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모피모자 쓰고... 놀라운 서역 체험
[실크로드 여행, 환상에서 깨어나라 ⑮] 우루무치 시내 기행
이도교 시장으로 불리는 국제 대바자르
우루무치로 들어선 차는 시내 남쪽 해방남로 끝에 있는 국제 대바자르에 우릴 내려놓는다. 이곳은 우루무치 제일의 재래시장이다. 가운데 광장이 있고, 주변에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 많아 이곳이 한족문화와는 다른 곳임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파리쿤사(巴里坤寺)로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다. 사원 둘레에 있는 4개의 첨탑 미나레트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사원 앞에는 80m 높이의 전망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리고 오페라 극장, 대형 마트인 카르푸 등이 있어 문화, 종교,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바자르 시장은 면적이 4000㎡에 이르며, 3000개의 상가가 영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팔리는 물건으로는 과일과 같은 농산물, 의류, 나무 또는 금속으로 만든 공예품, 악기, 도자기, 골동품 등이 있다. 국제 대바자르는 이도교 시장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가까운 곳에 이도교가 있기 때문이다.
국제 대바자르가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은 2003년 6월이다. 이를 통해 옛 실크로드의 영화를 재현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곳은 우루무치 상업, 오락, 문화와 예술, 음식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식광장에서는 구이, 탕, 면, 만두 등 56개 소수민족의 대표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서역제일가(西域第一街)'라고도 부른다.
한 여름에 털모자를 쓰게 된 사연
아내와 나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시장의 물건을 구경한다. 내 눈에는 전통 악기들이 눈에 띈다. 아내는 금세공품과 의류에 관심이 많다. 이것저것을 구경하다, 아내가 털모자 가게로 들어간다. 그때 마침 박정란 선생도 합류한다. 모피로 된 모자를 하나 사고 싶은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이 둘이 장사를 한다. 인상이 좋은 편이다.
아내와 박 선생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가격을 물어본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중국어가 아니다. 위구르어 같기도 하고 러시아어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럭저럭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물건은 눈으로 본 다음, 마음에 드는 것을 써보고 맞는지 확인하면 된다. 문제는 가격이다. 중국에서는 절반 가격에서 흥정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강심장이 못되니 60% 정도의 가격을 부른다.
그러자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조금 양보해 70% 정도의 가격을 불러도 양보할 생각을 안 한다. 실랑이 끝에 80%의 가격에 두 개를 샀다. 하나는 300위안이고, 다른 하나는 380위안이다. 우리 돈으로 하면 5만5천원과 7만원 정도다. 아내와 박선생은 금년 겨울 모피 모자를 쓸 생각을 하면서 아주 만족해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바자르 광장으로 나와 모피 모자를 쓰고 낙타와 전망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여름에 모피 모자라니. 그런데 이곳에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위구르 사람들도 기념촬영을 하느라 바쁘다. 우리 일행은 정해진 시간에 다시 광장으로 다 모인다. 얼굴을 보니 다들 즐거운 표정이다. 서로 각자 산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차로 향한다. 다음으로 갈 곳은 홍산공원이다.
홍산공원 조망
홍산공원은 우루무치 시내 중심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르면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바자르에서 홍산공원엘 가려면 홍산체육장 앞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한다. 체육장은 우리로 말하면 운동장 또는 경기장이다. 이곳에서 차를 내리니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우리는 길을 건너 홍산공원 동문으로 들어간다. 홍산은 산을 이루는 바위가 붉은색을 띠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꽃밭과 회전관람차가 눈에 들어온다. 꽃밭에는 사슴을 한 쌍 만들어 놨다. 사슴과 우루무치,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가이드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 우리는 공원을 한 바퀴 돌 생각으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가다 보니 대불사라는 절이 나타난다. 입구에 홍살문처럼 기둥을 세우고 한자로 대불사(大佛寺)라고 썼다. 기둥 앞에는 두 마리 사자가 지키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으나, 우리 팀원들이 바로 산길을 오른다. 조금 더 가니 두 마리 공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있다. 공작이 참 예쁘다. 조금 더 올라가니 우루무치 시내가 넓게 보이기 시작한다. 경제가 좋아지면서 우루무치 시내에는 고층빌딩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시내를 좀 더 잘 조망하기 위해서는 원조루(遠眺樓)에 오르는 게 좋다.
