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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덕혜희> 작가 혼마 야스코의 '표절 검토 자료'

등록|2010.10.01 16:58 수정|2010.10.01 18:18
①혼마 야스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이훈 번역, 역사공간, 2008년 5월)
②권비영,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다산책방, 2009년 12월)
③혼마 야스코측 검토의견

<1>
①"덕혜가 태어난 것은 조국이 멸망하고 난 2년 후였다. 망국의 씁씁함 속에서 그 전해인 1911년 고종은 믿고 의지하던 엄비마저 잃었다. 그에게 순진무구한 어린 자식의 미소는 더할 나위없는 위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41쪽)
②"망국의 옹주로 태어난 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고종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24쪽)
③고종에게 있어서 덕혜옹주 탄생에 대한 혼마 선생의 의미부여(구성, 발상)의 도용.

<2>
①"덕혜가 5살이 되었을 때, 1916년 4월 1일 부왕은 덕수궁 안의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었다." (43쪽)
②"고종은 옹주를 위해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치했다." (27쪽)
③혼마 선생이 덕수궁 내 유치원 설치 사실에 대해 조사로 밝힌 부분을 도용.

<3>
①"이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은 곤도 시로스케의 <이왕궁비사>에 실려 있으며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중략)" (44쪽~47쪽)
②"옹주는 그의 남은 생을 증명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중략)" (28쪽~34쪽)
③유치원에 대한 에피소드 전체 도용.

<4>
①"고종이 우려했던 것은 가장 사랑하는 딸이 아직 왕족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이 덕혜의 입적에 난핵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7쪽) "일본은 한국병합 후 일조일체라는 동화정책을 써서 조선 왕족을 일본인으로 만들어갈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왕족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48쪽)
②"한일합방 이후, 황족을 일본인화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황족이 늘어나는 게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다. 옹주를 황적에 올리는 문제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34쪽)
③혼마 선생이 원저에서 한일병합 후 조선왕족의 일본인화 정책에 대해서 조사해서 밝힌 부분을 그대로 도용.

<5>
①"만 8살 된 덕혜는 매일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세수를 하고, 낙선재로 가서 순종·윤비 부부에게 아침 문안을 드린 후 관물헌으로 돌아가 아침을 먹는다. 그 후 9시 반부터 한효순·민영안·이혜순 세 학우와 함께 스미나가·사사키 두 교사로부터 일본어·산수·작문·그림 등을 배우고, 점심을 마치고 나서는 효덕전에 가서 참배를 한다. 오후에도 학우들과 구기를 하거나 산(비원일 것이다)에 올라가서 놀다가 저녁에 다시 효덕전에 참배하고 10시에 취침한다." (65쪽)
②"옹주와 귀인 양씨는 부왕의 혼령을 좇아 창덕궁 관물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략) 오전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세수하고 소복에 검은 댕기를 하고 낙선재로 갔다. 오라버니 순종황제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볼 때마다 눈물을 보이는 순종 앞에서도 옹주는 의연했다. 문안을 올린 후에는 다시 관물헌으로 돌아와 아침상을 받았다. 입안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깔깔하고 서걱거린다고 하면서도 옹주는 밥상을 물리지 않았다." (77쪽~78쪽)
③덕혜옹주의 관물헌에서의 일상에 대해 혼마 선생이 조사·정리한 것을 발췌 도용.

<6>
①"실은 소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덕혜라는 이름은 없었다.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은 5월초에 정해진 것 같다. <실록>에는 5월 4일에 '복녕당아지에게 호를 내려 덕혜라 하엿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21년 5월 9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정전 동행각에서 이재완·윤덕영·이지용·윤용구 등의 친족이 모여 협의한 결과, 이왕 전하의 결재를 받아 덕혜라는 이름을 일본 궁내성에 상신했다고 되어 있다." (67쪽~68쪽)
②"옹주가 '덕혜'라는 이름으로 황적에 오른 것은 1921년 5월의 일이었다. 순종황제의 형식적인 결재를 거쳐 이왕직 장관 민병석이 일본 궁내성에 상신함으로서 일은 마무리됐다." (124족~125쪽)
③'덕혜' 명명이 일본 황적화 일환이었음을 밝힌 혼마 선생의 조사 내용을 그대로 도용.

<7>
①"유학 때문에 도쿄에 가시기로 정해진 창덕궁 덕혜옹주는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역을 특별열차로 출발하셨다. 수행은 스미나가 통역, 궁년 2명, 하인 1명, 고용인 1명을 합쳐 모두 6명으로, 한 장 기사장이 도쿄까지, 민 이왕직은 대전까지, 시노다 차관은 시모노세키까지, 오야마 히노데 소학교 교장 및 다수의 관심은 수원까지 배웅하였다. 이날 히구데 소학교의 낯익은 친구 100여 명과 관민까지 많은 사람들이 역에서 배웅하였다. 덕혜옹주는 연보라색 가는 비단실로 짠 지리멘 소재의 후리소데에 보라색으로 커다란 장미가 그려진 (하략)" (70쪽)
②"1925년 3월 27일 오전 10시 30분, 경성역에 특별열차가 마련됐다. 많은 사람들이 옹주의 유학을 전송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히노데 초등학교 교장과 100여 명의 학생들도 환송을 나왔다. 환하게 웃으며 전송하는 그들의 눈빛에서 황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이 엿보였다. 연보라색 일본식 비단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덕혜가 사람들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락없는 일본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시종장 한창수, 개인교사 스미나가, 나인 두명, 비서 두명 등 모두 여섯명이 그 열차에 올랐다." (129쪽~130쪽)
③덕혜옹주의 동경유학시 경성역 배웅 장면에 대한 혼마 선생의 조사·정리내용을 발췌 도용.

<8>
①"생각해보면 덕혜는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로 이미 주위에 대한 감정이나 이성도 어른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중략)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 속은 일본의 방식에 대한 화와 분노로 가득차 있었음에 틀림없다." (73쪽) "그리운 고국의 모든 것이 덕혜의 마음속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일본사회와 인간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성과 감정을 그녀는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9쪽)
②"덕혜는 손을 흔들었다. (중략) 기어이 이들을 다시 보고야 말리라. 그게 자신의 운명이요 의무였다. (중략) '이곳이 내 나라다. 내 몸 속에 속속들이 박혀 있는 내 나라의 냄새다.'" (132쪽)
③덕혜옹주의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 및 정서, 민족감정에 대한 혼마 선생의 발상 도용.

