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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비를 나에게"... 이승만 안의 절대군주 유전자

[박용만과 그의 시대 12] 독불장군 이승만의 엉뚱한 제안

등록|2010.09.27 14:31 수정|2010.09.27 14:31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이승만은 천생이 독불장군이었다. 지지자들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스스로 재무가 돼 공금을 독단 처리했다. 나중 국민회를 분열시키고 동지회를 조직한 다음은 종신 총재가 되는 비상식적인 처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헌장 위에 군림했다. 동지회 회의에서 결의된 것도 그의 허락 없이는 실행하지 못했으며 중요사안은 총재의 지시로 이행하는 독재체재를 유지했다.

상해의 임시정부를 지원할 성금을 자신의 구미위원부에서 관장하고 자신이 재무를 맡아 공금을 독단 사용한 것도 유사한 행위였다. 그런 인간형인 이승만에게 총회장 김종학의 회관 건축비 전용 사건이라는 호재가 터진 거였다. 기다렸다는 듯 '태평양잡지' 제2권 6호에 성토문을 실었다.

"하와이는 내외 각지에서 희망을 두는 곳이고, 이곳 한인의 발전이 각지에 있는 한인의 희망인데, 이곳에 일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말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할 것이므로 지금 사실을 말하고자 하노라. (주(註)-서론부터가 야릇하다. 자기가 마치 하와이 동포들을 치리하는 통치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내가 이곳에 온지 두 해가 됐고, 그 동안에 보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참고 있었던 이유가 있다. 첫째로 맡은 일이 중하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가가 없었고, 둘째로 만일에 공리를 밝히면 다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다치는 사람은 응당 말하기를 이승만이 단체를 방해한다고 할 것이요, 그 결과는 당파 싸움인데 나는 당파 싸움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은 까닭에 조용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註)-그는 조용히 떠나는 대신 회비전용 사건이 일어난 1915년 1월 여러 섬들을 돌아다녔다. 임시총회를 열라고 들고 일어나게 했고 그들은 자칭 혁명대가 됐다. 전의를 부추기고 당파싸움에 불을 붙인 게 누구인가.)

이곳에 있기를 다시 작정한 때에 국민회 당국과 의논하기를, 출판사업은 국민회가 간섭하지 말고 나의 사업으로 할 것과 모든 찬조금은 내가 직접 받기로 언약하고 교육 특별재정을 청원하는 때에, 국민회 당국이 회관 건축 의사를 제출하여 교육재정을 방해했으니 이것은 교육사업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일반동포가 이해득실을 판단해야 할 것이며 국민회에 돈을 주어서 시루에 물 붓듯이 없애는 것 보다 이승만에게 주어서 사업하는 것이 한인 전체의 유익이 될 것이다.

국민회 당국이 지난 두 해에 수입된 의무금을 무엇에 썼는가. 사탕 밭에서 땀흘려 모은 돈을 받아서 무엇을 했는가. 그것을 이승만에게 주었으면 학생기숙사 건축이 완성됐을 것이며 국민회는 잘 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나, 학생기숙사는 한 번 세우면 영원히 우리 자녀들을 양성하는 것이다.(이하 생략)"

▲ 하와이 한인학원. 오른쪽 끝에 이승만이 서 있다. 1914년 ⓒ 저작권 해제



 이어서 그는 누가 봐도 엉뚱한 4 항목의 유명한 제안을 내놓는다.
           
첫째 ... 무슨 관계로든지 우리의 일을 반대하는 개인은 국민회를 반대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
둘째 ... 이곳저곳의 지방마다 모여서 문제를 공결하여 나에게 보내면 그것을 받아 가지고 다수 의사를 따라 일을 결정할 것.
셋째 ... 지나간 2년 동안에 국민회가 의무금을 받아서 교육사업에 쓰지 않고 소모하였으니 금년에는 무슨 재정이나 전부를 교육사업 책임자에게 보내어 교육사업을 성취할 것.
넷째 ... 나의 의견을 실행하면 국민회 사무와 '국민보' 발행을 계속할 수 없겠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이라. 금년의 의무금과 모든 공금을 교육사업에 쓰라고 나에게 보내더라도 국민회의 필요한 경비와 임원들의 월급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국민회의 기초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니 염려할 것 아니라.

이승만의 이 글이 '태평양잡지'에 실린 것은 1915년 2월 중으로 판단된다. 한 마디로 뻔뻔함의 극치를 본다는 표현이 타당할 것 같다.

나이 20에 배재학당을 들어간 이래 20년의 세월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를 익힌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자격은 기껏 일반 회원이 아닌가. 대의원도 아니고 집행부 임원도 아닌 사람이 난데없이 회비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엉뚱한 발상인가. 적법한 절차를 통해 선출된 연후라면 모를까 아무런 위임도 없이 어떻게 자기가 기존 임원들의 월급을 준다느니 만다느니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한 말이 이승만의 유전자 속에 들어가 있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이씨조선의 종친으로서 권력과 부의 주변부에 밀려나자 근대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무기력한 황제를 반대하다 보니 욕하면서 배운다고 자기를 만인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착각한 건 아니었을까.

이 착각 때문에 그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후 탄핵을 받아 면직됐다. 또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후 4.19혁명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자 '시민들이여 기뻐하라' '학도들이여 기뻐하라'는 배너를 들고 시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 저작권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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