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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74회)

승전놀음 <2>

등록|2010.09.24 11:49 수정|2010.09.24 14:33
"글쎄올습니다."
"달리 아는 바 없는가?"

"아는 바라니요?"
"아는 바를 모두 얘기해 보라는 말이네."

판술이 미적거리는 기미를 보이자 정약용은 미끼를 던졌다. 공을 세우면 장차 큰 상이 내릴 것이란 귀띔이었다. 판술은 눈빛을 빛낸다.

"이미 세상을 떠난 위인이니 이런 말 한다고 누가 흉볼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댁은 이경호(李敬豪) 선비님 집이었습니다. 임오년 난리 때, 가끔 집안을 출입하던 윤치호의 고변으로 이선비는 죽임을 당하고 부인은 관비로 끌려갔습니다. 종복 둘은 휘하에 거뒀다고 들었습니다."

"종복이라니?"
"늙은 종 내외와 젊은 계집종으로 그들은 관에 고변한 윤치호의 수중에 들어간 겁니다. 집이며 전답, 노복들까지 차지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에 두려움이 생겨 관원 몇 사람이 경호했었지요."

"그 집엔 나이든 사내만 있던데?"
"그렇습니다. 나이든 종놈의 여편네는 항상 잔병을 앓았는데 석 달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금이란 종년은 윤가가 그 집에 들어간 지 여섯 달 됐을 때 죽어나갔지요. 심한 고뿔 기운으로 며칠간 고생하다 저승으로 떠났다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윤가 마누라의 투기로 맞아죽었다고 쉬쉬 했으니까요."

판술은 불쌍한 사금이의 묏자리를 자신이 손수 정해 주었다고 한숨 속에 말을 맺었다. 윤치호 집안에 있는 노복은 묵묵부답 함구하다 다그치듯 물었을 때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더듬더듬 운을 떼면서도 여전히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두 해만 더 살면 예순입니다. 이렇듯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살아생전 볼 것 못볼 것 모두 보았는데 더 이상 다른 걸 본다하여 무슨 여한이 있고 미련이 남겠습니까. 그날, 사금이가 죽어나갈 땐 날씨가 몹시 음침했어요. 윤가에게 끌려가 억지로 겁간 당했으나 윤가 마누라는 꼬릴 쳤다고 사금이만 닦달했어요. 그런 사금이를 윤가 마누라가 개 패듯 했으니 모닥숨이라도 붙었던 게 다행이었지요."

맞아 죽었다는 얘기였다. 당시 관원들은 무얼 했느냐는 물음에 노인은 입맛을 다셨다.

"법이나 관아도 힘 있고 빽이 있어야 소용되는 곳입니다. 주인이 입을 닫으라 명하고 은밀히 내다 버리라 했는데 종놈 신세에 된다 아니 된다 하겠습니까. 참으로 가당찮은 말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죽음이라 내가 판술이에게 얼마간 돈을 주어 좋은 자릴 점지해 달라 했습니다. 판술이 묘한 얘길 했어요. 명당은 육신의 살이 다 도망가고 뼈가 누르스름하게 남아야 한다구요. 사금이는 한이 깊으니 양시(養尸)의 땅에 묻어야 한풀이를 할 것이라 했지요."

정약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사건이 떠올라 나름대로 수긍한 것이다. 양시의 땅은 주검이 썩지 않고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어난다. 억울한 죽음을 이런 곳에 묻는 건 장차 누군가가 확인해 달라는 의미가 숨어 있었다.

"장소는 어딘가?"
"정동(貞洞)입니다."

정동이라면 덕수궁 뒤쪽인가 싶었다. 그런 곳에 주검을 묻으니 봉분을 세우지 않은 평평한 평장(平葬)이다.

조선 왕조의 문을 열어 정조 때에 이르기까지 도성에 사는 사람이 지켜야 할 몇 가지 규범이 있었다. 첫째, 서울 사산(四山)의 솔을 베지 말 것 둘째, 도성 안에 보리밭을 이루지 말 것 셋째, 성(城)을 타고 넘어 다니지 말 것 넷째, 성 아래 백토(白土)를 파지 말 것 등이었다. 이러한 네 가지를 못하게 하고 도성 안에 중들의 출입조차 통제시켰다.

이성계는 한양성을 수축한 뒤 서대문으로 들어가는 언덕바지에 능(陵)을 만들었다. 이곳이 서부황화방(西部皇華坊)이다. 도성 안에 무덤 쓰는 건 있을 수 없었지만 이곳에 계비 강씨의 무덤을 만들었다.

사랑한 계비 강씨를 도성 밖으로 내보낼 수 없어 경복궁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시신을 묻고 이름을 정릉(貞陵)이라 했다.

정릉 동쪽 언덕에 흥천사를 새로 일으켜 원당(願堂)으로 삼고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삼았다. 나중에 보위에 오른 방원은 황화방에 있는 강씨의 무덤을 파헤쳐 지금의 성북구 북한산 자락으로 옮기고 웅장했던 묘석은 청계천 다리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중구 정동과 성북구 정릉동은 모두 계비 강씨의 무덤이 있던 탓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노인을 앞세우고 정릉동 산자락으로 들어가 사금이의 주검이 묻힌 자리를 파헤쳤다. 양시의 땅에 묻혔다면 형체가 온전할 것이고 사인이 밝혀지길 원하는 망자의 한이 배었다면 그것을 확인해 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돼 금역 지역을 알리는 팻말을 박고 땅을 파헤쳤다.

"이런 일을 예상했겠습니까만, 판술이란 풍수사가 석관(石棺)을 쓰라 권한 건 한이 많은 사람에겐 그것 외에 좋은 게 없다 해섭니다."