<9>
①"점심시간에는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 학습원만의 독특한 놀이로 '토모에갓센'이라는 싸움을 하였습니다. 빨강·흰색·노란색의 어깨띠를 메고 상대방의 깃발을 빼앗는 놀이입니다. 그런 놀이도 같이 해보자고 권유하였지만 교실에 그냥 앉아 계셨습니다." (77쪽)
②"'그래 그래 덕혜님도 같이 하자고 하자.' 덕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모에갓센은 빨강, 흰색, 노란색의 어깨띠를 메고 상대방의 깃발을 빼앗는 놀이였다." (150쪽)
③소마 유키카의 회상을 도용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지메 광경으로 변조. 번역문 그대로 도용.

<10>
①"내가 덕혜님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텐데, 왜 당신은 하지 않나요?'라고 물어도 가만히 계실 뿐이었습니다." (77쪽)
②"그들 중 한 명이 어느날 덕혜에게 물었다. '도쿠에히메, 당신은 왜 여기 있나요? 내가 당신이라면 조선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을 거예요.' 덕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53쪽)
③소마 유키카의 회상을 도용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지메 광경으로 변조. 번역문 그대로 도용.

<11>
①"실제로는 1926-1928년에 해마다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사건과 관련된 귀국이었다." (80쪽) (중략) <흘러가는 대로>에 따르면 1926년 3월 1일, 이은 부부는 서둘러서 경성으로 떠났다. 병으로 요양중이던 순종의 병세가 더욱 악화조짐이 있다고 들었기에 병문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덕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실록>에는 덕혜도 이은 부부와 함께 경성에 도착하여 11일에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덕혜옹주도 동반 (하략)." (80쪽)
②"그러자 어느날 , 마침내 영친왕이 덕혜를 불렀다. '덕혜야 조선에 가자꾸나.' 덕혜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말을 하는 영친왕의 어두운 기색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덕혜는 몰랐다. 순종황제의 병세가 악화됐기 때문에 조선에 다녀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157쪽) "하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고작 일주일이었다. 덕혜는 3월 11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③사실 및 체재기간에 대한 혼마 선생의 조사를 그대로 도용.

<12>
①"이 건물은 순종이 일상생활을 하던 희정당과 대조전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하다. 관물헌은 갑신정변의 무대가 되어버렸지만, 실은 순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이곳에서 1874년 2월 가랑비가 내리던 날 순종을 낳았던 곳이다." (63쪽) "복녕당 양귀인과 덕혜가 옮겨 살았던 관물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종이 태어난 내전의 바로 동쪽에 있었다." (86쪽)
②"관물헌은 여전히 고요하고 적막했다. 황량한 빈 뜰에 바람이 몰려다녔다. 순종황제가 태어난 곳이었다. 지금은 양귀인이 머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57쪽)
③혼마 선생이 관물헌에 대해 조사를 통해 밝힌 부분을 도용.

<13>
①"국장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그런데 덕혜는 빠른 5월 10일 혼자서 도쿄로 떠났다. 오빠의 국장에 참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84쪽)
②"순종황제가 붕어했다. 덕혜는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천지가 내려앉은 고통이 엄습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혜는 순종황제의 마지막 떠나는 길도 보지 못한 채 조선 땅을 떠나야 했다. (중략) 순종황제의 인산일은 6월 10일이었다. 하지만 덕혜는 다이쇼 천황의 병중설로 혼란한 도쿄를 벗어날 수 없었다." (160쪽)
③덕혜옹주의 순종 장례식 불참 배경에 대한 혼마 선생의 조사를 그대로 도용.

<14>
①"(신문에 덕혜옹주의 결혼 상태로 야마시나노(山階宮) 아무개라는 이름이 실린 적은 있다. 황족과의 혼인이 검토되고 있었을지 모른다.)" (148쪽)
②"1926년 8월 3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덕혜옹주의 성혼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는 '궁내성 당국자와 이왕직 당국자들은 덕혜옹주의 御장래에 대하여 비밀리에 고려를 거듭하던 중 요사이에 이르러 결혼상대 御혼담이 농후해간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결혼상대자는 동경제대 문과 3년생 산계궁(山階宮)등려라는 인물이었다." (162쪽)
③덕혜옹주의 결혼상대 후보에 대한 혼마 선생의 조사를 그대로 도용.

<15>
①"덕혜가 막 17살이 된 지 얼마 안된 1929년 5월 30일, 생모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다." (91쪽) "5월 30일, 도쿄에서 부고를 들은 덕혜가 나카가와 여사와 함께 실제로 경성역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 오전 7시였다. (중략) 옹주는 검은 양장에 애통함으로 야위신 몸을 감싸고 (하략)." (92쪽)
②"1929년 5월 30일, 도쿄 영친왕의 저택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165쪽) "'...... 복령당께서 영면하셨다네.' (중략) 5월의 마지막날, 덕혜는 일본을 떠나 창덕궁으로 향했다. 6월 2일 창덕궁에 도착한 덕혜는 더할 수 없이 초췌한 모습이었다." (166쪽)
③덕혜옹주가 생모 양귀인의 장례식에 참석차 일시 귀국한 사실에 대해 혼마 선생이 조사한 것을 그대로 도용.

<16>
①"이것은 옛날 가례(일가의 예의범절)에서는 의례히 3년 복상을 해야 하는 것이 법이지만, 궁내성에서 제정한 왕공가규범에 의하면 복녕당은 귀족이 아니며, 덕혜옹주는 왕공족이기 때문에 복상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93쪽) "<동아일보>는 앞의 기사에 이어 '문제의 초점은 왕공가규범'이라는 제목으로 더욱 자세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왕공가규범> 제186조에 '부모, 남편상은 1년으로 한다'라는 조문이 있으므로 당연히 덕혜는 1년간 복상할 수 있으며, 또 14조에 '서자는 어머니 쪽에만 친자간에 한하여 이를 친족으로 한다'라는 조문이 있다. 양귀인은 친족이면서 어머니이기 때문에 조문대로 읽으면 복상할 수 있다. 그러나 궁내성 및 이왕직 측에서는 같은 규범 193조에 '왕공족은 황족·왕족·공족·조선귀족이 아닌 친족을 위하여 상을 복하지 않음'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복녕당 양귀인은 친족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귀족이 아니므로 덕혜는 복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해결될지 주목된다고 되어 있다." (94쪽)
②"조선 왕실의 전통에 따르면 옹주는 마땅히 3년 복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이 만든 '왕공가궤범'을 들어 '왕공족은 황족, 왕족, 조선귀족이 아닌 친족을 위하여 상을 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64쪽) "동아일보는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는 여론을 전한 뒤 '왕공가궤범' 186조에 '부모, 부(夫)의 상은 1년으로 한다'는 조항과 140조에 '서자는 모방에만 친자간에 한하여 이를 친족으로 한다'는 규정을 들어 해석하기에 따라 복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7쪽~168쪽)
③덕혜옹주가 생모 양귀인의 장례식 때 착용할 상복문제, <왕공가규범> 문제에 대해 혼마 선생이 조사한 것을 그대로 도용