원조루는 말 그대로 멀리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이다. 기와를 얹은 3층 건물로 중국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에 오르면 우루무치 시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홍산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홍산은 해발이 1391m이다. 그러나 우루무치의 해발 자체가 높기 때문에, 홍산은 뒷동산이나 당산을 오르는 느낌이다.
정상에는 임칙서(林則徐: 1785-1850) 석상이 있고, 건너편으로 9층 전탑이 보인다. 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상을 조금 내려갔다 계단을 통해 탑 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원래 이 탑의 이름은 진용탑(鎭龍塔)인데 사람들은 그냥 홍산탑이라고 부른다. 진용은 용을 진압했다는 뜻이다. 이 탑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우루무치에 비가 자주 오고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던 강(현재: 和平渠)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수시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강 속에 사는 용의 조화였다. 사람들은 서왕모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서왕모가 용을 두 동강 내 이곳 홍산과 건너편 야마리크산(雅瑪里克山)에 묻었다. 이후 더 이상 비가 와 강이 범람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기념해 진용탑을 세웠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훼손된 것을 최근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또 하나의 탑은 보산로(寶山路) 인근 야마리크 삼림공원 안에 있다. 홍산탑 앞에 서면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가 보인다. 그 아래 작은 저수지가 있으며, 사람들이 그곳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저수지 옆으로는 우루무치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가장 큰 도로인 하탄로(河灘路)가 지나간다.
임칙서 이야기
임칙서는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데, 아편전쟁(1839-42)을 일으킨 인물로 유명하다. 1830년대 중국에 아편이 유행했고, 조정에서는 이를 퇴치하기 위해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광둥성(廣東省)에 파견했다. 그는 외국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모두 폐기시키고, 다시는 아편을 수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에 영국이 중국에서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광저우시를 공격했고, 아편전쟁이 시작됐다.
그 결과 영국군이 승리했고, 임칙서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북서쪽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가 간 곳이 신장성 북부의 이리(伊犁)였다. 임칙서는 1842년 8월 시안(西安)을 출발 4개월만인 12월 이리에 도착해, 선정을 베풀고 개혁을 실시했다. 그가 벌인 대표적인 사업이 하천 정비와 수로 개척이다. 이를 통해 우루무치, 투르판, 하미, 쿠차 등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가 녹주(綠洲)로 변해 갔다.
그는 또한 이곳 신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역사와 지리, 풍토와 기후, 경제, 민심 등 신장지방의 각종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845년 임칙서는 산시성과 깐수성을 다스리는 산깐총독(陜甘總督)이 되어 신장을 떠난다. 그렇지만 신장사람들은 임칙서의 선정을 잊지 못해 이곳 홍산공원에 그의 석상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석상 옆에는 아편을 불태워 없앤 금독동정(禁毒銅鼎)이 세워져 있다.
우루무치의 저녁 시간
우루무치 지역의 중국화는 건륭제 때인 1755년 청나라 군대가 진주하면서 시작된다. 1763년에는 도시 이름을 적화(迪化)로 바꾸고 성을 쌓았다.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위구르족 등 지방 호족이 왕을 칭했다. 1875년 청나라 조정에서는 좌종당(左宗棠)을 흠차대신에 임명, 신장 토벌에 나선다. 1884년에는 신장성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고, 청나라에 완전히 귀속된다. 1913년 신장성은 중화민국 정부에 속하게 되었으나, 1933년 다시 위구르인들이 중심이 되어 동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을 만들어 독립한다.
