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이 없다면? 병원에 입원하면 되고...
[브라질 의료제도 관찰기 ②] 원거리 진료를 위한 무료숙소와 차량 지원, 그리고 저가약국
신유정은 한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신경언어병리학을 전공했습니다. 학부 졸업 후 동 대학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마쳤으며 현재는 브라질에 체류 중입니다. 마또 그로수 연방대학병원의 열대의학연구소에서 열대 감염성 질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알게 된 브라질의 공공의료체계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단, 글의 모든 내용은 마또 그로수 주 기준임을 밝혀둡니다. [편집자말]
▲ SUS 인터넷 홈페이지http://portal.saude.gov.br 다양한 정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 SUS
심장판막이식, 간이식 등 우리나라의 웬만한 3차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경우, 평범한 월급받아 생활하는 가정들이 지불하기 힘든 고비용의 의료서비스까지 무료인 SUS('O Sistema Único de Saúde)를 보고 사실 좀 놀랐습니다. 물론 비용과 질적인 면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하고, 응급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진료 시스템이 과연 효율적인가 하는 좀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지만 말입니다.
또 어느 정도의 의료비용을 지출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되는 인구가 다수인 우리나라와, 빈부간 격차가 극심한 브라질에서 주로 빈민층이 누리게 되는 공공의료서비스를 단순히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응급상황에서 만큼은, 지난 번 기사(<응급실 가면 돈 한푼 안내고 걸어나온다>)에서처럼 직업도 없는 16세의 아기 엄마가 5개월 된 아이의 수술비용과 중환자실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아픈 아이만 걱정할 수 있게 해주는 브라질의 병원이 좀 더 인간적인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쿠바 의료제도 모델로 한 브라질의 SUS... '차별없는 진료'가 이상
브라질의 공공의료체계인 SUS는 세계에 몇 안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의 의료제도를 모델로 했습니다. '차별없는 진료'가 SUS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료들이 온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쿠바와, 자본주의로 국가경제가 돌아가는 브라질이 동일한 이상을 구현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브라질의 GDP 대비 의료보건비용 지출 비율은 OECD 국가 수준에 근접해 있으면서도(브라질 8.4%, 스웨덴 9.1%, 우리나라6.3%. 2007년 기준), 전체 정부 지출 비율은 OECD 수준에 한참 모자라니(브라질 41.6%, 스웨덴 81.7%,우리나라 54.9%), 이상은 높은데 몸이 안 따라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아무튼, 긴 대기시간과 상대적으로 진료상 책임을 묻기가 힘든 의료시스템, 시설 등의 이유로 경제적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민영의료보험을 가입합니다. 그리고 다달이 지불해야 하는 이 의료보험의 수가는 브라질 최저임금 남짓하기 때문에 웬만한 가정에서는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2007년 기준으로, 브라질 인구의 약 19%가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로 추산됩니다.
▲ 영화 식코 포스터이 영화에 나오는 전혀 상반되는 두 나라가 브라질의 의료제도 안에 공존합니다. ⓒ 식코
그리고 심심하면 의료민영화 이야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우리나라는 아마 이 두 세계 중간 어디쯤 위치하는 것 같구요. 어느 방향을 선택할 지, 그냥 중간쯤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선택할 지 잘 고민해 볼 일입니다.
어쨌거나 계속 SUS 이야기를 하자면, 이 제도가 정착된 지 20년이 넘다 보니, 대다수 브라질 사람들은 정부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 품목당 떼이는 간접세가 40% 정도이니, 이런 비싼 세금을 받아서 잘 돌아가게끔 하는 게 정부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는, 치료를 받기 위해 짧게는 2~3시간, 길게는 1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와야 하는 마또 그로수 각 주변 도시의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한 숙소와 교통수단도 정부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겁니다.