<17>
①"가을에 학교가 시작되어도 가고 싶지 않다며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식사하러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심한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갔는데, 놀라서 찾으려고 하면 뒷문에서 아카시카미츠케 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적도 있기 때문에,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정신과 선생에게 왕진을 부탁하였습니다. 간호사를 붙여 당분간은 오이소 별장에서 정양하게 했습니다. 원래 내성적인 편이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밝고 희망에 찬 말투로 장래에 학교 선생님이 돼서......라고 말을 똑부러지고 씩씩하게 했었는데, 지금은 깜빡깜빡하면서 단지 방에 틀어박혀 있을 뿐입니다. '빨리 건강해지셔서......'라고 침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며 말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마침내는 '조발성 치매증'으로 진단받았습니다." (101쪽~102쪽)
②"중얼대거나, 울거나, 지쳐 있거나, 낙담해 있거나, 평온한 표정을 짓는 날이 거의 없었다. 때로는 밤이슬을 맞고 사라지는 날도 있었다. 덕혜를 가엾게 여긴 마사코가 정성을 다해도 차도가 없었다.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다. 한창 신경이 예민할 시기였다. 건강이 안 좋다는 것은 핑계이기 이전에 사실이었다. 영친왕은 덕혜를 정신병원에 데려가 보기로 결단을 내렸다. 덕혜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정양하기를 권했다. (중략) 영친왕은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덕혜를 오이소 별장으로 보냈다. 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신이 허약해져 있다는 말에도 덕혜는 놀라지 않앗다. 간호사 한 명과 함께 덕혜는 저택을 떠났다." (192쪽)
③덕혜옹주의 발병과 오이소 별장에서의 정양 사실에 대한 혼마 선생의 조사를 그대로 도용

<18>
①"그리고 11시 20분, 백작 저택에 도착. 중매격인 쿠죠 미치자네 공 부처, 오우라 관리인 등의 마중을 받았다. 계속해서 안쪽 방에서는, 한 이왕직 장관, 시노다 차관, 미우라 여사, 센고쿠 소지츠료 총재, 쿠로다 히로유키 자작 등이 참석한 가운데, 11시 25분 대례복을 입은 소 타케유키 백작과 덕혜옹주가 식장에 나아갔다. 이이다바 대신궁 신관의 축사, 쿠죠 공측의 시중을 받으며 신전에서는 339번에 걸쳐 부부의 연을 약속하는 맹세의 술잔을 나누었다." (158쪽)
②"덕혜는 소 다케유키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미우라 공사가 동승하고, 한 조선국 장관과 죠다 차관, 사무관 등이 다른 차로 그 뒤를 따랐다. 11시 20분, 마침내 옹주 일행이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구죠 공작 부부의 영접을 받고 나서야 덕혜는 결혼예복을 입은 소 다케유키와 마주했다. 그때가 11시 25분." (219쪽) "결혼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다케유키와 덕혜, 모두 부모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혼식장엔 쓸쓸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가까운 친족 50여 명이 함께 했지만 모두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이민족과의 결혼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과 친척들은 초대받지도 못했다. 이왕직 고등관들도 정식 통보를 받지 못했고, 여관들도 결혼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220쪽) "1931년 5월 8일. 덕혜는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 다케유키의 아내가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전문이 그날 오후 2시쯤 창덕궁 낙선재에 도착했다." (227쪽)
③결혼식 참석 인사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시노다 차관을 죠다 차관으로 오기. 또 미우라 여사를 미우라 공사로 잘못 오기함. 이 부분은 가공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조사를 하지 않고 표절했다는 결정적 증거임.

<19>
①"그는 덕혜와의 결혼을 강제로 밀어붙여서 한 것이 아니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와의 인연이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41쪽)
②"'고귀한 그대가 일개 대마도 번주의 아들에게 시집온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오. 하지만 어쩌겠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232쪽)
③소 다케유치가 덕혜옹주와의 결혼을 '운명'으로 발아들인다는 혼마 선생의 발상을 도용.

<20>
①"조선시대 왕녀의 결혼식에는 여러 사례가 있지만, 왕녀(공주·옹주)의 지위는 결혼한 후에도 높았다. (중략) 왕의 딸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덕혜옹주의 경우도 조선왕조의 전통에서 본다면, 신중하게 사위를 골라 왕녀로서의 격식이 지켜져야만 했다." (155쪽~156쪽)
②"'당신은 일본이고 나는 조선인이야. 그게 무엇 의미하는지 모르겠어? 그게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모르겠냐고. 지배국의 백성과 속국의 황녀가 그처럼 간단히 섞일 줄 알아?'" (232쪽)
③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이 조선의 전통적 격식에서 어긋난다는 혼마 선생의 발상을 도용.

