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걸은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제주올레 7코스] 우리의 존재를 축하할 수 있는 시간
▲ 제주올레 7코스봄바다 ⓒ 김비아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런 만남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 자연 속을 걸을 때 나는 그런 관계에 가장 근접하게 되는 것 같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하루 4시간 이상 걷지 않고는 삶을 삶답게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뭐 철학자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한지라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홀로 걷는 시간을 삶에서 빼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종일 걷고 싶다.
그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형태이고 사람과 늘상 부대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더욱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때때로 우리의 주체성을 훼손하고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조각난 세계를 체험하게 하므로….
독서와 운동이 그 불균형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아 주지만, 독서는 정신에 그리고 운동은 몸에 좀 더 초점이 있다. 이에 비해 걷기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몸을 통한 감각적인 접촉과 세계에 대한 사색이 함께 일어나는, 가장 인간다우면서도 자연스러운 활동인 것 같다.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서 그 먼 거리를 주파한 기억이 유전자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갈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두 발로 걷기 시작하는 순간 피부와 살이 생생하게 깨어나고 정신은 더욱 명료해진다. 이 세계의 빛이 우리 존재를 비추면서 우리 내면도 함께 깨어나는 것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몸과 마음 전체로 또렷이 자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이다.
홀로 걷기에 좋은 길, 제주 올레
▲ 제주올레 7코스바다와 유채 ⓒ 김비아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홀로 걷는 것도 한없이 감미롭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냐고 묻는다면 둘 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기에 답하기 어렵지만, 가장 깊은 충만감을 선사하는 건 후자인 것 같다. 아니, 그것은 길마다 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제주올레가 홀로 걷기에 참으로 좋은 길이라는 사실이다.
그 길에 있는 것은 타자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다. 무언가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는 시간. 자신의 고유성이 빛나게 살아있으면서도 길 위의 모든 것들과 생생하게 교감할 수 있는 시간. 그대도 나도 자유롭고, 어떤 희생도 봉사도 요구되지 않으며, 모든 필요와 기대와 희망을 넘어서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축하할 수 있는 그런 시간.
춤추는 바람과 햇살과 파도를 만끽하면서 바닷길을 따라 몇 시간을 걷노라면 존재의 복원력이 절로 작동한다. 지나친 자의식은 진정이 되고 쓰렸던 마음도 평온을 되찾고 가슴에선 다시 노래가 피어난다. 꽃길, 바닷길, 갈대길, 하늘길 사이를 뒹굴며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세계를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무한한 행복이고 오르가즘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나 다정한 길, 7코스
▲ 제주올레 7코스7코스의 시작점 ⓒ 김비아
제주올레 7코스는 외돌개의 청색 물빛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앞에서 마음이 꽃잎처럼 스르르 열리고, 평온해지고 깊어지고 한결 부드러워지고, 그러면서도 존재의 중심이 굳건해지는 그것이 자연이 지닌 힘. 이곳에선 우리 영혼도 푸름이 된다.
서귀포 바닷가를 따라가는 7코스는 그 누구에게나 다정한 길이리라. 외돌개를 지나서도 한동안 솔숲 사이로 나무계단이 이어져 길은 쉽고 편안하다. 내가 찾은 때는 3월 말, 만발한 유채꽃이 7코스를 더욱 환하게 했다. 부드러운 봄바다와 노란 유채의 향연, 제주의 하늘과 땅과 바다에 봄기운이 가득 내려앉은 날이었다.
▲ 제주올레 7코스나무계단을 따라 ⓒ 김비아
두어 시간 걷고 나면 한 리조트 바닷가 우체국에 닿는다. 공짜 엽서를 부칠 수 있는 곳이다. 몇 줄의 글귀를 띄우고 다시 길을 시작했다. 이젠 갈대숲 사이로, 비닐하우스 너머로, 돌담 위로 씩씩하게 버티고 선 한라산이 내내 동행이 되어주었다. 월평포구가 나타나면 드디어 7코스의 끝, 길은 끝났지만 길 속에 담긴 봄의 자취는 영원하여라.
▲ 제주올레 7코스한라산 ⓒ 김비아
▲ 제주올레 7코스바다와 유채 ⓒ 김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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