이 환자들이 진료받는 각 대학병원, 국립응급센터, 그리고 정부 의뢰를 받은 사립병원 모두가 SUS의 의료기관입니다. 따라서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한 무료 숙소는 이 각 기관 주변에 모여 있습니다. 이 꾸이아바에 이런 무료 숙소는 총 35개, 각 숙소는 하루 총 40~50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결핵을 앓았다가 지금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이곳 연방대학 병원에 다달이 외래진료를 오는 65세 할머니는 약 4시간 가량 걸리는 북쪽의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이런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위해 하루 1번, 두 도시를 왕복하는 버스를 무료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환자가 숙소에 머무르는 동안 소요되는 체류비용도 시에서 부담합니다.
누구든 무료로 약을 탈 수 있는 SUS 제도
▲ Casa do Apoio원거리 진료를 위한 무료 숙소입니다. 시에서 비용부담을 하고 있습니다. ⓒ 신유정
이 무료 숙소 외에도, 투약이 필요한 외래환자의 경우에 'Centro de Saude'라는 정부기관에서 처방전에 따라 무료로 약을 조제해줍니다. 의료보호 1종인지, 2종인지를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이, 누구든지 무료로 약을 탈 수 있습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없는 진료'가 SUS의 이상이니까요.
또 긴 대기시간이 귀찮고 약을 살 정도의 돈은 있는 환자들을 위해 무료는 아니지만, 저가에 약을 판매하는 공공약국도 있습니다(Farmacia Popular). 이 약국에서는 총 107항목의 약들을 75~90% 가량 할인된 가격으로 환자들에게 공급하고 있습니다. 의료보험공단에서 약값까지 모두 지원되는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이게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약국이 아닌 경우에 약값을 정가 그대로 사야 하는 브라질 환자들에게는 몹시 유용한 시설입니다.
▲ 저가의 공공약국대개는 Pronto Socorro(응급센터) 주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 Ministerio de Saude
약의 종류는 혈압약, 당뇨약, 항생제, 소화제, 진통제, 고지혈증치료제 등등이 해당되고, 가격의 할인폭은, 예를 들어: 철분제 7헤알-> 0.8헤알, 항바이러스 제제인 아씨클로버 54헤알 -> 7헤알 정도로 살 수 있습니다(1헤알이 약 700원 가량입니다).
돈이 없는데 바로 투약을 해야 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정말 필요한 약인데 정부 지원 항목에 해당되지도 않고, 너무 비싼 약인 경우(예: 항생제 중 카바페넴이나 반코마이신) 이런 약들을 위한 의사의 '투약요청서'를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 제출해서 무료로 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이 과정에서의 단점은 역시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투약요청서'를 제출하고 약이 환자 손에 들어오는 시간은 짧게는 30일, 길게는 2~3달이 걸립니다. 이 기간을 견딜 수 없으면, 본인 돈으로 비싼 약을 사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의사소견 상 바로 투약이 필요하지만, 도저히 약값을 감당할 수 없는 환자의 경우에 고육지책으로 이곳 의사들이 쓰는 일종의 편법이 하나 있습니다. 이도 저도 안 될 때는,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겁니다. 입원 환자에게 투약되는 약들은 바로 지원되기 때문이죠. 물론 아무나 공짜로 약을 받게 하기 위해 되는대로 입원시킨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 투약요청서비싼 약들의 경우 필요합니다. 앞 뒷면에 환자의 상병명과 그 전에 처방했던 약들, 그 경과들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해야 합니다. ⓒ 신유정
캡토프릴이 물론 항고혈압제제이지만, 심부전이 있는 고혈압 환자에게 주로 처방되는 약입니다. 일반적인 대개의 고혈압의 경우, 칼슘채널길항제인 아모디핀, 노바스크 등의 투약을 우선 고려하는데, 이에 대해 이 도시의 심장내과 전문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혈압 환자에게 먼저 고려해 볼 만한 것은 칼슘채널길항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노바스크나 아모디핀의 경우 약값이 캡토프릴의 2배가 넘는다. 정부가 약값을 지원하는 브라질의 의료체계로는 이 약값을 부담할 수가 없다.
따라서 특별히 부작용이 없는 경우에는, 비용과 효과 면에서 가장 나은 캡토프릴을 모든 고혈압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이 브라질 의사들의 지침이다. 단, 본인이 비용을 부담하는 사립병원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그리고 이 사립병원은 민영의료보험을 가입한 사람들이 주로 진료받는 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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