신장성이 다시 중국의 세력권에 들어간 것은 1949년이다. 팽덕회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우루무치를 정복했고, 신장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성(省)이 되었다. 1954년 2월1일에는 우루무치가 적화라는 중국식 도시 이름 대신 원래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지금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소수민족은 한족의 지배에 반대해 꾸준히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독립성은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한족이 이 지역의 경제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소수민족의 불만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그 결과 2009년 7월 소요사태가 발생, 197명이 사망하고 680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도 한족과 이들 소수민족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잠복상태에 있어 더 큰 폭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국 정치의 3T를 대만(Taiwan), 천안문(Tainanmen), 티벳(Tibet)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X(신장: Xinjiang)를 하나 덧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홍산공원을 마지막으로 우루무치 시내관광도 끝났다. 이제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저녁은 오랜만에 한국식당에서 먹기로 되어있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삼겹살이 마련되어 있다. 실크로드 여행을 하면서 양고기만 먹었는데, 삼겹살을 상추쌈에 싼 다음 쌈장을 넣어 맛있게 먹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음식에 문제가 좀 있었다. 식사 때마다 거의 같은 종류의 음식이 나와 다양성이 부족했다.
저녁을 먹고 나니 8시 밖에 안 되었다. 비행기는 우루무치 공항을 밤 1시에 출발한다. 그러므로 11시까지만 공항에 도착하면 된다. 아직 3시간이나 여유가 있다. 우리는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바자르의 야경을 보러가는 것도 괜찮고, 좋은 공연을 하나 보는 것도 괜찮은데, 그런 일정을 잡기란 쉽지 않다. 가이드의 입장도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는 원칙은 지키되 경우에 따라서는 타협과 조정도 필요하다. 이번 여행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얻은 게 많았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주어진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서남쪽 실크로드를 보는 일만 남았다. 쿠차, 카슈가르, 호탄 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일이다. 나는 조만간 그것이 가능하길 기대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장 민족음악의 세계로 빠져든다.
▲ 대바자르의 전망탑과 파리쿤사 ⓒ 이상기
우루무치로 들어선 차는 시내 남쪽 해방남로 끝에 있는 국제 대바자르에 우릴 내려놓는다. 이곳은 우루무치 제일의 재래시장이다. 가운데 광장이 있고, 주변에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 많아 이곳이 한족문화와는 다른 곳임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파리쿤사(巴里坤寺)로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다. 사원 둘레에 있는 4개의 첨탑 미나레트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사원 앞에는 80m 높이의 전망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리고 오페라 극장, 대형 마트인 카르푸 등이 있어 문화, 종교,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바자르 시장은 면적이 4000㎡에 이르며, 3000개의 상가가 영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팔리는 물건으로는 과일과 같은 농산물, 의류, 나무 또는 금속으로 만든 공예품, 악기, 도자기, 골동품 등이 있다. 국제 대바자르는 이도교 시장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가까운 곳에 이도교가 있기 때문이다.
국제 대바자르가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은 2003년 6월이다. 이를 통해 옛 실크로드의 영화를 재현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곳은 우루무치 상업, 오락, 문화와 예술, 음식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식광장에서는 구이, 탕, 면, 만두 등 56개 소수민족의 대표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서역제일가(西域第一街)'라고도 부른다.
한 여름에 털모자를 쓰게 된 사연
▲ 대바자르의 리무진 ⓒ 이상기
아내와 나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시장의 물건을 구경한다. 내 눈에는 전통 악기들이 눈에 띈다. 아내는 금세공품과 의류에 관심이 많다. 이것저것을 구경하다, 아내가 털모자 가게로 들어간다. 그때 마침 박정란 선생도 합류한다. 모피로 된 모자를 하나 사고 싶은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이 둘이 장사를 한다. 인상이 좋은 편이다.
아내와 박 선생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가격을 물어본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중국어가 아니다. 위구르어 같기도 하고 러시아어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럭저럭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물건은 눈으로 본 다음, 마음에 드는 것을 써보고 맞는지 확인하면 된다. 문제는 가격이다. 중국에서는 절반 가격에서 흥정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강심장이 못되니 60% 정도의 가격을 부른다.