<21>
①"소 다케유키는 어렸을 때는 쿠로다 다케유키라 불리었다. (중략) 쿠로다 가문은 치바현에 있던 쿠로리번 번주 집안으로 어머니 레이코는 그녀의 오빠가 은거한 후 뒤를 이었는데, 옛 대마번주 소 시게마사의 친동생이었던 유리유키가 양자로 들어와 쿠로다 자작 집안을 계승하였다. (중략) 친아버지 쿠로다 요리유키는 나가사키에서 재판소에 재직하였으며, 나중에 요코하마로 전근을 갔었고, 다케유키가 태어날 무렵에는 도쿄의 요츠야 텐마쵸에 살고 있었다.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외에는 평생을 거실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중략) 그는 1917년 1월, 다케유키가 만 8살 때 65살로 타계하였다." (111쪽) "이렇게 해서 1918년 9월, 다케유키는 만 10살 때 어머니 품을 더나 멀리 대마도 이즈하라로 떠났다. (중략) 불과 10살의 소년에게 그 일의 중대함에 대한 자각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단지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헤아리기 힘든 운명의 전환점을 향해 그는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16쪽~117쪽) "실은 이때 다케유키는 소 다케유키가 되어 있었다. 3월에 양아버지 소시케모치가 죽고 다케유키가 뒤를 이었다. (중략) 1923년 10월, 쿠로다 다케유키는 정식으로 소 문중을 계승하여 백작 소 다케유키가 되었다. 그러나 습작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16쪽~117쪽) "중학교 4학년 10월, 만 열다섯 살 때였다. 그리고 양어머니 히사코는 시게모치가 죽은 같은 해 1월에 이미 타계한 상태였다." (126쪽)
②"다케유키는 진심으로 덕혜와 잘 지내고 싶었다. 그 자신도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구로다 다케유키였다. 구로다는 치바 현에 있는 구로리 번의 번주 집안이었다. 어머니 레이코는 친오빠가 은거한 후 집안의 뒤를 이었는데, 대마도 번주인 소 시게마시의 친동생 요리유키와 결혼했다. 구로다 요리유키는 나가사키 법원에서 근무하다 요코하마로 자리를 옮겼지만 다케유키가 태어날 무렵엔 도쿄에서 살았다. 중의원을 지낸 것 외에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이코와 구로다 모두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 후로 다케유키는 대마도 번주 소 시게모치의 양자가 되었다. 그 때문에 대마도에 정착했는데 양부모 역시 두 달 사이에 잇달아 타계하는 바람에 다케유키는 본인의 의와는 관계없이 가문과 작위를 승계받게 됐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233쪽~234쪽)
③혼마 선생이 조사․정리를 통해 구로다 다케유키의 성장과정을 요약, 도용.

<22>
①"우리들은 당주를 백작님이라 불렀으며, 덕혜사마를 '고젠사마'라 불렀습니다. '고젠'이라는 말은 엣날에는 여성에 대한 경칭으로도 사용되었지만, 메이지 이래 화족의 저택 안에서는 보통 당주에 대한 경칭이다. 그런데도 소 백작가에서는 부인인 덕혜옹주가 '고젠사마'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소지츠료의 지시도 있었겠지만, 아내의 신분이 높은 것을 고려한 호칭이었다고 생각된다." (178쪽~179쪽)
②"'고젠사마, 세숫물을 대령할까요?'" (239쪽) "'고젠사마, 오늘 아침 메뉴는 조선식입니다." (241쪽)
③덕혜옹주의 결혼 후 호칭에 대해 혼마 선생이 취재로 밝힌 부분을 소설가 권비영씨가 취재도 하지 않고 도용.

<23>
①"쿠로다 다케유키가 입학한 것은 당시 화족이 다니는 학습원이 아니라 (중략) 소학교 5학년이 되던 때에 일본 세이비학교로 전학하였다. 일본 세이비 학교란 소 다케유키가 <세이비의 정신>이라는 제목을 붙인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학교에 대하여 '도쿄의 서쪽 근교, 호리노우치의 조사당에서 걸어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日本濟美學校라 쓴 굵은 글씨의 문표가 보인다. 단풍나무와 벚나무, 떡갈나무를 섞어서 조림한 수풀을 지나 작은 개천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청명못의 수면이 반짝거린다. 짧고 급경사가 진 언덕을 오르면 언덕 일대에 잘 정돈된 소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목조의 하얀 학교 건물, 교장 선생님의 사택이 있는 학생들의 기숙사 (중략)'라고 쓰고 있듯이, (하략)" (113쪽)
②"'나는 열한 살 때 대마도로 건너갔소.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지. 그곳에서 키비하라 초등학교에 다녔고, 그 전에는 도쿄의 세이비학교에 다녔는데 그 후로도 늘 그곳이 그리웠소. 단풍나무와 벚꽃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지. 돌다리를 건너면 잔잔한 호수가 있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솔밭 사이로 교장선생님의 목조사택이 보였소. 그 옆에 기숙사가 있었고......'" (256쪽) "도쿄 근교의 풍요로운 자연 속에 위치한 세이비학교는 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다케유키는 유독 그곳을 그리워했다. 부모님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대마도는 (하략)." (257쪽)
③소 다케유키의 소년시절에 대해 혼마 선생이 조사에 의해 밝힌 부분을 도용.

<24>
①"'소 군은 때때로 하늘을 바라다 보듯이 위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인가 보다, 라고도 생각했어요.'" (137쪽)
②"다케유키는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쓸쓸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257쪽)
③표현만 바꾼 도용.

<25>
①"다케유키가 대마도로 갈 때 어머니가 준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림 속에 한 장의 색종이가 있었는데, '성실이란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이요, 성실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라는 <중용>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121쪽)
②"그에 비해 대마도는 늘 쓸쓸한 곳이었다. 백작의 아들로 부러움 없이 살기는 했지만 몸에 밴 진한 추억이 없었다. 그를 지탱해준 것은 어머니가 남겨놓은 아버지의 글이었다. '성실이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요, 성실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 다케유키는 늘 그 말을 품고 살았다." (257쪽)
③문장을 풀어서 도용.

<26>
①"소학교 담임은 코메다 타카타라는 선생으로 '자세에 대해서만 주의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케유키 소년은 키가 훤칠하게 커서 등이 굽은 듯했다. 히라야마 타메타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별명을 잘 붙었는데 다케유키에게는 '하얀 눈에도 견디지 못하고 구부러지는 대나무 도련님'이라 했다고 한다. 자세 이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였던 것 같다." (120쪽)
②"'나는 대마도에서 7년을 보냈소. 초등학교 땐 강마르고 자세가 좋지 못해서 선생님의 꾸중을 자주 들었소. 똑바로 앉으라고 말이오. 친구들은 나를 눈에도 휠 것 같은 대나무 같다고 놀렸지.' 덕혜가 쿠쿡대고 웃었다. '하지만 공부는 아주 잘했다오.'" (257쪽)
③혼마 선생이 취재하여 처음 밝힌 부분을 도용.

<27>
①"<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안개가 걷혀온다 / 아소만의 포구마다 / 고기잡이 어선들이 지금 막 돌아오고 있다 / 새벽하늘은 장밋빛으로 / 시라타케 산을 일찍이도 물들이고 있다 //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 / 남풍에 실려온 쿠로시오 큰 물결 파도소리가" (131쪽)
②"'제목은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라오. 음...... 안개가 걷히는 아소만 포구. 고기잡이 어선들이 돌아오고 있다. 새벽하늘은 장밋빛, 시라다게 산을 물들이고 있다.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 남풍에 실려온 쿠로시오의 큰 파도소리......'" (259쪽)
③번역시 표절. 또 '내 꿈은 대마도로 이어진다'라는 암송 장면은, 소설가 권비영씨가 설정한 대목에서 암송할 시가 아님.

