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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67회)

회색지대(灰色地帶) <2>

등록|2010.08.24 10:13 수정|2010.08.25 09:02
문자께나 쓰는 유생들은 쇠고기 먹는 자를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다스리라 했지만 소의 도살이나 행정조치가 그림자 밟기여서 식용이 멈춘 건 아니었다. 왜 조선시대엔 쇠고기 먹는 걸 금했을까?

<태종실록>엔 가뭄이 오자 고기반찬을 멀리하고 술을 끊었다고 적고 있다. 가뭄이나 홍수 등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근신하는 의미로 고기가 없는 밥을 먹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성관계도 갖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육조와 승정원에선 가뭄의 원인으로 '소의 도살'을 꼽았다는 점이다.

<소를 도살하지 말란 금령이 있는 데도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도살자를 붙잡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범인의 가산(家産)을 상으로 주고 사람들에게 쇠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되 어기는 자는 죄를 논하소서. 저절로 죽은 소는 한양에서 세금을 매기고 지방은 관청의 명문(明文)을 받은 뒤 매매를 허락하되 이를 어기면 법에 의해 죄를 논하소서.>

소의 도살을 막는 금살도감이 있었지만 과연 채직동이 성균관 일을 제쳐두고 밀도살에 관여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당시의 한양은 쇠고기의 최대 소비처로 하루에 도살되는 소의 양이 5백 마리에 해당됐다.

소 잡는 백정들은 이미 조선 전기에 한양에서 쫓겨났으니 소의 도살과 쇠고기 판매에 나선 건 반촌에 사는 반민들이었다. 서과의 말이 조심스러웠다.

"나으리, 반촌에 사는 백성들은 나무 베는 것과 소 잡고 판매할 권한이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가 이곳에 들려 도승지의 심부름을 한 지도 모를 뿐더러···."

"반촌에 간 건 그런 이유가 아니다. 도승지는 평소 쇠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그걸 구하려는 생각은 아니 했을 것이다."

"하오면?"
"조금 기다려 보거라."

서대문 관아에 나갔던 장용사가 돌아온 건 신시가 약간 지나서였다. 그는 서령사의 심상치 않는 내력을 가만히 들춰냈다.

"서대문 관아 서령사는 박씨 성을 쓰는 자로 관아에서 쓸 여러 물건들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엔 쇠고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자 채직동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채가는 성균관에서 양반 자제들의 뒷수발을 챙기는데 예전엔 담채화(淡彩畵)에 상당한 수준이 있어 그림 공부를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다른 일은 없던가?"
"가끔 도화서에 들르는 모양인데 예전의 인연으로 정순왕후 전각에도 들르는 모양입니다."

굳이 묻지 않았지만 장용사는 뒷수쇄를 채웠다.
"그림을 그린 탓에 정순왕후의 총애가 대단했답니다. 그자는 담채화를 이용해 미로(迷路)를 그리는 대단한 능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미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 미리 정하고 그 길을 찾아가는 걸 얼기설기 엮어 쉽게 추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임오년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니 어떤 일을 꾸미는지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잖습니까."

"서령사는 어찌 말하던가?"
"그 사람은 선비들이 심심파적으로 행하는 의례적인 일로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사사가 돌아오지 않자 반촌에서 술자리에 끼어들었을 것이라 여긴 것 같았습니다만 다른 뜻은 없어 보였습니다."

"관아의 종놈이 술자리에 낀다?"
"물론 안 되지요. 나라 법으로야 그런 일이 있으면 엄벌에 처하겠으나 특별한 사이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도승지 댁에 있는 종놈들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약용은 대꾸없이 아래턱을 감아쥐었다. 도승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사사에게 뭔가를 지시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었으나 전연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사가 반촌에 온 건 서대문 관아 서령사의 지시였다. 정약용은 그 부분부터 파고들었다.

"서령사가 사사를 반촌에 보낸 건, 겉으론 서대문 관아에서 사용할 쇠고기의 양 때문이다. 나라에서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령이 있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다. 서대문 관아 대소인(大小人)의 집에 아침저녁으로 봉양하거나 귀한 손님을 맞는다면 쇠고기를 쓰겠지. 저절로 죽은 쇠고기를 쓰지 않는 이상 부족할 건 뻔한 노릇 아닌가."

정약용의 예측대로 과연 그러했다. 서령사는 하루 쯤 반촌에 머물며 쇠고기 양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오라 한 것인데 사사는 쇠고기에 버금가는 것을 추스르며 채식동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 반촌은 쇠고기 외에 다른 것도 있었다. 사냥꾼이 잡은 산꿩이 있었고 말린 꿩고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닭고기 돼지고기도 있었다. 쇠고기를 파는 현방(懸房)은 쇠고기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푸주간으로 나라에 세금을 내는 공식적인 가게였다.

채식동이 성균관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사사를 만난 정겨움에 금계(金鷄)를 꺼내 그의 부인에게 요리를 청했다. 꿩에 속하는 금계의 수컷은 황금빛 나는 벼슬이 돋보이는 것으로 석 달 전 삼화루(三華樓) 전각에서 오경환에게 받았었다.

