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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78회)

산홍아, 산홍아 <3>

등록|2010.10.08 11:15 수정|2010.10.08 14:20
벽파(僻派)의 늙은 너구리 청을 들어주자 민홍섭의 바람대로 모든 게 이뤄졌다. 기생들을 불러 잔치를 한 것은 그의 생각이라고 보기 힘들었고 선대왕 때의 일화를 근간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그때도 김억(金檍)이란 사내가 호방하고 사치스런 일을 벌렸었다.

돈냥이나 있는 데다 천성이 사치해 기생들을 모아 창(唱)을 듣고 여색을 즐기는 게 취미이자 생활이었다. 색깔이 화려한 옷을 걸치고 여러 모양의 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데다 구슬과 자개를 모양나게 칼집에 박아 장롱 속에 걸고 날마다 눈요기 삼아 하나씩 바꿔찼다.

장롱 속의 칼은 너무 많아 하나씩 바꿔차도 1년 안에 다 찬다는 건 어림없었다. 그에겐 총애하는 기생 여덟 명이 있었다.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여덟 명의 기생을 불러 술을 마셨으나 기생들은 그곳에 온 기녀들이 누군지를 몰라 여덟 명이 자리를 같이하고도 상대방을 투기하지 않았다. 기방 출입이 잦은 사내가 자신들을 속인다고 믿지 않은 탓이었다.

민홍섭이 자신의 권모술수로 늙은 너구리의 청을 말끔히 처리한 것은 기생이 골탕 먹은 일로 사대부들의 마음을 울큰불큰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늙은 너구리가 입맛 다시는 일이 또 있었다.

"기방에 새로 들어 온 아인 어디서 구했는가?"
"그 아이 부친이 장삿길에 나섰다가 쫄딱 망하자 기방에 팔려왔습니다. 그 사연을 말하자면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호, 그 일에 자네가 관여됐는가?"
"그렇습니다. 절세의 미인으로 소문난 그 아인 이름을 산홍이라 하는 데 춘보(春甫)란 이의 딸입니다. 계집아이 사주가 높아 어떤 사내건 가까이 하면 장수를 누린다 하여 소인이 삼화루에 데려왔습니다."

"춘보는 어떤 일을 했는가?"
"장사지요."

"장사?"
"예에. 소금장삽니다."

가만히 눈 감은 그의 뇌리 속에 지난 일이 물새처럼 떠올랐다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서른이 되었을 그 해 여름의 일이었다.

"한 달 후에 장마가 온다는 데 어쩌면 좋겠는가. 지금 장안엔 곳곳마다 소금이 부족해 난리잖은가.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서너 달은 소금을 구하지 못할 것이니 서둘러 소금을 한양으로 옮겨와야 큰 돈을 벌 수 있네."

춘보는 장삿길로 잔뼈가 굵어서인지 사태를 예견하는 촉각이 남달리 발달해 있었다. 향시에 응시할 정도로 학문이 있었지만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장삿길에 팔을 걷고 나선 상태였다.

"겉만 번드르 하면 뭐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사내라면 천하를 흔들 권력이 있거나 재물이 있어야 하는 게야."

이것이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에 돈을 버는 데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이번 일에 관해 민홍섭의 생각은 달랐다.

"장사는 한 푼의 이익을 보고 십리를 간다 했네만 이번 일은 다르네. 첫째는 우기(雨期)란 점이야. 지금은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며칠 후면 비가 올 지 모르네. 소금에 물이 스며들면 금방 녹아버리니 위험천만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둘째는 소금을 가져오는 기간이 한 달이나 걸린다는 점이야. 멀리 남해안에서 한양으로 소금을 실어오는 도로 사정이나 날씨 탓에 한양까지 물건을 실어오는 기간이 길면 중간에 장마를 만날 위험이 따른단 말이야. 무엇보다 운송을 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

그렇기 때문에 춘보는 길을 떠나려 한다고 자신있게 큰소릴쳤다. 그는 한양의 소금 시세를 훤히 꿰고 있었다.