<28>
①"11월 1일 (중략) 오후 1시 여학교 방문시에는 부형회를 대표하여 출두하였다. 일장 연설이있었다. 덕혜 부인의 기념 식수도 있었다. 식수한 나무 가운데 하나는 내가 기증한 것으로, 옛날 다케유키 사마와 세이치를 데리고 시라타케야마에 올라 캐가지고 와서 집에 심었던 오엽송 4그루 가운데 하나이다. 오래오래 번영하기를 기원한다." (165쪽~166쪽) "소 다케유키 부부가 탄 배는 10월 30일 밤늦게 11시 반경, 이즈하라항의 니시하마에 도착하였다. '날씨도 평온하고 달빛도 땅을 환하게 비추어 맞이하러 온 사람들도 최근 들어 드물게 보는 성황이었다'라고 필자는 감격스런 듯이 쓰고 있다. 구번주인 소씨 문중의 당주가 신혼인 이왕가의 옹주를 데리고 대마도를 방문한다. 대마도로서는 대환영이었던 것이다. (중략) 그날 오후 여학교에서 덕혜옹주가 기념 식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히라야마 타메타로는 소씨 문중의 영원한 번영을 빌었다." (166쪽~167쪽)
②"이즈하라항에 모인 사람들은 백작부부를 열렬히 환영했고, 특히나 백작 부인이 조선의 황녀라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정중하고 친절했다. 다케유키는 대마도 여학교에서 연설을 했고 덕혜는 기념식수를 했다. 잘 생긴 오엽송이었다. 다케유키는 그 나무가 잘 자라도록 마음 속으로 빌었다." (260쪽)
③혼마 선생밖에 볼 수 없는 자료이므로 명백한 도용 내지는 표절.

<29>
①"소 다케유키의 일생은 히로이케 학원(치바현 카시와시)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학원의 창설자 히로이케 센구로의 도덕과학연구는 소 다케유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3쪽) "소 다케유키가 히로이케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이 무렵이다. 히로이케는 6년 후에 타계하지만, 소 다케유키는 평생에 걸쳐 도덕교육을 배우고 가르치며 히로이케 학원에서 영어 등을 가르치는 요직에 앉아 학원의 교육활동에 공헌하였다." (175쪽~176쪽)
②"실제로 그는 강의 준비로, 히로이케 선생에게 도덕과학 연구를 사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269쪽)
③혼마 선생이 소 다케유키가 히로이케 선생에게 사사한 사실을 조사한 것을 도용.

<30>
①"7.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 한다. / 한번 사람 맘 속에 들어가면 / 오래 눌러 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199쪽)
②"'제목은 '사미시라'라고 해두었소.' '사미시라 (중략)' '사람 마음 속으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나가지 않는 존재를 뜻한다오. 영혼처럼 사람의 숨결을 타고 와서 머무는 존재요.'" (272쪽~273쪽)
③원저의 '사미시라'라는 시를 시 자체는 인용하지 않고 혼마 선생의 해석을 본문 속에 소설가의 해설처럼 삽입하는 형태로 표절. 번역문 표절.

<31>
①"'그래요! 백작이 목욕할 때 큰 소리로 이길이라는 노래를 부르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노래였어요.' (중략) 그가 목욕탕에서 야마다 코사쿠가 작곡한 하쿠슈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 생략) 이것은 그리운 추억의 노래,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이다. 그에게 이 노래를 가르친 것은 아마도 어머니 쿠로다 레이코일 것이다. 고독한 젊은 백작이 무엇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흥얼거린 것일까. 이 작은 에피소드는 아주 상징적이며 인상깊다." (181쪽)
②"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추우니 몸이라도 따뜻하게 해야 할까. 갑자기 목욕생각이 간절해졌다. 덕혜는 다시 하녀를 불렀다. 물에 젖은 손을 닦으며 미요가 들어섰다. '목욕을 할 수 있겠느냐?' (중략) 덕혜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그녀를 내보냈다. 희미하게 복도를 울리는 그의 노랫소리가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 부르는 노래였다. 그는 지금 어머니가 그리운 모양이다. 그러나 나만큼 어머니가 그리울까. 덕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273쪽)
③村邦志에 대한 취재를 통해서 밝힌 부분임.

<32>
①"1939년 3월에는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해 9월, 유럽에서는 독일의 폴란드 침입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1940년 11월, 그는 도덕과학전공학교의 강사를 사임한다. 그리고 12월부터 자택연수에 들어갔다고 한다. <슌다이라쿠>에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자택에 틀어박혀 있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쓴 한 구절은 이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왜 틀어박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85쪽) "1942년 여름, 다케유키는 마사에를 데리고 코후 근교의 오비나 산을 넘어 쇼유센쿄 협곡으로 놀러갔다. 또 닛코에서 오다지로가와라를 거쳐 유모토에 머물면서 콘세이 고개를 넘었다. (중략) 이 시가 작성되기 전인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식량난 시대에 접어들었다. (중략) 마사에도 그 후 성장하면서 등산을 좋아하게 된다." (247쪽~248쪽)
②"다케유키는 학교강사도 그만두었다.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세상은 어수선한데 다케유키는 오히려 한가롭게 정혜를 데리고 등산을 다니거나 산책을 즐겼다. 정혜를 덕혜 옆에 두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 자신도 덕혜를 점점 멀리했다." (319쪽) "1942년 여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정혜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면 늘 서재에 틀어박혀 있던 다케유키가 모처럼 말을 걸어왔다. '마사에가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바람이나 쐬어주려고 하오.' '어딜 가려고요?' '고후 근처의 대명산이나 다녀올까 하오. 다행히도 마사에도 등산을 좋아하니. (중략)' '그렇군요. (중략) 정혜의 기분이 풀린다면 그리 해야지요.' 덕혜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닛꼬를 지나 고다요카 언덕을 거쳐 하루 숙박하는 코스로 잡을까 하오.'" (320쪽)
③태평양전쟁 이후 다케유키의 생활상을 발췌 도용.

