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에 거의 보름가량 숙지원을 비웠더니 예상대로 풀은 내 키를 웃돌았다. 예초기를 지고 급한 대로 길은 트고 잔디 깎기를 시작했으나 절반도 마치기 전에 일손을 놓아야 했다.
사람들과 대면 접촉을 피하려 해도 찾아오는 손님까지 박대할 수는 없고, 최소한 직장의 행사도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이모님과 사촌 동생 내외가 다녀가고 정년퇴임하는 선배들을 위한 식사 모임이 있던 날은 날씨가 좋았지만 숙지원을 핑계로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후 날씨는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도 이틀간이나 비가 내렸다. 비옷을 입을 만큼 절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마음 캥켰으나 날씨를 탓하며 빈둥거릴 수밖에.
지난 일요일 잠시 갠 틈을 타서 숙지원에 들려 옥수수를 수확하고 옥수수대를 눕혔다. 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옥수수는 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옥수수대를 베어 눕히는 일은 한 계절을 접는 일이다.
귀엽게 생긴 수 백 개의 분신을 남기고 사라지는 옥수수의 시원한 모습은 내년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남겨진 옥수수를 무심코 세다가 텃밭을 보니 옥수수의 빈자리가 허전했다.
이곳저곳을 다시 보니 이제 거두어야 할 것들이 많다. 어른 주먹만큼 자란 수박은 기대할 것 없고 우리가 없는 새 가물었던 참외밭은 줄기가 마르고 남은 잎도 벌레가 먹어 얼멍얼멍했다. 금년 여름 참외와 오이로 인해 과일의 허기를 면했는데 관리 부실로 일찍 버린 것 같아 아쉽다.
그런데 참외가 보였다. 마른 잎 속에서 노랗게 익은 참외를 찾아냈을 때의 반가움이라니!
그렇게 마지막 남은 참외를 차마 따기 아까워 이틀이나 그냥 두었다. 그리고 마침 오늘(9월1일),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참외를 줄기에서 떼어냈다. 세상에 고맙지 않은 농산물이 있으랴만 금년 여름 참외는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었다.
물 젖은 접시에서 씨앗을 틔우고 상토를 담은 포트에 담아 키운 후에 비닐하우스 구석에 밭을 만들어 옮기면서도 몇 년 전의 실패를 떠올리며 기대하지 않았다. 참외는 손자의 줄기에서 열린다는 말에 처음에는 순치기를 했으나 줄기가 무성해지면서 그 일도 포기해버렸다.
그러나 종자가 좋았던 것인지, 옆의 수박에 신경을 더 쓰는 주인에게 시위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참외는 수박을 앞질러 정말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웃거름(화학비료)을 주지 않은 수박이 성장을 멈추었음에도 참외는 버럭버럭 악을 쓰듯 열렸다. 금년 여름에 가장 많이 먹은 과일이 단연코 참외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20여개의 굵고 실한 그러면서 맛있는 참외를 딸 수 있었다.
제 몸이 야위어 가면서도 열매를 키운 참외를 보는 것은 경이였다. 자기의 분신을 남기고자하는 생명체의 본능을 식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끝물 참외 꼭지를 자른 것이다.
이제 금년에는 숙지원의 참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참외를 먹었던 기억도 희미해질 것이다. 콩을 털고 토란, 고구마, 야콘을 캐다보면 가을은 더 짧고 바쁠 것이다.
낳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죽는 것이 옥수수나 참외뿐이랴만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그런 것들이 한 번 더 보이는 까닭은 단순히 계절의 정서 때문이 아니다.
왜 강에다 생명을 죽이는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는 것인가?
물을 가둔다고 해도 흐르는 물을 다 가둘 수 있을 것인가?
갈수기와 우수기의 하상계수가 큰 우리나라 기후로서는 소하천의 정비 없이 시멘트 보를 만들어 가두는 것은 물을 푹 썩히겠다는 짓일 뿐이다. 거기에 유람선이라도 띄우는 날이면 하류에 위치한 도시에서는 식수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생태계를 복원한다는 마당에 둔치에 시멘트를 발라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개발 초기의 후진국형 사고 아니고 무엇인가?
정권은 유한하고 독재 권력은 허망하게 끝나는 법이다. 사람이라면 열매를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옥수수와 참외의 일생을 보고 새길 일이다. 대통령도, 대통령의 형님라고 한들 가는 세월마저 자신들의 보에 가둘 수 있을 것인가?
숙지원을 돌아본다. 깎다가 미룬 잔디밭, 나무주변에 자란 풀 때문에 조금은 어수선하다.
그러나 어수선한 것이 숙지원 뿐이랴? 이 나라의 가을이 염려스럽다.
사람들과 대면 접촉을 피하려 해도 찾아오는 손님까지 박대할 수는 없고, 최소한 직장의 행사도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이모님과 사촌 동생 내외가 다녀가고 정년퇴임하는 선배들을 위한 식사 모임이 있던 날은 날씨가 좋았지만 숙지원을 핑계로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후 날씨는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도 이틀간이나 비가 내렸다. 비옷을 입을 만큼 절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마음 캥켰으나 날씨를 탓하며 빈둥거릴 수밖에.
