다. 그림 같은 펜션을 예약하고, 고급 승용차를 렌트하고, 맛있다는 집을 찾아서 부모님을 모셨다. 나는 동생이 운전하는 렌트카 옆자리에 편하게 앉았다가 달랑 돈만 동생에게 보냈을 뿐이었다.
아들이 모신 '럭셔리' 여행과 달리, 8년 후 딸이 주도한 여행의 콘셉트는 '불효(?)'가 되고 말았다. 일흔을 넘기신, 일흔을 바라보시는 부모님의 어깨에 가볍지도 않은 배낭을 하나씩 착착 얹어 놓고는 하루 40리 길(하루 평균 15~16km를 걸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빠는 40리 길이라고 하셨다. 어르신들에게는 길이 리 단위로 다가오는 것 같다)을 걸어가시게 한 것이다.
엄마와 첫날 걸었던 5코스에서는 식당도, 간식거리를 살 가게도 쉽게 만나지 못했다. 밥심으로 사시는 엄마가 배가 고파 맥이 풀릴 지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점심을 드리고, 다리가 풀릴 지경이 되어서야 저녁을 드렸다. 다행히 아빠가 합류한 둘째 날부터는 간식을 살 가게와 식당이 자주 나타나 식사 문제로는 더 이상 불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첫날 너무나 기억에 남도록 엄마를 굶겨서인지, 넷째 날 아버지는 올라가시고 두 모녀만 10코스를 돌 때였다. 11시 즈음에 올레꿀빵을 사 드리자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은 얼마나 굶기려고 벌써 이걸 먹이냐? 이거 수상한데."
▲ 올레 꿀빵올레길을 걸으며 매일 한 개씩 먹은 간식. 속에는 단팥을 넣고 겉에는 견과류를 묻힌 빵인데 부모님이 좋아하셨다.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어느 집에서 개인적으로 만들어 팔다가 인기를 끌면서 올레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간식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 김태희
깡촌 여자, 벽촌 남자... 걸어다니는 식물도감인 두 분
엄마의 고향은 충북 괴산, 아빠의 고향은 황해도 수안이다. 구글 어스로 찾아서 보여드렸는데, 두 지역 모두 옛날에는 만만치 않은 두메산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분은 서로 자신은 도회지 출신이지만 너는 깡촌 출신이라 이런 것도 모른다, 너는 벽촌 출신이라 이런 것도 안 해 봤다며 아웅다웅 하신다.
도시에서 자란 엄마 친구 한 분은 푸른 것은 풀이요, 붉은 것은 꽃이라 하실 뿐 식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신다고 한다. 두 분은 깡촌, 벽촌에서 자라나서일까? 2009년 1월 혼자 제주올레를 찾았을 때에는 마늘, 백년초, 수선화만 누가 가르쳐주어 알았지만, 부모님과 함께 걸으니 식물도감이 따로 없었다.
"이거 파초다. 육지는 파초 색깔이 빨간데, 여기는 이런 색이구나. 이건 억새야. 이거 워낙 억세서 만지면 손 베고 그래. 야, 괜히 손 베나 안 베나 만져 보지 말아. 저건 문주란이다. 저거 우리 집 화분에 있는데, 저런 꽃이 피네. 야! 이건 엉겅퀴야."
"이건 참깨다. 저기 보이지? 꽃이 하얀 거 말이야. 이건 땅콩이고. 이건 달개비다. 저 푸른 색 작은 꽃 말이야. 이건 무화과야. 잎이 손가락 모양으로 생겼잖아. 술안주로 먹는 무화과가 이 열매 말린 거야."
두 분이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기에 은근히 걱정을 했었다. 뭐 이런 동네 길을 비행기씩이나 타고 보러 오냐고 하실까봐. 하지만, 두 분은 어린 시절 주변에서 흔히 보았던 풀 이름을 딸에게 알려주시며, 예전 여행 때는 보지 못했던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해 즐겁게 걸어가셨다.