<33>
①"이런 가운데 메구로쿠의 소 백작 저택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재를 겨우 모면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습경보가 하루종일 울리는 매일 매일,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는 덕혜 옆에서 시중을 들며, 경보가 울리면 방공호로 데리고 피난시켜야 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새 날개 소리'라는 문장에, '밤중에 또 자다가 깼다. 우르르르꽝이라고 울리는 요란한 소리, 잠이 갰다. 보았다. 밖이 밝다. 조명탄인가. 예고없는 폭격인가라고 놀랬지만 정말은 천둥소리. 전쟁의 악몽은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라는 것은 그의 공습체험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들 숫자도 줄어든 저택에서 그는 덕혜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었을까." (188쪽)
②"1945년 4월 도쿄 첫공습이 발발했다. 메구로 구의 소 백작 저택도 공습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우르르 쾅쾅'하는 소리가 들렸고, 시도 때도 없이 조명탄이 터졌다. 사람들은 공습경보만 울리면 목을 움츠린 자라 같이 지하방공호로 몸을 숨겼다. 다케유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배는 힘들엇다. 공습경보가 울려도 아무 반응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덕혜 때문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번번이 방공호로 몸을 숨기흔 것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320쪽)
③동경공습시의 소 다케유키 저택 안의 모습에 대해 혼마 선생이 조사·정리한 것을 권비영씨는 전혀 조사를 하지 않고 폭발음의 위치까지 거의 도용.

<34>
①"공습을 피해 마사에가 시오바라로 피난 간 것은 이해 여름이다. <학습원 백년사>에 따르면, 8월 23일, 여자학습원 생도 212명을 교직원이 인솔하여 니시 나스노의 시오바라로 집단 피난을 갔다." (187쪽) "그리고 7월 말, 마침내 그도 소집을 당했다. 덕혜를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겠지만 부득이한 일이었다. 그는 육군 독립 제37대대에 입대하여 카시와 83부대에 전속되었다. 군대경험이 없는 그는 2등병이었다." (188쪽~189쪽)
②"그러는 사이 여자학습원의 집단 피난이 결정됐다. 정혜가 먼저 시오하라로 떠났다." (321쪽) "대공습 시기가 되자 다케유키에게도 소집명령이 떨어졌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떠다는 그는 어쩔 수 없는 대일본제국의 병사였다." (321쪽~322쪽)
③혼마 선생이 마사에의 집단피난, 소 다케유키의 소집영장에 의한 입대 부분에 대해 조사·정리한 것을 권비영씨는 전혀 자료조사를 하지 않은 채 도용. '시오바라'라는 지명은 원래 '시오바라'임. 권비영씨는 이것을 도용하면서 '시오하라'로 오기함. 이는 표절의 결정적 근거임.

<35>
①"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패전을 계기로 사회는 급변했다. (중략) 신헌법 제정을 비롯한 변혁의 물결이 이 가족에게는 결국 화족제도의 폐지로 다가왔다. 그 물결을 그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중략) 무조건 항복에 따라 대일본제국은 붕괴하였다. GHQ 지령 하에서 재벌해체, 농지개혁 등의 민주화 정책이 단행되었고, 또 새로운 헌법 제정작업이 시작되었다."(217쪽) "이 일본국 헌법은 (중략) 제14조는 (중략) 1884년 이래 계속되어 온 화족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소 다케유키는 그 자신의 백작이라는 신분, 특권의 박탈을 의미하는 신헌법을 냉정하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중략)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온 신분제도의 폐지에 그렇게도 담담하게 이성으로 대처했던 화족의 당주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헌법 공포에 이어 11월 12일, 재산세법이 공포되었다." (219쪽~220쪽) "1946년 정월은 소 백작가 세 가족이 키미메구로 저택에서 모두 함께 맞은 마지막 정월이 되었다. 재산세법에서 정해진 재산세를 납부하기 위해 다른 많은 황족․화족과 마찬가지로 소 백작 저택을 매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220쪽)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490개 가문에 달하는 화족은 그 작위와 재산상의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재산세는 같은 해 2월 15일까지 신고하여, 3월 15일까지 납세해야 했다. (중략) 소 백작가의 카미메구로 저택도 재산세를 지불하기 위해 매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31년 가을 이래 약 15년에 걸친 부부의 생활공간이기도 했으며, 마사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 실은 그 재산세에 따른 저택의 매각이야말로 다케유키가 덕혜를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직접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221쪽) "전쟁 중의 재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 집을 잃고 급하게 만든 조악한 가건물에서 살던 시대이다. 어떤 연줄로 이 집을 찾아냈는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옮겨온 그 집은 집 자체를 둘러싼 환경도 카미메구로 저택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백작이 아닌 한 시민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집에서 덕혜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간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사람손이 부족하였다. 한참 전쟁을 치를 때부터 사람손이 모자랐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어떤 화족의 집에서도 사용인들의 숫자가 한꺼번에 1/10 정도로 줄어들어 버린 것 같다. 그의 생활수단은 히로이케 학원에서의 근무였다. 전쟁 전부터 그의 인생을 정신적으로 지탱하게 해주었던 이 일은 그 자신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그는 무척 바빴다. 마사에는 아직 중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무렵 덕혜의 증상은 잘 모르겠지만,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집안에서 덕혜를 계속 간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해서 1946년 가을(추정), 덕혜는 도쿄의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마츠자와 병원은 지금의 케오센 야와타야마역 근처에 있다. 도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도립정신병원이었다." (223쪽~224쪽)
②"결국 일본은 패망을 선언했다. 다케유키는 그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예견했던 일이기도 했다. 야마토 운운하는 다른 사내들처럼 영웅심을 지닌 것도 아니기에 그의 절망은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는 종종 허둥대고 두려워했다. 그가 두려워한 건 앞으로 견뎌내야 할 변화들이었다. 특히 사회개혁에 대해 극도로 불안감을 느꼈다. 군국주의를 일소하는 사회개혁이 착착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화족제도가 없어졌고, 천황의 직계형제들만 남겨두고 나머지 근친들은 평민신분으로 격하됐다. 황족과 화족에게 엄청난 재산세를 부과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렇게 되면 다케유키도 막대한 세금을 감수해야 했다. '세금을 감당할 수 없으면 작위를 버리라는 무언의 압박이군.' 백작입네, 하고 품위를 지키며 살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경제적으로 보조해주던 이왕직 장관 한창수도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빚은 눈덩이처럼 쌓여가는데 해결할 방도는 없었다. 다케유키는 골치가 아팠다. '이제 저택을 파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 너른 정원을 바라보면 그는 결심을 굳혔다. 지금까지 견뎌온 것도 용한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집을 처분한 후의 형편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귀족으로서 누리던 풍족한 생활도 포기해야 하고 하인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덕혜가 큰 골칫거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살갑지 않은 모녀다. 정혜가 하녀도 없는 집안에서 덕혜를 살뜰히 보살필 리 만무했다. 형식적으로나마 황족 대우를 해줬던 것도 이제 끝났다. 이 현실을 덕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는 궁금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덕혜가 일본의 패배를 은근히 속으로 즐긴다는 걸." (324쪽~325쪽) "1946년 가을. 다케유키는 저택을 팔고 시모메구로의 조그만 집으로 이사했다. 하인들도 모두 내보냈다. 집을 줄여야 했고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패전의 현실은 사람들의 일상을 뿌리째 흔들었다. '저 여자를 어찌하나?' 다케유키는 덕혜를 바라보며 혼자서 고민했다.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도 없고 정혜는 아직 중학생이었다. 집도 좁았다. 계속 덕혜를 간병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사사건건 부딪히는 딸과 어머니라니. 다케유키는 고심 끝에 덕헤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일도 하지 않고 그녀 곁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여력이 있다 해도 마음에도 떠나 보낸 여인을 온전히 간병하기는 어려웠다. 다케유키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무도 몰래 당분간 덕혜를 입원시키자고 결심했다. '잠시만이다.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데려오는 거다.' 그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마츠자와 병원으로 덕혜를 데려갔다.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덕혜와의 인연이 그렇게 끝나게 될 줄은 그때의 다케유키는 알지 못했다." (338쪽~339쪽)
③혼마 선생이 덕혜옹주을 입원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패전 직후의 상황을 일일이 조사·정리·고찰한 부분을 권비영씨는 전혀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요약 도용.