▲ 모피모자를 쓰고 전망탑 앞에서 ⓒ 이상기
그러자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조금 양보해 70% 정도의 가격을 불러도 양보할 생각을 안 한다. 실랑이 끝에 80%의 가격에 두 개를 샀다. 하나는 300위안이고, 다른 하나는 380위안이다. 우리 돈으로 하면 5만5천원과 7만원 정도다. 아내와 박선생은 금년 겨울 모피 모자를 쓸 생각을 하면서 아주 만족해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바자르 광장으로 나와 모피 모자를 쓰고 낙타와 전망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여름에 모피 모자라니. 그런데 이곳에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위구르 사람들도 기념촬영을 하느라 바쁘다. 우리 일행은 정해진 시간에 다시 광장으로 다 모인다. 얼굴을 보니 다들 즐거운 표정이다. 서로 각자 산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차로 향한다. 다음으로 갈 곳은 홍산공원이다.
홍산공원 조망
▲ 홍산공원 ⓒ 이상기
홍산공원은 우루무치 시내 중심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오르면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바자르에서 홍산공원엘 가려면 홍산체육장 앞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한다. 체육장은 우리로 말하면 운동장 또는 경기장이다. 이곳에서 차를 내리니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우리는 길을 건너 홍산공원 동문으로 들어간다. 홍산은 산을 이루는 바위가 붉은색을 띠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꽃밭과 회전관람차가 눈에 들어온다. 꽃밭에는 사슴을 한 쌍 만들어 놨다. 사슴과 우루무치,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가이드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 우리는 공원을 한 바퀴 돌 생각으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가다 보니 대불사라는 절이 나타난다. 입구에 홍살문처럼 기둥을 세우고 한자로 대불사(大佛寺)라고 썼다. 기둥 앞에는 두 마리 사자가 지키고 있다.
▲ 홍산공원 원조루 ⓒ 이상기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으나, 우리 팀원들이 바로 산길을 오른다. 조금 더 가니 두 마리 공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있다. 공작이 참 예쁘다. 조금 더 올라가니 우루무치 시내가 넓게 보이기 시작한다. 경제가 좋아지면서 우루무치 시내에는 고층빌딩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시내를 좀 더 잘 조망하기 위해서는 원조루(遠眺樓)에 오르는 게 좋다.
원조루는 말 그대로 멀리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이다. 기와를 얹은 3층 건물로 중국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에 오르면 우루무치 시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홍산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홍산은 해발이 1391m이다. 그러나 우루무치의 해발 자체가 높기 때문에, 홍산은 뒷동산이나 당산을 오르는 느낌이다.
▲ 홍산공원 9층전탑 ⓒ 이상기
정상에는 임칙서(林則徐: 1785-1850) 석상이 있고, 건너편으로 9층 전탑이 보인다. 탑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상을 조금 내려갔다 계단을 통해 탑 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원래 이 탑의 이름은 진용탑(鎭龍塔)인데 사람들은 그냥 홍산탑이라고 부른다. 진용은 용을 진압했다는 뜻이다. 이 탑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우루무치에 비가 자주 오고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던 강(현재: 和平渠)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수시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강 속에 사는 용의 조화였다. 사람들은 서왕모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서왕모가 용을 두 동강 내 이곳 홍산과 건너편 야마리크산(雅瑪里克山)에 묻었다. 이후 더 이상 비가 와 강이 범람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 홍산공원 아래 저수지의 낚시꾼 ⓒ 이상기
사람들은 이를 기념해 진용탑을 세웠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훼손된 것을 최근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또 하나의 탑은 보산로(寶山路) 인근 야마리크 삼림공원 안에 있다. 홍산탑 앞에 서면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가 보인다. 그 아래 작은 저수지가 있으며, 사람들이 그곳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저수지 옆으로는 우루무치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가장 큰 도로인 하탄로(河灘路)가 지나간다.
임칙서 이야기
임칙서는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데, 아편전쟁(1839-42)을 일으킨 인물로 유명하다. 1830년대 중국에 아편이 유행했고, 조정에서는 이를 퇴치하기 위해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광둥성(廣東省)에 파견했다. 그는 외국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모두 폐기시키고, 다시는 아편을 수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에 영국이 중국에서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광저우시를 공격했고, 아편전쟁이 시작됐다.