▲ 제주올레길에서 만난 들꽃파초(왼쪽 위), 억새(오른쪽 위), 문주란(왼쪽 아래), 엉겅퀴(오른쪽 아래) ⓒ 김태희
"우리 같은 노인네라야 이런 길도 걸어갈 수 있는 거야"... 부모님의 노익장
둘째 날 아버지를 6코스의 시작점, 쇠소깍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전 6시 반 경에 비행기를 타야 하니 늦잠 자지 말고 공항에 와야 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해서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택시로 쇠소깍까지 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 연배인 분 중에는 자식이 다 챙겨줘야만 하는 분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항에 내려서 리무진 버스와 택시로 가는 방법이 너무 비싸다며, 알아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셔서, 알아서 시외버스를 타고 쇠소깍으로 오셨다. 아버지가 너무너무 기특(?)했다. 하긴, 요즘에 예순, 일흔이 할머니, 할아버지 연세인가? 적어도 팔십은 넘으셔야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슬슬 불러드리지.
두 분은 이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친구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같이 가려고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길을 걸으며 두 분이 내리신 결론은 '안 된다'였다. 엄마, 아빠처럼 튼튼한 노인네들이야 문제없지만 연약한 내 친구 아무개, 걷기 싫어하고 찡찡대는 내 친구 아무개라면 언감생심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두 분의 결론은 우리처럼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인네라야 이런 길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분은 해안가 바윗길도, 아스팔트 길도, 계단도 문제없이 걸어가셨다. 씩씩하게 걸어가시는 두 분의 뒷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니 올레길은 어르신들이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라고 만든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부모님들도 이 길에 오시면 우리 부모님처럼 아무나 못 걷는 길이라 하시며 당신의 튼튼한 체력에 자부심을 갖게 되실 것 같다.
▲ 6코스의 어느 험난한 바닷가 길 ⓒ 김태희
그래도 올레 여행길에 딸이 필요한 이유
길을 걷다 문득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야, 그래도 네가 데려와 주니 이런 데도 와 본다."
"에이, 뭘. 엄마 아빠 워낙 튼튼하고 씩씩하잖아. 혼자서 충분히 다니고도 남을 텐데, 뭘."
"아니야, 그래도 젊은 네가 이렇게 계획 다 세우고 인솔해서 데려가 주니까 우리가 따라오면서 가는 거지, 우리끼리는 엄두도 못 냈을 거야."
부모님은 항상 씩씩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응석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은 내가 두 분을 보호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법적인 성인이 된 지 오래지만, 갑자기 내가 부모님을 봉양하는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모녀가 단둘이 5코스를 걸던 첫날 엄마가 제일 많이 불평하신 것은 갈림길에 화살표나 리본이 보이지 않거나, 아주 작은 화살표가 숨어 있는 경우였다. 그래도 잠시 헤매긴 했지만, 내가 금방금방 표시를 찾아내어 심하게 헤매거나 길을 잃지는 않았다.
"엄마, 화살표 저기 있다. 이쪽이야."
어느 돌에 자그맣게 그린 화살표를 찾아내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눈 밝은 년이나 보지, 나 같은 늙은이한테 보이기나 하겠냐."
이런 면 때문에라도 부모님의 올레길 여행에는 아들, 딸이 동행을 해드려야 할 것 같다.
'불효 여행'을 마치고 이틀 후,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아빠께 안부 전화를 드렸는데 여행이 즐거웠다고 아주 기뻐하셨다고 한다.
"뭘, 노인네들 쫄쫄 굶기고 불효 여행을 했구만."
"아니에요, 형님. 형님이랑 어머님이랑 먼저 내려가셨을 때 전화 드렸는데, 아버님께서 당신도 내일 제주도 가신다고 아주 설레 하시던걸요."
"그랬어?"
"그리고 좀 전에 어머님과 통화했는데 제주도에서 아주 재미있으셨대요."
▲ 6코스의 어느 바닷가 길 ⓒ 김태희
늙으신 부모님에게 배낭을 들려서 아빠는 이틀 동안 80리, 엄마는 나흘 동안 160리를 끌고 다녔는데도 두 분에게는 모처럼 자연과 함께한 즐거운 추억이 되셨나 보다. 물론 올레길은 만만하지는 않다. 놀멍, 쉬멍, 보멍 가라고는 하지만 진짜 그렇게 걸었더니, 안내 팸플릿에 대여섯 시간 걸린다고 한 거리를 우리는 일고여덟 시간 정도에 다 걸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와랑와랑한 햇볕이 조금 눅어지는 계절에 부모님을 모시고 올레길을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신혼여행 때 보셨던 제주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드리는 가장 좋은 효도 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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