<36>
①"이 시의 제목이 시집 전체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시집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호호데미와 토요타 마히메의 만남과 이별, 곧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그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덕혜옹주가 시인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친 여성이었는지를, 그는 여기에서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남몰래, 그렇지만 확실하게 기록해 놓았다. 시집 <해향> 출판은 1956년으로, 서문에 따르면 그 전해인 1955년 10월에는 편집이 끝나 있었다. 덕혜와의 이별은 같은 해 6월. 아마도 이별 직후 그는 시집 편찬을 결심하였으며, 재혼 전에 편찬을 완료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소 다케유키에 대한 인식을 뒤집을 만한 것이 이 시집에는 남아 있다." (213쪽~214쪽)
②"'당신에게 바치는 시요.'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시를 썼다. 그의 시 속에 덕혜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살아있는 그녀에겐 깃들 수 없었다. 한때 그는 깊고 다정한 눈으로 덕혜를 응시했었다. 덕혜도 그에게 엷은 미소를 보여주곤 했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은 서로에게 머무를 수 없었다."(378쪽) "다케유키는 덕혜를 보고 온 후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원고가 그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시집을 내기로 작정하고 원고를 손질하는 중이었지만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각을 떨치듯, 다케유키는 밀쳐둔 원고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해향의 초고였다." (379쪽)
③시집 <해향(海鄕)>의 편집시기에 대한 고찰을 그대로 도용.

<37>
①"한회 호호데미는 생각한다 // 그 사자가 보낸 신은 어쩌면 해신 그 사람이었을까" (191쪽)
②"한회 호호데미는 생각한다 // 그 사자가 보낸 신은 어쩌면 해신 그 사람이었을까" (379쪽-380쪽)
③권비영씨가 설정한 대목에서 암송할 시가 아님. 번역시 표절.

<38>
①"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중략)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191쪽~192쪽)
②"그리운 아내여. /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 아래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380쪽)
③권비영씨가 설정한 대목에서 암송할 시가 아님. 번역시 표절.

<39>
①"이 시는 <코지키>의 야마사치 히코와 토요타마히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야마사치 히코는 산에서 사냥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고, 형인 우미사치 히코는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야마사치 히코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싶어져 형의 낚시 바늘을 빌려 바다로 나갔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귀한 낚시 바늘까지 잃어버렸다. 그런데 낚시 바늘을 되돌려주지 못하는 것을 형인 우미사치 히코가 아무리 해도 용서해주지 않기에 걱정하던 나머지 야마사치 히코가 바닷가에서 울고 있자, 시오쯔치의 신이 와서 까닭을 묻고는, 악어를 따라 바다 속 궁전으로 가서 문 옆의 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야마사치 히코는 가르쳐 준대로 바다 속 궁전 문 가까이에 있던 샘 옆의 향나무 위로 올라가 물 길러 온 시녀의 물통에 가지고 있던 구슬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 토요타마히메와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사랑으로 맺어진다. 토요타마히메는 해신의 딸로 야마사치 히코는 해신의 사위가 되어 3년을 보내지만,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찾은 후 지상으로 돌아가 그를 괴롭혔던 형 우미사치 히코를 복종시키게 된다. 그곳에 그의 아이를 가진 토요타마히메가 출산을 위해 해변으로 올라와 무사히 남자아이를 낳지만, 남편인 야마사치 히코가 아이 낳는 산실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그녀는 갓난아이만 남겨두고 해궁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이별로 끝난다." (192쪽~193쪽)
②"'코지키에 나오는 토요타마히메는 해신의 딸이라오. 아주 먼 옛날, 호호데미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지. 형의 낚시바늘을 빌려 바다로 나간 호호데미는 오히려 낚시바늘만 잃어버린 채 돌아왔지. 형은 불같이 화를 냈고, 호호데미는 바닷가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소. 그때 신이 나타나, 악어를 타고 바닷속 궁전으로 들어가서 문 옆의 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면 낚시바늘을 찾을 수 있다 일러주었소. 그런데 호호데미는 그만 그곳에서 물 길러 오는 시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고 말았지. 그녀가 해신의 딸 토요타마히메라는 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눈멀어 3년 동안 사랑을 나누던 호호데미는 어느 날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떠올리게 되었소. 그는 해신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잠깐 오게 되었지. 그때 그의 아이를 가진 토요타마히메도 출산을 위해 해변으로 갔소.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지. 절대로 자신이 아이 낳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그렇지만 너무도 궁금했던 호호데미는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소. 그를 닮은 남자아이를 낳은 토요타마히메는 분노하여 갓난아이만 두고 해궁으로 돌아가 버린다오. 그들의 사랑이 끝난 것이지. 그날 당신이 내게 토요타마히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 대, 나는 까닭모를 두려움을 느꼈소. 그것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당신은 내게 해신의 딸과 같았소. 내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고귀하고 신성한 여인. 당신이 나의 토요타마히메였고. 운명의 바퀴에 짓눌려 당신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대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소." (381쪽~382쪽)
③시가 <고지키(古事記>의 내용을 바탕으로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혼마 선생의 해석 전체를 도용.