▲ 임칙서 석상과 금독동정 ⓒ 이상기
그 결과 영국군이 승리했고, 임칙서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북서쪽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가 간 곳이 신장성 북부의 이리(伊犁)였다. 임칙서는 1842년 8월 시안(西安)을 출발 4개월만인 12월 이리에 도착해, 선정을 베풀고 개혁을 실시했다. 그가 벌인 대표적인 사업이 하천 정비와 수로 개척이다. 이를 통해 우루무치, 투르판, 하미, 쿠차 등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가 녹주(綠洲)로 변해 갔다.
그는 또한 이곳 신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역사와 지리, 풍토와 기후, 경제, 민심 등 신장지방의 각종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845년 임칙서는 산시성과 깐수성을 다스리는 산깐총독(陜甘總督)이 되어 신장을 떠난다. 그렇지만 신장사람들은 임칙서의 선정을 잊지 못해 이곳 홍산공원에 그의 석상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석상 옆에는 아편을 불태워 없앤 금독동정(禁毒銅鼎)이 세워져 있다.
우루무치의 저녁 시간
▲ 임칙서와 좌종당(오른쪽) 동상 ⓒ 이상기
우루무치 지역의 중국화는 건륭제 때인 1755년 청나라 군대가 진주하면서 시작된다. 1763년에는 도시 이름을 적화(迪化)로 바꾸고 성을 쌓았다.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위구르족 등 지방 호족이 왕을 칭했다. 1875년 청나라 조정에서는 좌종당(左宗棠)을 흠차대신에 임명, 신장 토벌에 나선다. 1884년에는 신장성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고, 청나라에 완전히 귀속된다. 1913년 신장성은 중화민국 정부에 속하게 되었으나, 1933년 다시 위구르인들이 중심이 되어 동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을 만들어 독립한다.
신장성이 다시 중국의 세력권에 들어간 것은 1949년이다. 팽덕회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우루무치를 정복했고, 신장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성(省)이 되었다. 1954년 2월1일에는 우루무치가 적화라는 중국식 도시 이름 대신 원래의 옛 이름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지금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소수민족은 한족의 지배에 반대해 꾸준히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독립성은 인정받고 있다.
▲ 2009년의 우루무치 소요 사태 ⓒ
그러나 한족이 이 지역의 경제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소수민족의 불만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그 결과 2009년 7월 소요사태가 발생, 197명이 사망하고 680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도 한족과 이들 소수민족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잠복상태에 있어 더 큰 폭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국 정치의 3T를 대만(Taiwan), 천안문(Tainanmen), 티벳(Tibet)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X(신장: Xinjiang)를 하나 덧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홍산공원을 마지막으로 우루무치 시내관광도 끝났다. 이제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저녁은 오랜만에 한국식당에서 먹기로 되어있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삼겹살이 마련되어 있다. 실크로드 여행을 하면서 양고기만 먹었는데, 삼겹살을 상추쌈에 싼 다음 쌈장을 넣어 맛있게 먹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음식에 문제가 좀 있었다. 식사 때마다 거의 같은 종류의 음식이 나와 다양성이 부족했다.
▲ 우루무치에서 가장 큰 홍산체육장 ⓒ 이상기
저녁을 먹고 나니 8시 밖에 안 되었다. 비행기는 우루무치 공항을 밤 1시에 출발한다. 그러므로 11시까지만 공항에 도착하면 된다. 아직 3시간이나 여유가 있다. 우리는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바자르의 야경을 보러가는 것도 괜찮고, 좋은 공연을 하나 보는 것도 괜찮은데, 그런 일정을 잡기란 쉽지 않다. 가이드의 입장도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는 원칙은 지키되 경우에 따라서는 타협과 조정도 필요하다. 이번 여행이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얻은 게 많았다.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주어진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서남쪽 실크로드를 보는 일만 남았다. 쿠차, 카슈가르, 호탄 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일이다. 나는 조만간 그것이 가능하길 기대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장 민족음악의 세계로 빠져든다.
덧붙이는 글
여행기는 이번 15회로 끝난다. 그렇지만 이번 실크로드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신장지방의 민족음악을 1회 더 연재할 생각이다. 음악은 그 지방의 문화와 정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또 이곳 실크로드 음악이 우리 전통음악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16회는 이삭줍기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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