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 기간에 여행 간 나, 전생에 나라 구했나
[초보 아빠의 좌충우돌 육아 이야기 ②] 모유수유와 천기저귀
신종플루에 걸리다
2009년 12월 초에 열이 38도를 넘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바로 그 당시 신종플루가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번져 사망자도 여럿 발생시킨 신종플루. 비록 아내는 출산 2주 전에 타미플루를 복용한 경력이 있었지만, 그것 가지고는 신종플루를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의학계의 소견이었다.
설마 신종플루라고. 토요일 새벽 난 구급차에 실려 동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아기, 산모와 격리.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 부디 신종플루만 아니길.
그러나 오후 늦게 대학병원에서 온 문자. 신종플루 양성반응!
아직 열은 38도를 왔다 갔다 하는데,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와 산모가 있는데 어찌 신종플루 환자가 발 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말이라 산후관리사도 없는 터, 아내가 힘든 몸을 이끌고 미음을 끓여주었지만, 산후조리를 받아야 할 아내가 나의 병간호를 해주는 꼴이니 그것은 더더욱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별 수 없었다. 집을 나가는 수밖에.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하나? 본가? 그러나 본가를 가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예순을 훌쩍 넘기신 만큼 면역력이 떨어지셨을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 신종플루 환자가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1주일 병가로 오지 말라고 하지, 집은 들어갈 수도 없지, 결국 내가 갈 곳은 모텔 밖에 없는가.
어차피 갈 곳이 모텔 밖에 없다면, 굳이 내가 서울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난 차를 몰고 무작정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이 내게 주신 휴가였다. 비록 신종플루에 걸렸지만, 정황상 신종플루 때문에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덕분에 난 결혼 이후 한 번도 떠나지 못한 혼자만의 여행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것도 아내의 산후조리로 가장 힘든 시기에. 상황이 이러하니 아내가 한 마디 거든다. 이렇게 운이 좋은 사내가 어디 있느냐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분명하다나.
어쨌든 난 그렇게 동해로 여행을 떠났고 1주일 동안 산후조리에서 해방되었다. 아내와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했지만, 그래도 기꺼운 마음이 우선이었다. 미필적 고의라고 해야 할까.
사실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아내 앞에서는 비록 티를 낼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출산은 남편에게도 스트레스였다. 당장 아이 때문에 나의 삶에 제약이 많아진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독한 가부장사회에서 식구가 하나 늘었다는 건 분명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가계 소득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남자에게 아이의 출생은 곧 나의 꿈을 모두 접어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소위 가장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만큼의 용기를 지니지 못한 수컷의 비애였다.
아내는 대신 나더러 여행기간 동안 오랜만에 편지를 써오라 했지만 정작 내가 여행길에 끼적거린 건 동해 낙산사에서 완성시킨 우리 딸래미에게 쓴 편지였다.
아가야. 아빠는 너로 인해 세상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단다.
이제껏 내 잘난 맛에, 나만 잘 하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그 모든바 나의 욕심임을, 내가 할일은 너의 디딤돌이 되는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네가 나를 딛고 좀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면,
네가 나의 시선을 넘어 좀 더 넓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네가 나의 꿈을 안고 좀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임을.
아가야. 하여 너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진보란다.
모유수유
1주일간의 휴가 아닌 휴가를 다녀온 나. 산후관리사와 계약된 기간은 어느새 끝나 있었고, 아내는 혼자 끙끙대며 서툰 모습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육아.
아이를 낳고 한 달 되는 시점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나 모유수유였다. 아내는 예상했던 대로 모유수유를 고집했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다른 엄마들이 아이에게 젖을 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거늘, 막상 나의 아내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과정을 보니 그 수고스러움에 입이 쩍 벌어졌다.
