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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고향 피렌체에서 길을 묻다

촌노인의 유럽기행6

등록|2010.08.28 09:58 수정|2010.08.28 09:58
8월 13일, 금요일 아침.

'쉐라톤 로마'라는 호텔을 출발한 지 몇 분 안 되어 어머니와 동행한 중학교 1학년이라는 소년이 호텔에 운동화를 두고 왔다고 했다. 로마에 도착하던 날에는 공항에서 그 어머니의 가방이 보이지 않아 일행을 긴장케 했는데 (다행히 그 가방은 다음날 호텔에 도착했다) 다시 아들에게 그런 일이 있고 보니 모두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시내를 벗어나기 전이어서 버스는 호텔로 유턴했고 소년의 운동화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였다.

피렌체에 가는 길의 이색적인 풍경은 고속도로 주변의 해바라기밭도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눈길을 잡은 것은 거의 모든 마을이 평지에 있지 않고 산비탈에 혹은 정상에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이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슬로시티라는 새로운 용어가 많이 알려진 것으로 안다. 그리고 전남의 몇 지역도 국제적인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광고되는 것도 보았다. 슬로시티의 원조가 되는 '오르비에또'라는 마을도 피렌체로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 있었다.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절벽 위의 요새 같은 마을이었다.

사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슬로시티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는 모습도 슬로시티와 관련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먼 나라에서 슬로시티를 새롭게 듣고 있었다.

"슬로시티는 슬로푸드 운동과 관련이 있다. 급속한 변화 속에서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의 여유와 행복을 찾자는 운동이었다. 자연을 보존하고 지역에서 나는 유기농 음식을 먹으며 조금은 느리게 살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가이드의 말이 평소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또 우리나라에서 흔히 들었던 신토불이 정신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때문에 슬로시티는 내 기억에 남았고 귀국하면 본격적으로 찾아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귀국하여 인터넷에 소개된 슬로시티의 개념과 내용을 보면서 오래전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종교단체와  또 뜻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는데 유럽에서 먼저 국제화시킨 것만 같아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그럴 형편이 못 된다면 좀 더 자연과 친숙해지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라는 생각도 들어 반갑기도 했다.

아무튼 피렌체를 가는 길에 슬로시티를 좀더 가깝게 보게 된 것은 나에게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슬로시티라는 외래적인 명칭이 조금은 거부감이 있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정신만은 넓혀나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현재 우리를 위해서 또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이었다. 다른 도시와 달리 관광버스는 피렌체로 바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체크포인트라는 사무실에 들려 약 300유로의 통행세를 낸다는 설명이었다. 그렇게 모여진 돈은 시의 환경정리에 쓰인다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단테의 생가위대한 인물을기리는 그들의 태도에서 배워야할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 홍광석



피렌체는 중세의 거리에 사연도 많은 도시였다. 현재의 이탈리아 언어는 과거 피렌체 언어였고 피렌체 언어는 단테의 <신곡>(원래는 희곡이었다)에 의해 정립되었다니 듣는 대로라면 단테는 현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인 셈이다.

젊은날 아는 듯 모르는 듯 신곡을 읽었으나 기억에 남는 것은 단테의 첫사랑이면서 천국의 길을 안내해준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의 이름뿐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는 불로냐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지만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무덤은 라벤나에 있는데 무덤까지 옮겨오려는 피렌체와 다툼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실재로 피렌체는 성십자가 성당에 단테의 가무덤까지 만들어 두고 있는 상태다.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 아내가 무슨 기원을 담아 촛불을 밝히는지 모르지 않기에 가만히 한 컷 담았다. ⓒ 홍광석



다비드상 미켈란제의 작품인데 진품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조품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 홍광석



시뇨리오 광장의 회랑 시민들의 세미나와 포럼이 열렸던 곳이라고 했다. 서구 민주주의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 홍광석



베키오궁 중세의 건물이 시청으로 활용되는 모습에서 전통을 지키는피렌체 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 홍광석




비는 오르락내리락. 가이드가 끌고 간 곳은 지금은 시청으로 사용하는 베키오 궁전 앞의 시뇨리오 광장이었다. 도시의 광장 대부분이 그렇듯 시뇨리오 광장도 정치, 사회의 중심지였다. 시뇨리오 광장에서 대중적인 포럼이 이루어졌다면 광장 한 쪽에 있는 로지아 회랑은 세미나의 장소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대중적인 포럼과 세미나는 통해 주민의 의견을 수렴했다니 오늘날 유럽의 민주정치가 앞섰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로지아 회랑의 맞은편의 포세이돈 분수 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복제품이라고 하였음)을 비롯한 수많은 조각품이 있었으나 하나하나 자세히 감상하기에 시간이 너무 짧았다. 100년 이상 걸려 지었다는 피렌체의 수호성당인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에서 아내는 기원을 담은 촛불을 밝혔다. 누구를 위한 기원인지 모르지 않기에 가만히 사진만 한 컷 담고 밖으로 나왔다. 가죽제품이 유명하다는 면세품 상점을 들렸으나 우리는 미로 같은 내부를 돌며 눈요기만 했다.

미켈란젤로 광장의 꽃밭 위대한 인물을 기념하는 피렌체 시민의 노력은 그대로 관광상품이 되어 세계 각지의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 홍광석



미켈란젤로광장으로 이동하니 비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중세의 한 때 피렌체를 장악하고 두 명의 프랑스 왕을 사위로 삼았다는 메치니가문에서 만들었다는 아르노강에 걸린2층의 베키오(?)다리와 오른쪽으로 펼쳐진 피렌체 시가지 풍경은 영화 속 중세의 모습 그대로였다.

모든 지붕이 벽돌색으로 통일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아직도 단테가 걸어 나올 것 같은 도시, 중세의 기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도시의 전경이 부러웠다.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피렌체 시가지 일부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 본 피렌체 시가지의 모습. 벽돌색 지붕으로 통일된 것이 인상적이다. ⓒ 홍광석



최근에 우리나라의 하회마을과 양동 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축하할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유산은 하회와 양동뿐일까? 비록 외침과 식민지 시절의 약탈, 또 전쟁의 참화에서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남은 것은 또 있을 것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와 전통을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쓸어버린 것은 아닌지, 지금도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부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또 꼭 세계 문화유산과 관계없이 소박한 우리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우리가 꼬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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