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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의 추도식에 참석하니 기쁩니다

참여정부에 와서야 독립운동 인정받은 조동호 선생 56주기

등록|2010.09.13 11:41 수정|2010.09.13 11:41
남 쉴 때 더 바쁜 사람은?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목회자도 답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9월 11일)는 토요일이었습니다. 저는 토요일 장거리 행차는 가급적 피하는 편입니다. 특별히 결혼 주례가 있거나 참석해야만 하는 추도식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편입니다. 어제 한 추도식이 있어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립투사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분에게는 '독립운동가'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때는 독립을 위하여 그리고 해방정국에서는 남북 분단에 반대하여 부단히 몸을 움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돌아가신 지도 56년이 됩니다. 어제 추도식이 56주기였으니까요.

처음엔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온전한 기독교식 추도모임이 아닌데도 순서에 기도가 꼭 들어가는 거가요. 그분에 대한 책을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느 때는 기도로 또 다른 때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곤 했습니다. 굳이 3.1운동을 운위하지 않더라도 항일독립운동에 기독교가 끼친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하더라도 유족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면 추도식에 기도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분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그들의 식솔들이 독실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추도식에 기도가 빠지면 추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추도식을 후원하는 기관에 국가보훈처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도 기도를 고집하는 것을 보면요.

이 독립운동가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은 사람이 만든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 독립운동가는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방략의 노선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연유로 군사독재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 문민정부를 거쳐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그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참여정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서훈을 받기까지 그분 맏아들의 노고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급 장애인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휠체어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을 가지고 국가보훈청 국회 등 관계기관을 10년 가까이 출입하며 서훈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관계자들을 설득했으니까요. 그 열매가 2005년 비로소 열매 맺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의 추도식에 참석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이자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자성어에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쯤의 뜻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추서 받게 한 그분의 장남이 일제시대에 태어나 활동하였다면 분명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독립운동엔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는 치열함이 요구되는 것이니까요. 그분은 그 치열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 낮 예배 설교 시간에 어제 이런 분의 추도식에 참석해서 기도를 하고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어느 한 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소중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후손을 생각해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에도 그리고 독립이 되고 나서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친일배들의 후손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더 뒤틀립니다. 정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최소한의 예라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어제 제가 참석해서 추도식에 기도 순서를 맡은 독립운동가는 유정(榴亭) 조동호(趙東祜, 1892년 8월 4일 ~ 1954년 9월 11일)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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