우선 모유수유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노동을 수반해야 했다. 원활한 모유수유를 위해서는 출산 전부터 가슴 마사지를 통해 유선을 뚫어놔야 했는데, 이는 조심조심 꽤 공을 들여야 했다. 너무 우악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약해서도 안 되고. 우리 부부의 경우는 내가 아내의 가슴을 직접 마사지 해줬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유수유의 고통은 출산 3~4일 후 젖이 돌기 시작하고, 아이가 본격적으로 젖을 빨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있는 힘껏 빨아들이는 아이의 흡입력을 이겨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산모는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모유수유를 포기한다지 않는가. 젖을 안 물리자니 아이가 울고, 젖을 물리자니 아내가 우는 상황.
아내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유수유에 관한 서적을 무슨 성경 읽는 마냥 정독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피가 나고 갈라지고, 아물 만하면 아이가 물어대는 바람에 또다시 피딱지가 않기를 반복하는 아내의 유두.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남는 젖으로 모유비누를 만들만큼 아내의 젖이 모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는 또 다른 부작용을 잉태했다. 많은 모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아내는 미역국 등 수분섭취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아이가 젖을 다 빨지 못할 때면 가슴이 딱딱해져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물론 유축기로 모유를 짜내기도 했지만 모든 게 처음인 아내에게 그 모든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2~3개월이면 진정된다는 모유수유의 고통을 아내는 편평유두를 가지고 있는 덕에 6개월까지 참아야만 했다.
어쨌든 남편으로서 아내의 모유수유를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가 울 때마다 찾는 모유. 차라리 내가 젖을 줄 수 있다면 아내의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 아이의 건강을 위해 끝까지 우유를 먹이지 않고 모유를 고집하는 아내의 정성이 고마울 따름이다.
천기저귀
산후 한 달쯤의 육아에 있어서 모유수유와 함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은 기저귀 빨기였다. 아내는 아이의 건강과 환경을 위해서 천기저귀를 고집했다. 대부분의 산모들이 처음에는 천기저귀에 도전하다가 어쩌다가 한 번 종이기저귀를 쓰게 되면 그 편리함에 맛 들려 천기저귀를 포기한다던데, 아내는 종이기저귀의 유혹을 끝내 이겨내고야 말았다. 덕분에 종이기저귀를 포기한 산모들에게서 천기저귀를 많이 얻었다고 좋아하는 아내.
그러나 남편의 입장으로서 아기가 천기저귀를 쓴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 달에 30만 원 정도 아낄 수 있고, 아이의 건강과 환경을 지킬 수 있다는 면에서 천기저귀를 쓰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지만, 그것은 그만큼의 수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20장 넘게 기저귀를 내놓는 신생아를 감당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아직 괄약근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내놓는 기저귀마다 똥을 지리는 아이. 똥 기저귀가 나올 때마다 아이를 씻기고 손으로 애벌빨래를 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아내는 아이가 자고 나면 빨래와의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물론 내가 퇴근을 일찍 한 날은 도와 줄 수 있었지만, 가사일의 대부분이 아내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터, 나는 아내의 투덜거림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종이기저귀를 쓰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이왕 시작한 천기저귀를 포기하려니 아깝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아내의 궁시렁거림을 들어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저귀 전용 세탁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구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기저귀를 세탁기에서 꺼내 널 때에는 탁탁 털어서 주름이 없게 해라, 기저귀는 세로 대신 가로로 털어야지 모서리를 맞추기 쉽다 등등 하나서부터 열까지 이어지는 아내의 잔소리와 이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는 나.
(아내가 옆에서 구박이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기저귀를 널었냐며, 매번 늦게 퇴근하지 않았냐며. 그러나 어쨌든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아내를 꼭 도와주웠다.)
과연 아이는 언제까지 기저귀를 차고 다닐까? 혹여 둘째를 낳는다면 기저귀가 두 배로 쌓이게 될 텐데, 그 엄청난 기저귀의 양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과거, 훨씬 많은 아이들을 키워낸 우리들의 조부모 세대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2009년 12월 초에 열이 38도를 넘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바로 그 당시 신종플루가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번져 사망자도 여럿 발생시킨 신종플루. 비록 아내는 출산 2주 전에 타미플루를 복용한 경력이 있었지만, 그것 가지고는 신종플루를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의학계의 소견이었다.