"자네 부인의 음식 솜씨가 맛깔져 성균관 유생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네. 더군다나 자네가 담채화에 솜씨 있다 하니 그걸 한 번 봐야지. 며칠 후 회음도(會飮圖)에 관한 주연이 열릴 것이니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생각해 자네 부인에게 요릴 만들라 하게. 내가 듣기엔 비름나물을 금계와 요리하면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주연상이 될 것이네."

금방 열릴 것 같은 연회는 몇 번의 연기를 거듭하다 오경환이 형조좌랑으로 발령나며 자연스럽게 취소돼 버렸다. 그러했기에 주연을 준비했던 채식동에게 그런 물건이 있었다. 채식동의 부인이 나물과 버무린 금계를 내오자 음식을 밀치며 가만히 목소리를 내놓았다.

"사사야, 우리 마누라의 음식 솜씨는 알아준다. 어려서부터 성균관에서 자랐으니 맛깔진 솜씨로 선비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건 유생들이 다 알지. 어쩌다 나같은 사람과 부부가 됐으니 운은 없는 편이다만 시일이 지나 제향을 맡는 수복(守僕)이 되면 고생이 끝나겠지. 자, 들자꾸나!"

참으로 별미였다. 채식동은 서대문 관아에서 쓰게 될 쇠고기 양에 대한 문제가 걸렸으니 비록 아랫사람일지라도 사사를 홀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서령사는 정순왕후의 부르심을 받아 오래 전에 손을 놓은 담채화를 다시 손댄다 하니 그 또한 축하해야할 일이었다.

"사사야, 너 또한 도승지 영감의 사랑을 받았다고 들은 바 있으나 지금은 관아의 노비 신세니 지난 일은 잊도록 해라."

귀동냥으로 전해오는 얘기지만 이곳 반촌에 사는 사람들은 한양 토박이가 아니라 개성사람이니 한양토박이 들과는 피가 다르고 격이 달랐다.

반인들은 참고 견디는 것보다 성격이 사치해 왕왕 싸움이 일어나 상대를 칼로 긋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듯 반민들은 한마디로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채식동이 말한다.

"이곳에 사는 반인(泮人)들은 문성공 안유(安裕)가 자신의 집에 있는 노비 1백여 명을 조선왕조에 희사해 학교가 부흥할 것을 바란데서 비롯됐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고 국학(國學)을 옮기자 노비 자손들이 반수를 둘러싼 채 집을 짓고 살다보니 골목과 거리에 개 짖는 소리와 닭울음소리가 들려 반촌을 이룬 것이야."

안유(安裕). 이 사람은 안향(安珦)으로 고려 말에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온 인물이다. 그는 유학의 진흥을 위해 관료를 대상으로 섬학전(贍學錢)을 조성하고 돈의 일부를 중국 강남으로 보내 경전 등을 수입한 공으로 반촌이 형성된 것이다.

그곳에 있었던 건 두어 시각이 됐으나 형조(刑曹)에서 채식동을 찾는 이가 있어 사사는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모두 마무리 지었기에 서대문 관아로 돌아갔다. 나중에 사사의 죽음을 알게 된 채식동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고 혀를 찼다.

"사헌부에서도 아시겠지만, 소인은 반촌에 살면서 남을 해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의 마누라 역시 악한 마음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니까요."

"사사가 응란교(凝鸞橋) 다리 아래 쓰러진 것으로 보면 분명 가까운 곳에서 독을 먹었다는 게 분명하다. 서대문 관아에 사람을 보내 알아본 바론, 사사가 자넬 만나 서대문 관아에서 쓸 쇠고기의 양을 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가?"

"그렇습니다. 예전에 도승지 영감을 따라 반촌에 들르다 보니 낯이 익은 데다 아이가 워낙 싹싹해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끼던 금계를 요리해 준 게지요."

"금계를 요리했다?"
"예에. 제 마누라가 요리한 것이지만 양이 워낙 적어 사사만 몇 점 먹었습니다."

"고기를 다른 것과 먹어?"
"예에. 비름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비름나물. 이른바 장명채(長命菜)라 부르는 이 식물은 시금치와 비슷하나 난치병을 치료하는 신비한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약용식물이다. 연한 순을 뜯어 데친 후 찬물로 우려낸 다음 양념을 버물렀다. 맛도 괜찮고 독소를 다스리는 효과가 있었으나 장명채는 복용할 때 금기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식경(食經)>에서 경고한 내용이다.

<말린 고기를 기장쌀에 넣어 먹어선 안 되고 비름나물을 금계(金鷄)와 섞어 먹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금계와 비름나물을 같이 먹는 건 독(毒)이 발생해 매우 위험했다. 채식동은 그걸 몰랐기에 부인에게 요리를 만들게 해 사사를 대접한 것이다. 정약용이 즉시 물었다.

"금계를 어디서 받았는가?"
"삼화루(三華樓) 기생방입니다. 정순왕후께서 내리신 것이라 하여 형조좌랑 오경환이 줬습니다만 가까운 시일 안에 쓸 물건이라 하여 지금껏 보관해 왔습니다. 금계가 그토록 위험한 물건인줄 알았다면 소인이 어찌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주}
∎섬학전(贍學錢) ; 고려와 조선의 유학기관에서 쓰는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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