지난 일요일 잠시 갠 틈을 타서 숙지원에 들려 옥수수를 수확하고 옥수수대를 눕혔다. 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옥수수는 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옥수수대를 베어 눕히는 일은 한 계절을 접는 일이다.
▲ 눕힌 옥수수대 열매를 덜어내고 땅에 누운 옥수수대. 우리네 인생이 가는 길도 그러하리라. ⓒ 홍광석
귀엽게 생긴 수 백 개의 분신을 남기고 사라지는 옥수수의 시원한 모습은 내년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남겨진 옥수수를 무심코 세다가 텃밭을 보니 옥수수의 빈자리가 허전했다.
이곳저곳을 다시 보니 이제 거두어야 할 것들이 많다. 어른 주먹만큼 자란 수박은 기대할 것 없고 우리가 없는 새 가물었던 참외밭은 줄기가 마르고 남은 잎도 벌레가 먹어 얼멍얼멍했다. 금년 여름 참외와 오이로 인해 과일의 허기를 면했는데 관리 부실로 일찍 버린 것 같아 아쉽다.
그런데 참외가 보였다. 마른 잎 속에서 노랗게 익은 참외를 찾아냈을 때의 반가움이라니!
그렇게 마지막 남은 참외를 차마 따기 아까워 이틀이나 그냥 두었다. 그리고 마침 오늘(9월1일),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참외를 줄기에서 떼어냈다. 세상에 고맙지 않은 농산물이 있으랴만 금년 여름 참외는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었다.
▲ 참외 벌레 먹은 잎 속에 숨어있던 참외. 끝물임에도 두 손으로 감쌀만큼 컸다. 이제 더 볼 수 없다니 서운하다. 내년을 기다린 다는 것. 그래서 내년은 희망인지 모른다. ⓒ 홍광석
물 젖은 접시에서 씨앗을 틔우고 상토를 담은 포트에 담아 키운 후에 비닐하우스 구석에 밭을 만들어 옮기면서도 몇 년 전의 실패를 떠올리며 기대하지 않았다. 참외는 손자의 줄기에서 열린다는 말에 처음에는 순치기를 했으나 줄기가 무성해지면서 그 일도 포기해버렸다.
그러나 종자가 좋았던 것인지, 옆의 수박에 신경을 더 쓰는 주인에게 시위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참외는 수박을 앞질러 정말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다. 웃거름(화학비료)을 주지 않은 수박이 성장을 멈추었음에도 참외는 버럭버럭 악을 쓰듯 열렸다. 금년 여름에 가장 많이 먹은 과일이 단연코 참외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20여개의 굵고 실한 그러면서 맛있는 참외를 딸 수 있었다.
제 몸이 야위어 가면서도 열매를 키운 참외를 보는 것은 경이였다. 자기의 분신을 남기고자하는 생명체의 본능을 식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끝물 참외 꼭지를 자른 것이다.
▲ 토란 잎토란 잎이 무성하다. 몇 사람이 숨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여름은 이제 고비를 넘기고 있다. ⓒ 홍광석
이제 금년에는 숙지원의 참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참외를 먹었던 기억도 희미해질 것이다. 콩을 털고 토란, 고구마, 야콘을 캐다보면 가을은 더 짧고 바쁠 것이다.
낳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죽는 것이 옥수수나 참외뿐이랴만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그런 것들이 한 번 더 보이는 까닭은 단순히 계절의 정서 때문이 아니다.
왜 강에다 생명을 죽이는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는 것인가?
물을 가둔다고 해도 흐르는 물을 다 가둘 수 있을 것인가?
갈수기와 우수기의 하상계수가 큰 우리나라 기후로서는 소하천의 정비 없이 시멘트 보를 만들어 가두는 것은 물을 푹 썩히겠다는 짓일 뿐이다. 거기에 유람선이라도 띄우는 날이면 하류에 위치한 도시에서는 식수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생태계를 복원한다는 마당에 둔치에 시멘트를 발라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개발 초기의 후진국형 사고 아니고 무엇인가?
▲ 수확한옥수수아마 200개는 더 수확했을 것이다. 덕분에 요즘 나의 간식은 옥수수다. 딱 손에 들어오는 크기, 맛은 어떠냐고? 모른다. 한 번 먹어본 다른 사람들은 자꾸 손을 내민다. ⓒ 홍광석
정권은 유한하고 독재 권력은 허망하게 끝나는 법이다. 사람이라면 열매를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옥수수와 참외의 일생을 보고 새길 일이다. 대통령도, 대통령의 형님라고 한들 가는 세월마저 자신들의 보에 가둘 수 있을 것인가?
숙지원을 돌아본다. 깎다가 미룬 잔디밭, 나무주변에 자란 풀 때문에 조금은 어수선하다.
그러나 어수선한 것이 숙지원 뿐이랴? 이 나라의 가을이 염려스럽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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