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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등록|2010.09.01 19:59 수정|2010.09.01 19:59

▲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 김영사 ⓒ 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내 독서경험을 총동원했을 때, 이 책처럼 <뭐시기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제목이 붙은 책의 품질은 둘 중 하나다. 책의 종이가 되어준 나무에게 미안할 정도로 내용이 개판이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훌륭하거나. 전자의 경우 대개 어떤 식이냐면 "뭐시기란 무엇인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정답은 없다. 결론은 독자에게 맡긴다.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니까. 암튼 굿바이" 요런 식이다. 결론이랍시고 글쓴이 본인도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대책없이 찍찍 갈겨놓고 독자의 머릿속만 헤집어놓은 채 나 몰라라 발뺌하는 먹튀 스타일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처럼 굉장히 훌륭한 책이 가끔 있다. 사실 <~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은 그 주제에 대해 웬만한 내공이 없으면 함부로 내걸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걸 다 설명해야 하거 때문이다. 반박도 물리칠 정도가 되어야 <~란 무엇인가>라는 완전무결한 총체적인 제목에 부끄럼없이 어울리는 걸작이 탄생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후자에 속한다. 때문에 이 책이 현재 인문서적으로 드물게 30만부 이상 팔리고 베스트셀러로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출판되는 서적 중 30%는 제대로 읽히는 게 아니라 책꽂이 장식용, 뽐내기용로 팔린다고 한다. 이 책의 표지와 제목부터 폼나지 않나. 이래저래 베스트셀러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제목 그대로 정의란 무엇인지 심도있게 고민한다. 저자는 마치 최고의 정의 원칙을 선발하는 콘테스트를 개최하고 무대 위에 후보를 차례로 소개하는 식으로 철학적인 정의 담론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샌델이 마련한 정의 콘테스트(Justice Contest)에 구경꾼으로라도 부담없이 참관하다보면, 심사위원 샌델의 친절한 설명을 통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정의와 친숙해진 두뇌의 말랑말랑함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조금 어렵더라도 잘 참고 따라오면 큰 결실이 있으리라. 드디어 마이클 샌델의 정의(Justice) 선발대회의 막이 올랐다. 우리도 서둘러 첫 발을 내디뎌보자.

1980년부터 30년간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샌델의 정의(Justice)수업은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선정되었다. 비결이 뭘까. 일단 쉽다는 거 아닐까. 물론 주제 자체가 갖는 어느 정도의 심오함과 난해함은 최소한의 인내심과 끈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당신도 정의를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보면, 읽는 내내 머리를 싸매고 진땀을 흘리며 입으로는 연신 나도 모르게 "어렵다"를 말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쉽게 잘 썼다"는 감탄을 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기호 1번] 임마누엘 칸트 "중요한 것은 동기다"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다른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어야 한다. 왜?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독보적으로 '이성'이라는 것을 갖고 있으니까. 이러한 칸트의 인간관에 의하면, 사람 등처먹고 이용해먹는 놈들이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그리고 심지어 아무리 좋게 보이는 목적을 위해서라도 인간 자체가 부차적인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가령 선의의 거짓말도 용납될 수 없다. 거짓말에 상처받을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한다지만, 그 사람의 심적 안정이라는 외부적 목표를 위해 상대방 인간 자체를 부차적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는 자유라는 개념을 새롭게 조명한다. 우린 평소에 자장면과 짬뽕 중 뭘 먹을지 맘대로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는데, 칸트가 말한 자유는 그것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다. 메뉴판이라는 옵션은 내가 스스로 부여한 원칙이 아니라 중국집 사장이라는 외부로부터 나에게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식당에서 뭐 먹을지 맘대로 고르는 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 즉, 선택이라는 게임이 있을 때 여러 선택지들 중 하나를 고르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애초에 선택지를 포함한 그 게임판 전체를 통째로 스스로 설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에 '자율'을 더하면 칸트식 자유에 가까워진다.

지금까지 설명한 칸트의 인간관과 칸트의 자유개념을 종합해보면, 칸트의 도덕이 나온다. 칸트는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 결과보다 동기에 주목한다. 얼굴에 철판 깔고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가고 있는데 앞에 서 계신 할머니의 "내 관절이 어쩌고, 요즘 젊은놈들 싸가지가 저쩌고" 하는 불평이 듣기 싫어서 자리를 양보해드렸다면, 칸트가 보기에 그것은 도덕적 행동이 될 수 없다. 결과가 좋더라도 그 동기가 불순했으니까. 자리양보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던 게 아니라, 할머니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외부적 목표를 위해 수단으로 동원된 행위였을 뿐이다. 수단이 아닌 목적을 추구하라는 칸트식 자유를 생각해봤을 때도, 도덕적이지 못할 뿐더러 결코 자유롭지 못한 행동이기도 하다.

