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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하고 평온하고, 한번쯤 이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뒤늦은 여름휴가 이야기] 지리산 피아골에서 보낸 여름휴가 (첫째날)

등록|2010.09.03 14:12 수정|2010.09.03 14:12

운조루 앞 벤치멀리 산능선이 보이고 들판을 가로질러 섬진강이 흐르는 풍경을 바라 볼수 있는 운조루 앞 벤치 ⓒ 김선호


(참 부지런 하기도 하지, 지난 8월 7일, 8일, 9일에 거쳐 다녀온 지리산에서의 휴가 일정을 이제야 정리하게 되었다)

세상은 온통 찜통 속이었고 지리산 구비구비 계곡길에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다. 어찌들 알고 찾아들 오셨는지 (우리를 포함)  지리산 길고도 넓은 계곡을 차지하고 계시는 저 분들 다 모아 놓으면 볼 만 하겠다 싶은 풍경이 이어진다.

애초에 계획해 놓았던 뱀사골 야영장이 만원이다. 근처에 숱한 야영장들도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할수 없이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지리산을 돌아 돌아 피아골에 여정을 풀었다. 

멋드러지게 텐트를 설치하고 싶었으나 새로 장만한 것이라 손에 익지 않았고 때 마침 비가 쏟아져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그날도 시도때도 없이 비가 쏟아지곤 했는데 한번 쏟아졌다 하면 우박만한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려 꽂히고는 한다. 그래도 대충이나마 텐트를 쳐 두고 안에 들어가 빗줄기를 감상(?) 하며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부린다.

야영장 바로 앞에 계곡이 흐른다. 지리산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지만 너른 계곡을 춤 추듯 흘러가는 물빛이 맑고 깨끗하기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말 그대로 옥류(玉流)다.
저 물속에 손을 담그면 내 손이 옥빛으로 물들 것만 같은 물빛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앞뒤 사방으로 산능선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계곡물이 시원스럽게 흘러내리는 지리산 속, 피아골에서 이틀을 보냈다.

예고 없이 쏟아진 비는 이내 그쳤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구례읍내로 나갔다. 조그만 소읍, 식당을 찾으니 행색으로 봐서 여행객이라 그곳 사람들이 친절하게 맛있는 집을 서너 군데 추천해 준다. 생선을 좋아하므로 만장일치로 갈치조림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재료 그대로의 맛이 살아있는 생선조림과 반찬들이 맛깔스러웠다. 밥도 맛있게 먹고 느긋한 여행자의 마음이 되어 구례읍장을 한바퀴 돌아보며 저녁에 먹을 쌈배추들을 사고 깜빡 잊고 온 모기향과 화려한 빛깔로 눈길을 사로잡는 자두를 한바구니 사들고는 운조루로 출발.

참, 구례 사람들 진짜 친절하다.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정말 오랜만이라 감격에 겹기까지 했다. 감격까지야, 하지 마시라. 세상은 감격을 경험하기에 너무 메말라 있음을 여행을 하다보면 더욱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운조루산과 꽃과 집, 운조루 주변에 핀 목백일홍이 곱다. ⓒ 김선호


운조루는 조선시대의 대갓집으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한옥이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입장료를 받는데 그 집을 실제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 할머니가 일을 하다가 방문객이 오면 손을 씻고는 입장료를 받고는 하신다. 마침 비가 오락가락 하니 고추를 말리는 할머니 손길이 무척이나 바쁘다. 언젠가 티비에서 뵌 할머니는 실제로 보니  화면에서 보다 건강해 보이고 아직도 고운 티가 남아 있는 예쁜 할머니다.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된 곳에 사람이 살아 그 온기를 간직한 곳이라면 그 곳을 둘러보는 느낌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인상적인 것은 집 여기저기 화단이 많고 그 화단마다 만발한 여름꽃들이다. 특별히 권위적인 느낌은 없어도 대갓집이라서 규모가 남다른데 그 가운데 핀 작고 오종종한 꽃들이 이루어내는 조화는 참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장독대운조루 안주인의 손길 닿는 곳은 어디든 반짝거린다. 뒷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도 그렇다. ⓒ 김선호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장독대는 또 얼마나 평화롭던지. 옛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기가 수월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건, 저 나란한 장독대 맞은 편 한켠에 놓인 세탁기를 보고나서다. 어쩔 수가 있겠는가. 그게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는지 여자분들끼리 온 방문객들도 비슷한 말들을 주고 받는다.

