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77회)

산홍아, 산홍아 <2>

등록|2010.10.05 09:59 수정|2010.10.05 09:59
한량들이 기방을 찾아가 흥그러지게 노닥거리는 '기방 12가사'는 <현녀경(玄女經)>과 <석실비록(石室秘錄)>이 어우러지는 '기방 12잡가'의 중간층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유산가를 비롯해 적벽가, 제비가, 집장가, 소춘향가, 선유가, 형장가, 평양가, 달거리,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등이 그것으로 이 노래들은 가야금 반주에 맞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묘미를 이룬다.

'기방 12잡가'는 기생들이 부르는 가곡창에 비해 '격(格)'이 낮다는 말이 있어 크게 유행하진 않았으나 잡가에 어우러지는 기생의 춤사위는 아찔한 은근스러움에 가슴이 서늘했다. 그 춤사위는 불교의 성악곡을 변주한 곡이었다.

<악장가사>에 전하는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의 변주곡이 흥그러지게 수놓아지면 한량들은 하나같이 손뼉을 치며 운을 맞춘다.

"금현(琴絃)을 쳐라, 금현을 울려라!"
"관산지월(關山之月) 넘나들며 금현을 울려라!"

둥기당당! 둥기당당! 북이며 장고, 대금, 해금이 와그르르 울어대고 금보요(金步搖)를 뒤꽂이로 장식한 기녀가 한 마리 나비처럼 사뿐히 나타나 '기방 12잡가'의 막을 올린다.

춤추는 기생들은 머리에 수건 매고
웃영산 늦은 춤에 중영산 춤을 몰아
잔영산 춤을 추니 무산(巫山) 선녀 내려온다
배 떠나기 북춤이며 대무 남무 다 춘 후에
안 올린 벙거지의 성성전(猩猩氈) 중두리에
주먹같은 밀화증자 매암이 새겨달고
갑사군복 홍수달아 남수 화주 긴 전대를
허리에 잔뜩 매고 상모단 노는 칼을
두 손에 빗겨쥐고 잔영산 모든 새면
항장의 춤일런가 가슴이 서늘하다

이 곡은 변주된 '영산회상곡'이다. 정약용도 성균관 시절 술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기방에 들린 적 있어 아슴하게 생각나는 부분이 있었다.

'영산회상곡'은 '영산 일곱 보살'을 노래한 곡이다.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은 웃영산 늦은 춤, 중영산 춤, 잔영산 입춤, 배떠나기 북춤, 대무, 남무, 검무 등이다. 남무는 기생이 쪽빛 창의를 입고 추는 춤이고 대무는 남녀가 함께 추는 춤이다. 정약용이 고개를 들었다.

"산홍이가 이 서찰을 보내며 하는 말은 없었으냐?"
"소인은 아가씨가 기방에 팔려올 때부터 함께 지냈습니다만 날마다 울음이었지요. 아가씨 부친께선 친구의 꼬드김에 빠져 장삿길에 나섰다가 쫄딱 거지가 돼 빚을 청산치 못하자 목숨을 버렸고 산홍 아가씬 기방(妓房)에 팔려가는 신세가 됐지요."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구먼."
"그 당시 삼화루에서 기녀들을 조방(助房)하는 작자가 바로 민홍섭이었습니다."

창루나 기방에서 잔심부름 하는 사람이 조방꾼이다. 색주가에 가면 자연스럽게 기생에 빌붙어 사는 사람이 있기 마련으로 그들은 기생의 뒤를 봐주고 그녀들을 관리했다.

정약용을 찾아온 행랑아범 같은 이도 있었고 기방을 찾아오는 오입장이들에게 기생을 연결해 주는 거간꾼도 있었다. 다시 말해 민홍섭은 산홍이가 나타나기 전만 해도 삼화루에서 뒹구는 거간꾼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족보를 사고 벼슬길에 나간 비밀을 산홍이 알려온 것이다.

민홍섭이 기루(妓樓)에서 생활할 때는 '벙어리 조방'이었다. 기방에 들어오기 전엔 음란서생으로 이름을 날린 그가 서른을 넘겨 삼화루에 들어와 저승길이 머지않은 어느 대감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나는 정순왕후를 측근에서 모시는 사람이네. 듣자하니 자네 소원이 양반이 되는 것이라던데 자네에게 그걸 이룰 만한 재간이 있는가?"

민홍섭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으로 믿고 남생이처럼 바짝 엎드려 상대방이 뭘 노리는지를 탐색했다.

"대감마님께서 소인을 거들어 주시면 뭣인들 못 이루겠습니까. 소인은 조방꾼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연로한 내가 회춘할 수 있도록 삼화루에 들어온 아이 중 초야권(初夜權)을 치를 물건이 있던가?"

"아, 있습지요! 몇일 전 심상치 않은 노래가 들리는 바람에 깜짝놀란 일이 있었는데 그건 산홍이란 아이가 기방에 들어온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미색인지 어느 묵객이 시 한 수를 끼적여 웅얼거리자 그게 기방 안에 퍼진 모양입니다."

'아는가?' 하고 묻지 않았지만 상대의 눈길에 호기심이 묻어나자 민홍섭은 묵객이 끼적인 시구를 읊조렸다.