▲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왜 정의로울까? ⓒ www.beawesomeinstead.com


칸트는 '끌림 동기'보다는 '의무 동기'에 따라 도덕법칙을 세우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참 간사해서, 법칙 하나 지켜보라고 던져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뒷구멍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칸트식 자유를 추구하는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야 할 의무감이 든다! 노약자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게 나의 도덕법칙이다! 그러므로 서서 가는 노인네들은 골골대지 말고 파스나 붙여라"라고 지껄이는 잡놈이 있다고 치자. 이같은 이의 출현을 방지하는 것이 바로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가언명령이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게 있는 법'처럼 반드시 어떤 조건이 있어야 그 보답의 형식으로 행동하는 법칙이라면,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인' 행동강령이다. 칸트의 그 정언명령 중 첫 번째가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너의 도덕법칙이 곧 이 세상 모두 지켜야 하는 보편원리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버스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게 나의 도덕법칙이라고? 세상 모두 똑같이 노약자석에서 철판을 깐다고 생각해보자. 결국 그 잘못된 도덕원칙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정의론은 집단의 전통이나 사람마다의 자격과 같은 특수한 조건을 이야기하지 않고,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를 극대화하면서 '자유'를 중시했다. 칸트의 정의론은 다양한 상황마다 그때그때 이래라 저래라 일일이 지시하는 게 아니다. 존엄한 인간, 진정한 자유, 의무 동기, 무조건적인 정언명령과 같은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최소한의 틀만 제시했을 뿐, 그 큰 틀을 수학공식처럼 세상만사에 적용하는 것이다.

[기호 2번] 존 롤스 "평등을 고민해야"

존 롤스는 '평등'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진짜 평등이라는 게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같은 백수오타쿠도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사실이다. 겨우 두 사람 사이에서도 빵 한 조각 나누면서 "부스러기 흘리지 마라", "니 빵에 크림이 더 많다" 하는 식으로 불평등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하물며 이 세상엔 60억 인구가 훨씬 더 복잡하게 살아가는데 과연 진짜 평등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거다. 롤스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 평등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겠어. 그렇다면 그 다양한 불평등 중에 우린 과연 어떤 불평등을 선택하는 게 최선인지를 고민하자"라는 것이 롤스 정의론의 시발점이다. 이 롤스의 정의론에는 두 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하나씩 알아보자.

롤스 정의론의 첫 번째 원칙인 차등원칙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차등을 인정하되, 그 차등이 기존 불평등의 차이를 메워줄 때만 허용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의학적 재능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의사가 있다면, 그 의사가 경제적으로 열악한 소외지역에 의료봉사를 충분히 수행할 때에만 그 사회에서 의사가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 그렇게 사회는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소득과 기회의 분배는 임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을 뽑는데 1차 서류전형에서 동일한 점수의 지원자들을 2차 면접에서 얼굴로 줄 세우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일까? 외모라는 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원인처럼) 우연에 의한 것이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닌 것처럼 임의적이기 때문에 분배(합격)의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소득과 기회의 분배는 임의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해선 안 된다"는 롤스 정의론의 두 번째 원칙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평가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엄마 뱃속에서 응애하고 눈떠보니 누구는 아버지가 재벌일 수도 있는 거고, 반대로 누구는 아버지가 무능한 주정뱅이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비자발적인 불평등에 놓이게 된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평등이 불가능한 세상일지라도, 우리가 끊임없이 평등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더 나아가 롤스는 심지어 개개인의 재능도 모두 다 임의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일단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개개인의 능력이 전부 동등할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 세상을 호령하는 여성 CEO라 한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하루종일 골방에 들어앉아 바느질이나 해야 하는 것처럼 재능은 시대를 타고 나는 운, 즉 임의적이다. 그래서 롤스는 '기회의 균등'이나 '능력위주'라는 원칙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개개인의 재능이 서로 다르다면, 그 불평등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 육상트랙이라는 인생이 있고, 서로 저마다 다른 달리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 출발선에 서 있다. 롤스의 정의론은 그중 빨리 달리는 사람의 다리를 분지르자는 발상이 아니다. 롤스는 출발선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가난한 자에게 더 많이 챙겨주듯이, 가진 것이 서로 다른 저마다에게 적합하도록 출발선의 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그 결과의 성취물을 사회 전체에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롤스는 사람들 간의 계약(합의)로 만들어진 이 사회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조건으로서 원초적인 상황을 하나 제시한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완전한 백지상태로 돌아가자. 사회의 원칙을 정하려고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들이 만들어낼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는 건 기본이고 막상 그 사회가 만들어지면 그 속에서 자신이 부자가 될지 거지가 될지, 왕이 될지 노예가 될지, 심지어는 지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모른다. 이러한 원초적인 복불복을 앞둔 사람들이 계약(합의)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원칙을 정한다면 과연 그 원칙은 어떨까 하고 롤스는 묻는 것이다. 롤스에 의하면, 결국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 "못 먹어도 고" 하는 식으로 하지 않고, 평등한 원칙으로 무난하게 중간을 택한다. 이 만약의 상황을 통해 롤스는 또 다른 두 가지의 정의원칙을 도출해낸다. 첫째, 기본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 둘째, 부족한 자에게 우선 이익이 배분되어야 한다. 롤스는 언제나 이 두 가지 원칙을 통해 정의를 고민하라고 말한다.