'큰 아들이 몸이 안 좋아요. 작은 아들은 다른 데서 살구요.' 

할머니의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실제로 그 집을 꾸려 나가는 건 오로지 할머니 손에 달렸다. 대저택 어디든 깨끗하고 반짝 반짝 빛이 난다. 마당은 티끌 하나 없이 빗자루 쓴 흔적이 보인다. 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은 탓이다.  할머니도 돌아가시면 운조루의 운명은 어찌될까. 긍정적인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인지 어쩐지 회의가 든다.

무슨 얘길 나누시나두 딸과 함께 온 아버지가 운조루에 대한 설명을 한다 ⓒ 김선호


풍수상 매우 길지에 들어서 있다는 운조루를 빠져나와 주변을 살펴보면 풍수에 문외한이 봐도 고개가 끄덕여 진다. 주변이 참으로 아늑하고 평온해서 한번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곳이다.

운조루를 벗어나는데 다시 한차례 비가 쏟아진다. 구례읍을 벗어나며 섬진강으로 들어선다. 우리가 움직이는 동선에서 어디든 섬진강이 보인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구례쪽 섬진강은 꽤 깊고 넓다. 나긋한 맛이 없지 않은데 이 곳의 섬진강은 강변 가까이 가서 만져보고 싶은 강이 아니라 한발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은 섬진강이다. 조금 걷다 멀리서 바라만 본다. 멀고 가까운 지리산 능선으로 비구름이 몰려간다.

마을구례의 한 마을길에 모녀가 자전거를 타고 간다. 마을이 참 깔끔하고도 단정하다. ⓒ 김선호


피아골을 다시 찾아가는 길에 섬진강변을 따라간다. 저녁으로 가는 시간, 산과 강 사이에 운무가 끼어든다.  카스테레오 볼륨을 한껏 높인다. 기타로의 연주로 '캐러번서리'가 흐른다. 섬진강변을 따라가며 듣는 기타로의 음악이 꽤나 운치있다. 아니, 주변 풍경과 어울려 거의 감동이다. 음악과 풍경의 기막힌 조화다.

사막을 걷는 대상들의 행렬과 이 풍경과는 무관할 것인데도 그 음악의 흐름이 묘하게 저녁으로 가는 섬진강변을 적시고도 남는다.

숯불을 피워 굽는 고기의 맛은 각별하다. 더군다나 세상에서 한발 벗어난 지리산 깊은 계곡, 피아골에서 먹는 맛이니 오죽하겠는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실 무렵 하늘에 별들이 하나 둘 돋아난다. 깨끗한 검정톤의 배경에서 돋아난 별들은 고흐의 그림처럼 '반짝 반짝'
반짝인다.  

함께 야영을 하는 옆집( 옆 텐트) 아들과 아빠가 고개를 꺾고 별들을 센다. 저건, 북극성, 북두칠성도 보이지? 카시오페아가 어딨나 찾아 봐. 이런 대화를 나눈다. 참 멋진 일이다.

한참을 하늘을 쳐다봤더니 고개가 아프다. 연곡사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밤 산책 삼아 나섰다가 가로등 불빛이 더이상 없는 곳까지만 갔다 되돌아 왔다. 산중의 밤은 칠흑같다. 너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었다. 텐트 주변에서 밤벌레가 울었고, 발 아래선 계곡  흘러가는 소리가 이어졌으며 하늘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은하수 흐르는 소리가 들릴듯 말듯 멀어졌다.

섬진강구례읍을 벗어나며 만난 섬진강 ⓒ 김선호

덧붙이는 글 지난 8월 7,8,9일에 다녀온 여름휴가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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