설마 신종플루라고. 토요일 새벽 난 구급차에 실려 동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아기, 산모와 격리.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 부디 신종플루만 아니길.
그러나 오후 늦게 대학병원에서 온 문자. 신종플루 양성반응!
아직 열은 38도를 왔다 갔다 하는데,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와 산모가 있는데 어찌 신종플루 환자가 발 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말이라 산후관리사도 없는 터, 아내가 힘든 몸을 이끌고 미음을 끓여주었지만, 산후조리를 받아야 할 아내가 나의 병간호를 해주는 꼴이니 그것은 더더욱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별 수 없었다. 집을 나가는 수밖에.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하나? 본가? 그러나 본가를 가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예순을 훌쩍 넘기신 만큼 면역력이 떨어지셨을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 신종플루 환자가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1주일 병가로 오지 말라고 하지, 집은 들어갈 수도 없지, 결국 내가 갈 곳은 모텔 밖에 없는가.
▲ 낙산사 앞 바다신종플루가 걸리자마자 향했던 그곳 ⓒ 이희동
어차피 갈 곳이 모텔 밖에 없다면, 굳이 내가 서울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난 차를 몰고 무작정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이 내게 주신 휴가였다. 비록 신종플루에 걸렸지만, 정황상 신종플루 때문에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덕분에 난 결혼 이후 한 번도 떠나지 못한 혼자만의 여행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것도 아내의 산후조리로 가장 힘든 시기에. 상황이 이러하니 아내가 한 마디 거든다. 이렇게 운이 좋은 사내가 어디 있느냐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분명하다나.
어쨌든 난 그렇게 동해로 여행을 떠났고 1주일 동안 산후조리에서 해방되었다. 아내와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했지만, 그래도 기꺼운 마음이 우선이었다. 미필적 고의라고 해야 할까.
사실 무척이나 힘들어하는 아내 앞에서는 비록 티를 낼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출산은 남편에게도 스트레스였다. 당장 아이 때문에 나의 삶에 제약이 많아진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독한 가부장사회에서 식구가 하나 늘었다는 건 분명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신종플루 환자신종플루에 걸린 남편 ⓒ 이희동
특히 나처럼 가계 소득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남자에게 아이의 출생은 곧 나의 꿈을 모두 접어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소위 가장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만큼의 용기를 지니지 못한 수컷의 비애였다.
아내는 대신 나더러 여행기간 동안 오랜만에 편지를 써오라 했지만 정작 내가 여행길에 끼적거린 건 동해 낙산사에서 완성시킨 우리 딸래미에게 쓴 편지였다.
아가야. 아빠는 너로 인해 세상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단다.
이제껏 내 잘난 맛에, 나만 잘 하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그 모든바 나의 욕심임을, 내가 할일은 너의 디딤돌이 되는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네가 나를 딛고 좀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면,
네가 나의 시선을 넘어 좀 더 넓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네가 나의 꿈을 안고 좀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임을.
아가야. 하여 너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진보란다.
▲ 눈덮힌 설악산아이와 한 번은 올라야 할 설악산 ⓒ 이희동
모유수유
1주일간의 휴가 아닌 휴가를 다녀온 나. 산후관리사와 계약된 기간은 어느새 끝나 있었고, 아내는 혼자 끙끙대며 서툰 모습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육아.
아이를 낳고 한 달 되는 시점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나 모유수유였다. 아내는 예상했던 대로 모유수유를 고집했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다른 엄마들이 아이에게 젖을 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거늘, 막상 나의 아내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과정을 보니 그 수고스러움에 입이 쩍 벌어졌다.
▲ 집념생존의 본능 ⓒ 이희동
▲ 젖 먹기 전무척이나 들뜬 아이 ⓒ 이희동
우선 모유수유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노동을 수반해야 했다. 원활한 모유수유를 위해서는 출산 전부터 가슴 마사지를 통해 유선을 뚫어놔야 했는데, 이는 조심조심 꽤 공을 들여야 했다. 너무 우악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약해서도 안 되고. 우리 부부의 경우는 내가 아내의 가슴을 직접 마사지 해줬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유수유의 고통은 출산 3~4일 후 젖이 돌기 시작하고, 아이가 본격적으로 젖을 빨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생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있는 힘껏 빨아들이는 아이의 흡입력을 이겨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산모는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모유수유를 포기한다지 않는가. 젖을 안 물리자니 아이가 울고, 젖을 물리자니 아내가 우는 상황.