롤스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 그리고 저마다 서로 특수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사건마다 일일이 찾아가서 훈계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의의 원칙, 평등한 자유와 같은 최소한의 이론적 틀만 제시해서 이를 수학공식처럼 모든 사회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에서 역시 칸트의 이론과 맥을 같이한다.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 이론은, 남다른 무언가를 갖춘 개개인에게 특별하게 포상하는 '개별적인 자격론'이 아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중립적인 공정한 권리라는 큰 틀만 일단 보장하면 만사 OK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호 3번] 아리스토텔레스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텔로스(Telos: 목적, 목표, 본질)라는 걸 이야기했다. 세상 모든 것들에겐 저마다의 텔로스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 텔로스를 충족시키는 것이 곧 정의가 된다. 가령 책이라는 것의 텔로스가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책이 똑똑한 학자에게 읽히지 못하고 라면 냄비받침으로 사용되는 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 된다. 그런데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철학은 다분히 위험한 이론이다. 만약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면 당신이 사랑받는 게 정의롭겠지만, 강인은 구속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네이트 '베플'이 유행처럼 번져서 대다수가 동의한다면 한 사람 인생 조지는 게 한순간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느날 서울시장이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서울시민의 텔로스다"라고 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서울시민들은 전부 다 텔로스 위반죄로 콩밥을 먹게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노예제를 옹호하면서 "노예로 태어난 인간들은 노예처럼 몸으로 때우는 것이 텔로스다. 그러므로 노예는 노예처럼 살아야돼. 그게 정의로운 거야"라고 주장했다.

같은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텔로스가 시민의 미덕을 기르는 좋은 삶을 위한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인간답지 못한 인간으로 규정지었다. 이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텔로스? 그래, 일단 그런 게 있다고 치자. 아리스토텔레스 당신 말에 의하면 정치의 텔로스가 좋은 인간을 만드는 거라서, 정치에 관심없는 내가 좋은 인간이 아니라고? 근데 그 텔로스라는 건 누가 정하는 건데? 누구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야?"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에 입각한 정의론은 주관적이다. 텔로스를 누가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사회마다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중립적일 수 없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누가 어떤 자격(텔로스 충족능력)을 가졌는가"를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결국 "정의란 중립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두 자유주의자(칸트, 롤스)의 철학은 100% 중립을 요구한다. 칸트와 롤스에 의하면, 언제 어디서든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인간의 (자유) 권리가 있고, 정의는 그 원칙만으로 충분하며 그 이외에 주관적인 개입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글쎄, 과연 정의라는 건 정말 100% 중립적일 수 있는 것일까? 100% 중립으로 정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마지막 후보 마이클 샌델은 이 물음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원칙은 받아들이지만,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p.362)"라고 말한다. 여기서 샌델이 말한 가치 측정이라는 것은, 결국 주관적인 누군가가 할 수밖에 없다. 즉, 샌델은 정의는 중립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샌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호 4번] 마이클 샌델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지닌다"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정의를 위해 인간이 갖는 의무는 크게 두 개다. 인간이기에 생기는 자연적 의무와 합의에서 생기는 자발적 의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마땅히 살인을 금하는 것처럼 합의 없이도 생기는 인륜적인 의무가 자연적 의무라면, 여러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한 규칙에 의해 기브 앤 테이크 방식의 합의에서 생겨나는 약속이행의 의무가 자발적 의무다. 자유주의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원칙적인 의무 이외에 주관적인 의무가 개입한다면 그 상황은 정의로울 수 없다. 진짜? 여기 '골 때리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일본은 한국에 역사적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가? "조상이 잘못한 거지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다. 자유로운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의무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우리가 주는 99엔만 받고 이젠 조용히 살아라"라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의 논리는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 이론에 의하면 반박의 여지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우린 저 말이 개소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100% 중립적인 자유주의 원칙으로 혼내주기는 힘들지만, 주관적인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두들겨패주고 싶은 원초적 욕망이 샘솟는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인간의 본능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적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자유주의 이론은 반드시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샌델은 위의 자유주의 두 의무(자연적 의무, 자발적 의무)에 새로운 의무 하나를 덧붙인다.