<40>
①"1955년 이혼한 덕혜는 새로 호적을 만들었다. 어머니쪽 성을 따라 양덕혜가 되었다. 이것은 <흘러가는 대로>에 씌어 있는 것으로, (중략) 또 하나 뒷날의 일이지만, 양덕혜는 일본 국적인 채로 재일한국인이라는 신고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덕혜옹주는 이혼했어도 한국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243쪽) "히라야마 집안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이혼했을 때 소 다케유키는 이왕가에서 보내온 혼례물품들을 모두 반환했다고 한다. 이은 부부는 1952년 4월 말에는 덴엔쵸후로 이사하게 되는데 반환된 물품들을 보관해 둘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당시 분카 여자단기대학의 학장이었던 토쿠가와 요시미와의 관계도 있어서 분카 여자대학의 복식박물관에 기증하였다." (239쪽)
②"덕혜는 이혼을 했기 때문에 호적상으로 양덕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남자와 결혼해서 일본 국적을 얻은 탓에, 이혼한 후에도 재일한국인의 신분으로 복원될 수 없었다. 소우 덕혜도, 이덕혜도 아닌, 양덕혜. 얼마나 쓸쓸한 존재인가. 영친왕 부부도 왕족으로서의 권한이 없어지고 재일한국인으로 등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옹주의 성씨가 바뀌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이혼한 후 덕혜가 쓰던 대부분의 물품도 영친왕에게 전해졌으나 그도 덕혜의 물품을 보관하기 어려워서 이곳저곳에 기증하거나 나누어 보관했다고 한다." (388쪽)
③덕혜옹주의 이혼 후 바뀐 성 경위에 대해 혼마 선생이 조사·정리한 것을 권비영씨는 전혀 자료조사를 하지 않은 채 도용.

<41>
①"시집 <해향>은 다음해인 1956년에 출판되어, 그 기념회가 6월 2일 쇼유 회관에서 열렸다. 소 다케유키 부부와 함께 마사에도 출석하였다. 고 키타하라 하쿠슈 부인도 초대받았다. 동석했던 히라야마 칸지의 축하인사에, 마사에는 '아버지도 이번 출판을 아주 기뻐하고 계십니다'라고 딸답게 똑부러지는 인사를 했다고 한다." (256쪽)
②"오랜만에 복순을 찾아온 요코는 가방에서 시집 한권을 꺼내 내밀었다. '해향'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겉표지에 소 다케유키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중략) '출판회도 열었다는데 그 딸이 와서 축하를 했다나 봐요. 그런 데 왜 그녀는 한번도 엄마를 찾지 않는 거죠?' '글쎄요.'" (389쪽)
③혼마 선생이 조사를 통해 시집 <해향>의 출판기념회 사실을 밝힌 것을 도용.

<42>
①"'한회'라는 시는 고대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마음을 빌려, 덕혜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196쪽) "마사에는 대학시절에 알게 된 스즈키 N씨와의 결혼을 희망하고 있었다." (253쪽) "그해 가을쯤, 소 다케유키는 재혼하였다. 마사에의 결혼과 다케유키의 재혼은 그다지 간격을 두지 않고 치러졌던 것 같다. 아직 전후관계가 확실히 정리되지 않지만, 아마도 마사에의 결혼이 먼저 치러지지 않았을까.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마사에처럼 젊은 여성의 심리로 봤을 때, 아버지가 재혼하기 전에 먼저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결혼도 정해졌고, 먼저 나가는 것이 아버지와 새 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255쪽) "마사에가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정도 지난 1956년 8월이었다. 8월 26일 아침,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유키가다니 자택을 나간 채 소식이 끊겼다. (중략) '야마나시켄 아키나기 코마가다케 방면에서 자살한다'라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고 가출, (중략)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의 현 경계에 있는 코마가다케는 표고 2966미터, 아카이시 산맥(남알프스)의 북동부를 차지하는 험준한 웅봉이다." (256쪽~257쪽)
②"시집 <해향>에는 '한회'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한가한 날의 그리움이라는 뜻이었다. (시 생략)" (389쪽~390쪽) "그 사랑스런 아내는 다름아닌 덕혜일 터였다. 시집 속에는 아내를 향한 사랑이 절절한데 정작 현실의 그는 아내를 떠났다. 건너들은 얘기로는 다케유키와 덕혜가 이혼하던 해, 정혜도 스즈끼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다케유키의 재혼을 앞두고 서둘러 한 티가 났다. 물론 덕혜는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년 후 정혜가 일본의 험준한 산 고마카다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쓴 후 종적을 감췄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390쪽~391쪽)
③소 다케유키의 시 '한회'가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는 혼마 선생의 해석을 도용. 마사에의 결혼 시기, 상대, 자살, 자살 이유에 대한 혼마 선생의 견해를 도용.

<43>
①"바람 불지 않는 계수나무 가지에 / 파도 치지 않는 선창의 바깥 / 구름은 바닷속을 파고들고 / 물살도 급히 흘러가는데 // 사랑스런 아내요, 울려요. 수많은 새들이 날갯짓을 하는구려 (중략) / 사랑스런 아내여 / 떠나지 말아줘요 / 사랑하는 자식들을 우리가 품어야 되리" (390쪽)
②"한회 호호데미는 생각한다 // 그 사자가 보낸 신은 어쩌면 해신 그 사람이었을까 / 바람에 살랑거리는 긴 수염을 풍성하게 늘어뜨리고 / 그는 제법 노인처럼 빙긋 웃었다 / 저 너머 바다에는 보이는 건 상어일까, 나는 작은 배를 타고. // 치히로의 깊은 치쿠라 앞바다로 상어는 지느러미를 팔랑거리며 깊은 바다속으로 / 쑤욱 미끄러져 들어갔다. / 바람이 갑자기 인다. 그 해궁의 문 옆 향나무 가지에. // 파도가 쳐 올라온다. 내 배가 있는 곳간 밖까지. / 바다 위로 흰 구름이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 밀물도 북쪽으로 서둘러 흘러간다. / 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 많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개치고 있는가. /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마저 끊어져 /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있을 뿐이오." (191쪽~192쪽)
③원시 '한회' 무시한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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