아내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유수유에 관한 서적을 무슨 성경 읽는 마냥 정독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피가 나고 갈라지고, 아물 만하면 아이가 물어대는 바람에 또다시 피딱지가 않기를 반복하는 아내의 유두.
▲ 처음이자 마지막 젖병. 공갈 젖꼭지는 용케도 알아내는 아기. ⓒ 이희동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남는 젖으로 모유비누를 만들만큼 아내의 젖이 모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는 또 다른 부작용을 잉태했다. 많은 모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아내는 미역국 등 수분섭취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아이가 젖을 다 빨지 못할 때면 가슴이 딱딱해져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물론 유축기로 모유를 짜내기도 했지만 모든 게 처음인 아내에게 그 모든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2~3개월이면 진정된다는 모유수유의 고통을 아내는 편평유두를 가지고 있는 덕에 6개월까지 참아야만 했다.
어쨌든 남편으로서 아내의 모유수유를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가 울 때마다 찾는 모유. 차라리 내가 젖을 줄 수 있다면 아내의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 아이의 건강을 위해 끝까지 우유를 먹이지 않고 모유를 고집하는 아내의 정성이 고마울 따름이다.
천기저귀
▲ 천기저귀의 압박하루 40장 ⓒ 이희동
산후 한 달쯤의 육아에 있어서 모유수유와 함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은 기저귀 빨기였다. 아내는 아이의 건강과 환경을 위해서 천기저귀를 고집했다. 대부분의 산모들이 처음에는 천기저귀에 도전하다가 어쩌다가 한 번 종이기저귀를 쓰게 되면 그 편리함에 맛 들려 천기저귀를 포기한다던데, 아내는 종이기저귀의 유혹을 끝내 이겨내고야 말았다. 덕분에 종이기저귀를 포기한 산모들에게서 천기저귀를 많이 얻었다고 좋아하는 아내.
▲ 기저귀 갈기푸짐하게 응가를 싼 우리 아가씨 ⓒ 이희동
하룻밤 사이에 20장 넘게 기저귀를 내놓는 신생아를 감당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아직 괄약근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내놓는 기저귀마다 똥을 지리는 아이. 똥 기저귀가 나올 때마다 아이를 씻기고 손으로 애벌빨래를 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아내는 아이가 자고 나면 빨래와의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물론 내가 퇴근을 일찍 한 날은 도와 줄 수 있었지만, 가사일의 대부분이 아내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터, 나는 아내의 투덜거림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들면 차라리 종이기저귀를 쓰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이왕 시작한 천기저귀를 포기하려니 아깝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아내의 궁시렁거림을 들어줄 뿐이었다.
▲ 똥기저귀 빨기애벌빨래 후 세탁기 넣기 ⓒ 이희동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저귀 전용 세탁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구박은 줄어들지 않았다. 기저귀를 세탁기에서 꺼내 널 때에는 탁탁 털어서 주름이 없게 해라, 기저귀는 세로 대신 가로로 털어야지 모서리를 맞추기 쉽다 등등 하나서부터 열까지 이어지는 아내의 잔소리와 이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는 나.
(아내가 옆에서 구박이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기저귀를 널었냐며, 매번 늦게 퇴근하지 않았냐며. 그러나 어쨌든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아내를 꼭 도와주웠다.)
▲ 아이가 있는 풍경끝도 없는 기저귀의 행렬 ⓒ 이희동
과연 아이는 언제까지 기저귀를 차고 다닐까? 혹여 둘째를 낳는다면 기저귀가 두 배로 쌓이게 될 텐데, 그 엄청난 기저귀의 양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과거, 훨씬 많은 아이들을 키워낸 우리들의 조부모 세대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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