그것이 바로 '연대 의무'다. 인간은 분명 그 자체로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인간은 탄생 순간부터 특정한 공동체에 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자신에게 준수하길 기대하는 전통이나 정체성을 충족해야 할 의무가 있다. 태어난 순간부터 불가피하게 공동체의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자유 운운하며 공동체에 대한 일말의 책임마저 회피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체주의'다. 이 공동체주의에 의하면 오늘날 일본 전범세대의 후손들은 비록 자발적인 책임은 없지만, 자신들이 혜택을 받으며 속해 있는 공동체 자체가 애초에 그들의 선조들의 역사로부터 서사적인 연관성을 이어내려왔기 때문에 선조들의 역사적 과오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정의로운 일이 된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정의의 100% 중립성을 거부하고 제3의 원칙으로 연대의 의무를 제시하는 마이클 샌델. 그는 기존의 자유주의에서 공동체주의로 발전하면서 새롭게 나타날 정의사회의 모습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로 시민의식과 희생, 그리고 봉사정신이다. 자유주의의 주장처럼 100% 중립적인 원칙에 의해 100% 자유로운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소속 공동체로부터 시민정신에서 우러나오는 희생과 봉사정신이 필요하다. 둘째, 시장의 도덕적 한계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본주의)는 시장을 맹신한다. 그 부작용으로 시장경제논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공, 전통의 영역까지 시장경제 방식으로 변질되어 폐해가 심하다. 시장경제의 한계를 인식할 때가 되었다. 셋째,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연대를 실천하는 시민의 미덕이다. 파편화된 인간들은 정글법칙에 의해 불평등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정의는 짓밟힌다. 그 결과는 결국 공동체의 훼손이다. 즉 정의 실현은 공동선 추구와 연결되고 그 시작은 시민의 미덕을 갖춘 구성원의 연대여야 한다. 넷째,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다. 기존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완전한 중립은 불가능할뿐더러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정부도 자유주의적 중립에 대한 알레르기적 결벽증을 벗어나 뒷짐진 채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도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갈등 속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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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교수 ⓒ 김영사

이렇게 놀라운 책을 만난 것도 참 오랜만이다. 정말 이처럼 그 내용의 수월함과 전달의 흡인력을 동시에 갖춘 훌륭한 인문서적을 근래 몇 년간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찬사가 허풍에 찬 립서비스가 결코 아니다. 총 10강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강부터 8강까지 중립적인 서술을 뒷짐지고 담담하게 이어나가다가 마지막 9강, 10강에서 저자 자신의 이론을 내세워 순식간에 독자 앞으로 치고 나온다. 정의를 탐구하는 책으로서 주제를 다루는 내용 자체도 좋았지만, 후반부에 막판 피치를 올리는 문학적인 구조성도 곁들여 자기이론의 설득력까지 획득한 책이다. 또한 까다로운 철학적 내용을 최대한 부담없이 전달하려는 저자의 고민이 책 전반에 녹아 있다.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일단 글은 무조건 쉽게 써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갖고 있는 내게 그래서 더더욱 인상깊은 책이기도 했다. 한 권의 인문서적으로서 우선 덕목인 이론의 탁월함과 더불어 그 내용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으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앞에 바쳐지는 수많은 찬사와 미사여구의 마지막은 반드시 "강력 추천"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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