오입장이 놈들이
붙어 앉아 돌아가지 않을 때
주렴너머 언뜻언뜻
꽃그림자 아른거린다

물론 이 시구는 민홍섭 그가 심심파적으로 쓴 내용이었지만 시치미 뚝 떼고 남의 얘기인 양 들려줬다. 그 내용은 행랑아범이 놓고 간 사연 속에도 있었다. 민홍섭이 삼화루에서 일 할 때는 일절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손가락과 꽃을 이용해 상대의 의중을 묻는 방법을 사용했다. 몇일 전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황혼무렵 미인 한 사람 있었다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손가락을 해처럼 오므리고
눈길은 서쪽을 바라보았네

사람을 만나
홀로 꽃가질 잡고 웃으니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글자없는 수수께끼를 짐작하누나

손가락과 꽃을 사용해 상대의 마음을 묻는 내용이 암호처럼 은밀하지만 이것이 신호가 돼 상대에게 전해진다. 혹여 다른 사람이 볼새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고객에게 보내는 시선이 조방꾼 민홍섭의 특기로 알려진 일이었다.

말을 하지 않고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므로 붙여진 별명이 '벙어리 조방'이었다. 몇일 전 그는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부잣집 자제들에게 서찰을 보내 슬쩍 충동질했다.

"사흘 후 우리 기방에 오십시오. 천하에 다시없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왔습니다. 두 번 보기 어려운 그런 미인과 초야권으로 만리장성 쌓는 비용이 고작 열 냥입니다."

'고작'이란 말이 붙었지만 열 냥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것 도 열 사람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글을 보내 열 냥씩 받아 모두 백 냥을 챙겼으니 이 돈이면 한양 땅에서 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오입장이들이 전연 눈치를 채지 못한 건 모든 약속을 각자 다르게 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국지색'에만 마음이 쏠려 단꿈 꿀 채비만 한 것이다.

약속한 밤이 되자 오입장이들이 하나 둘 기생집에 나타났다. 창문은 기름칠을 한 탓에 보기에도 깨끗했고 창호지를 뚫고 퍼져나간 등불빛은 맑고 고운 그림자를 내비쳐주었다. 적지 않은 액수를 내고 약속한 절세의 미인이 자신을 기다린다 생각하니 달콤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과 약속했을 것으로 여긴 기생방엔 자신 외에 아홉 명이나 되는 오입장이들이 찾아왔지 않은가. 그들은 제각기 마음속으로 좋지 않은 상황을 짓씹었다.

'아니, 이게 웬일이야. 오늘같이 좋은 날 기방 안에 웬놈의 떨거지가 아홉이나 더 있나. 이 작자들이 어르신의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기방에 온 오입장이들은 저마다 그런 생각을 했을 터이지만, 민홍섭은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인상을 쓰고 욕지거릴 퍼부으며 들어갔다 나갔다 좌불안석이었다. 누군가 그를 본다면 용코로 걸렸다고 좋아할지 모른다.

오입장이들과 약속한 일이 있어 한시바삐 그들의 뜨거운 마음을 식혀줘야 하는 데 아홉 명이나 손님들이 밀어닥쳐 속이 탄다는 표정이었다. 어서 빨리 그들이 자리를 떠나야 껄쩍지근한 일을 벌릴 수 있다는 점에 미워하는 마음을 꾸욱 누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날이 새버렸다. 천하를 깜짝 놀라게 할 경국지색의 미인과 하룻밤 이층을 쌓으려는 오입장이들의 기대는 날이 새는 것과 함께 물거품이 돼 버렸다.

하룻밤 용을 쓰다 열 냥의 큰 돈만 날리자 민홍섭은 자신이 애썼지만 보다시피 일이 틀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막걸리에 깍두기 안주를 내어와 한 잔씩 마시게 한 후 돌아들가라 너스레를 떨었다.

"자, 자! 날이 밝았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오늘만 날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내일도 해가 뜨고 밤엔 달이 뜹니다. 그러니 다음을 기약하고 어서 돌아가세요!"

그때까지 열 명의 사내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각 자가 구렁이 알같은 열 냥의 돈을 버렸어도 언젠가는 천하절색의 미인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소문나기엔 상당히 시일이 걸렸지만 돈을 건넨 오입장이들은 재수가 없어 구정물을 쓴 것이라 대수롭잖게 여겼다. 그러나 육의전 포전행수만은 달랐다. 자신의 아들이 당한 소문을 듣자 서사(書寫)를 보내 민홍섭을 불러들였다.

"자네가 양반이 돼 벼슬길에 나가고 싶단 소문을 들었네.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자넬 불렀지. 계집을 미끼로 열냥씩을 손님들에게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 그 재주를 사모해 불렀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총애하는 기생이 다섯이네. 모두들 육의전 포전행수인 내가 자기만을 좋아한다고 믿고 있지. 그것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기생년들 잔치를 하고 싶네만 고것들이 오려고 하지 않을 게야. 어떤가, 자네가 기생들을 한자리에 불러 나를 흡족하게 해준다면 자넬 대비마마께 천거해 주겠네. 그리되면 벼슬길에 나가는 건 일도 아니지. 어떤가, 하겠는가?"

[주]
∎조방꾼 ; 기생에게 빌붙어 사는 인간
∎금보요 ; 기녀들이 비녀처럼 쓰는 뒤꽂이
∎서사(書寫) ; 육의전의 심부름꾼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