그래서인지 한 자 남짓 팠을 때 관이 보이고 주위의 흙을 털어내자 관이 드러났다. 석관 뚜껑을 열자 생각했던 대로 그곳은 양시의 땅이었다. 사체가 썩지 않고 살았을 때처럼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어나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인지 노인은 하얗게 질려 물러섰지만, 멈칫거리면서도 일을 거들었다. 벗겨낸 석관 뚜껑 위에 사금이의 시체를 올리고 눈은 경악으로 치뜨였다. 죽은 자의 몸을 통해 아이 몸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범상한 것도 아니었다.

정약용의 뇌리엔 <세원록>이란 책이 떠올랐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임산부가 살해되거나 아일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시체를 땅에 묻어 날이 경과하면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을 맞아 죽은 이의 시체가 팽창하고 골절 마디가 열려 배 안에 있던 아이가 나온다'고 했다.

지수화풍은 불가에서 말하는 사물과 인체를 이루는 네 가지 요소다. 뼈대와 살은 지(地)요, 온기는 화(火)요, 피와 체액은 수(水)요, 호흡과 기의 흐름은 풍(風)인데 죽은 뒤엔 모두 흩어져버린다. 무덤에서 아이가 출생했다면 원한이 깊어서인가?

준비해 간 감초 즙으로 시신을 닦아내고 어깨와 몸의 살집에 영초를 발랐다. 사체였지만 곳곳에 상흔이 나타났다. 흉기에 의한 치사는 상흔이 푸르거나 붉고 혹은 검기도 하고 부어오른다. 상처는 비스듬하거나 가로지르거나 수직으로 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금이는 명이 끊긴 지 오래됐고 땅 속에 잠을 잔다. 초검이나 복검 때의 시장이 있을 리 없는 종년이니 더 이상의 검시는 무의미하여 일단 관을 덮고 사헌부로 돌아왔다.

정약용을 기다리는 이는 지팡이로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선 쉰 살 남짓의 중년 사내였다. 사내는 등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건 강한 의지였다. 그 자신 감당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지만 태연을 가장한 채 서 있는 게 역력했다. 정약용이 자릴 권했다.

"앉아 있는 게 고역일 수 있으니 이대로가 편합니다. 윤가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오랜 병상에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잖습니까, 하하하하!"

호방하게 웃는 것 같았지만 결코 기분 좋은 건 아니었다. 빈 동굴을 공명하는 메아리 같은 웃음이었다.

"나으리, 그 자의 죽어 나자빠진 모습을 볼 수 없습니까? 한 번 봐야겠습니다. 그 많은 세도를 놓아두고 훌훌 제 놈만 떠날 인간이 아닙니다. 이게 꿈인지 생신지 한번 봐야겠습니다. 동지들을 팔아치운 대가로 호사를 누린 그 쌍판을 한 번 봐야겠습니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이국진(李國鎭)이라 밝혔다. 목이 잘린 윤치호는 <관우희> 회원이었다.

조선은 대륙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몸을 웅크린 호랑이 형상이다. 호랑이가 대륙을 호령하려면 무엇보다 어린 호랑이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점에서 조선의 부모 잃은 어린이들을 한 곳에 모아 무예를 가르쳤으나 나중엔 광대패들이 즐겨 쓰는 땅재주나 왈자타령이 고작이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관우희> 흔적이지만 임오년 난리가 있자 이국진은 목숨만 부지한 채 살아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병고를 치렀을 것이지만 윤치호의 모가지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게 오히려 끔찍했다.

어둑새벽 검시기록을 열고 생각에 잠긴 정약용의 뇌리에 찾아든 것은 범인의 행위였다. 일반적인 살인의 경우 살해 현장에 있던 물건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치우지 않는다. 작도가 그것이다.

피가 튀긴 흔적이 있고, 단숨에 목이 잘렸다면 당연히 작도를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범인은 그것을 현장에 두지 않고 광으로 옮겨 핏 자국을 닦았다.

'노인의 행위는 아닌 것 같고, 집안을 잘 아는 누군가가 또 있다. 누군가?'

기록 보관실에서 몇 해 전의 자료철을 뒤적였다. 윤치호가 이 선비 집을 차지할 때 이 집에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다시 훓었으나 지금처럼 드러난 사람 외엔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박씨의 주검이 발견되자 사헌부는 긴장에 휩싸였다.

사인은 중독사였다. 그런데 중독된 부위가 바로 여인의 음호였다. 검험에 나선 서과가 돌아앉은 채 답변을 내놓았다.

"일반적인 중독은 은비녀를 사용할 경우 중독된 기미를 입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 박씨 주검에선 그런 흔적은 없고 대신 하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면 박씨 부인은 지난밤 누군가와 성행위를 하고 난 후 중독된 것으로 보입니다."

남편의 목이 잘린 채 발견되고 주검의 피가 마르기 전인데 그 사이 간부를 불러 정을 통한다는 게 말이 될 법이나 싶은가. 서과는 그런 눈빛을 보냈지만 정약용은 그 점에 대해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검시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선 감초 즙으로 몸을 닦고 영초를 뿌려 상흔을 찾아야 하고 몸 안을 살펴 이상한 곳이 있는지를 몇 번이고 더듬어야 했다. 그러나 없다. 행랑채에 머무는 나이든 노복에게 최근 이 집을 출입한 사람들에 대해 물었을 때도 답변은 시쿤등했다.

"살인이 났으니 사람이 들어올 리 없지요. 지난밤에 꼭두쇠가 들러 행화(行花)를 받아가는 것 외엔 출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
∎행화(行花) ; 꽃값 또는 바람 핀 수고비
∎평장(平葬) ; 봉분을 세우지 않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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