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종이호랑이 청(淸), 조선서도 쉽지 않네!

[중국근현대사 속 오늘]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

등록|2010.08.30 18:49 수정|2010.08.30 18:49

흥선대원군과 위안스카이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4년간 중국 톈진과 바오딩 등지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 인터넷 百度


1882년 8월 30일, 임오군란 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 체결되었다. 임오군란은 표면상으로는 신식군대 별기군과 구식군대의 분쟁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개화파와 척화파를 등에 업은 민비와 흥선대원군의 세력 싸움이 숨어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일본과 청나라의 음모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이다.

일본군관을 초빙하여 새로운 군대를 양성하겠다던 별기군에 대해 척화파는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던 차에 사건이 발생하자 바로 청에 원군을 요청하여 일본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1, 2차 아편전쟁에서 완패한 청(淸)은 제 한몸 챙기기 바쁜 처지로 전락하여 조공국을 보호하던 기존의 전략을 버리고 서양열강처럼 힘의 논리를 앞세워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전략으로 전환하려 했다.

청나라는 마지엔중(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과 광둥(廣東)성 해군제독 우창칭(吳長慶)이 해군을 이끌고 각각 조선에 진군해 군란을 진압했다.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해 한 발 뒤로 물러선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사상자 십여명이 발생한 것을 핑계로 조선에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제물포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의 내용을 보면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50만 원에 달하는 배상금 지급과 사죄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에 또 부산, 원산, 인천항의 추가 개방과 일본인 공사, 영사의 자유로운 여행을 요구했다.

임오군란으로 다소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일본이 제물포조약 체결로 전화위복, 향후 조선의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포섭할 수 있는 조건과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청나라는 군란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하고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흥선대원군은 이홍장의 심문을 받은 후 바오딩(保定)으로 옮겨져 4년간 중국에서 불우한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또한 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경제적 침투를 본격화하며 외교·통상 사무를 관장하는 통리아문을 설치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23살의 나이에 임오군란 진압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1884년에는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가 되어 조선의 내정은 물론 외교까지 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 독일 등의 서구 열강은 청의 조선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청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확보하였다. 결국 국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과 지위를 누리며 조선을 중국의 지배권 아래 두고 장기적으로 식민지화하려던 위안스카이의 계획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1884년 일어나는 갑신정변이 일본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일본식 근대화를 추구했던 것에서도 증명되듯이 조선에 파견된 이홍장, 위안스카이 등 청나라 대신들은 교육 등 조선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으면서도 고자세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만을 일삼아 조선의 지식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자국에서 발생한 임오군란 사건 처리에 외세의 개입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조하게 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더 많은 이권이 열강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악순환의 구조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악순환의 길 끝에는 '식민지배'라는 참담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후 조선은 동학농민혁명 진압과정에서, 청은 의화단의 난 진압과정에서 또 외세가 개입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결국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아픈 역사의 터널을 힘겹게 빠져 나와야 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