"지금 소금 한 가마에 다섯 냥이네. 한 달 전만 해도 세 냥도 비싸다는 말이 돌았으나 지금은 다섯 냥 갖고도 소금을 구경할 수 없네. 최소한 일곱 냥은 줘야 하는 데 그것도 며칠 전 시세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열 냥으로 치솟을 건 불을 보듯 뻔하네. 지금 산지에선 한 냥 두 푼이니 한양까지 경비를 한 냥으로 잡는다 해도 넉넉잡아 세 냥이네. 우리가 구한 소금이 한양에 도착할 때엔 소금값이 폭등해 열두 냥은 될 것이네. 가만히 앉아 네 곱은 챙기네. 관상감에서 예보하길 장마가 한 달 후에 온다 했으니 서둘러 스물 닷새면 한양에 도착할 수 있네. 자네가 만 냥만 융통해 주면 남은 이익의 삼할을 주겠네."

춘보의 말을 들으면 큰 이득이 올 수 있었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랐다. 위험이 따른 만큼 이익이 큰 거래였지만 민홍섭은 나름대로 복안이란 걸 내놓았다.

"그렇담 이렇게 하세. 내가 어디서 만 냥을 융통해 보겠네. 만약 이번 일에 차질이 생기면 자네 딸 산홍(疝紅)이를 우리 기방으로 넘기게. 또한 이번 길은 자네가 직접 다녀오게!"
"알았네."

일단 합의를 끝내고 춘보는 남해안으로 떠났다. 춘보가 큰소리치며 길을 떠난 것처럼 날마다 뙤약볕은 초목을 마르게 만들었다. 무더운 폭염이 이십 여일이나 계속된 중에도 시원한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그런 점으로 본다면 전주(錢主)인 민홍섭은 불안에 떨어야 했으나 오히려 태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춘보에게 돈을 주기 전 현직에서 물러난 벽파(僻派)의 다른 중신을 교묘하게 이용했었다.

"소인의 소금장사를 하려 하는 데 우연히 파자점(破字占)을 치는 점장이에게 뽑은 글자가 '사(四)'자였지 뭡니까. 내가 가만 생각해 보니 이번 장삿길에 네 배의 이득을 얻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대감님이 저에게 만 냥을 투자하시면 배가 되는 이익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대감님께서 돈이 아니라 그에 상당하는 걸 원하신다면 조선 제일의 미녀에 대한 초야권(初夜權)을 드리겠습니다."

너구리 대감으로선 귀가 솔깃했다. 민홍섭은 똑똑한 조방꾼이니 손해날 이유가 없다 본 것이다. 재물이야 넘쳐나는 처지니 몇 푼의 이익보다 천하절색의 미녀로부터 초야권을 받겠다고 목소리를 깔았다. 더구나 이때는 하늘도 맑았고 연일 뙈약볕이 들끓을 정도로 쾌청했다. 민홍섭은 자신이 파자점을 친 결과를 알고 있었다. 점쟁이는 그런 말을 했었다.

"아하, 장사는 헛일이오. 이젠 그만 둘레야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자네가 뽑은 글자(四)는 물건을 산다는 뜻의 매(買) 자에서 재물(貝)이 빠져나간 모습이고, 물건을 판다는 매(賣) 자의 위와 아래가 잘려나간 모습이네. 그런가하면 그만 둘 파(罷)의 머리 글자인데 소금 운반을 지금 중지한다 해도 아니될 뿐 아니라 소금이 온다 해도 모두 오지 않을 것이네."

열닷새가 지나 소금이 도착했다. 한양엔 비가 오지 않았지만 남해안 인근은 하루가 멀다 않고 비가 쏟아져 많은 양의 소금은 비에 젖어 녹아 흘렀다. 손해가 막심했다. 

만 냥을 투자한 대감이 노발대발 민홍섭을 불러들였는데 그는 벌써 조방꾼을 그만 두고 정순왕후의 처소로 들어간 뒤였다. 그 동안 높은 이자돈을 불려준 공으로 벼슬자리가 눈앞이란 소문이다 보니 당장 만 냥을 달랄 수도 없어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벼슬길에 나간다면 돈이 필요할 거야. 해서, 지금 그걸 달랄 수는 없으니 자네가 연전에 말한 그 천하절색의 미인 말이야. 그 아이와 초야권(初夜權)을 치르게 한다면 자네가 빌려간 만 냥은 갚을 때까지 한두 해는 기다려 줄 수 있네."

"그렇다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하게."

"대비마마께서 대감에 대해 뭔가를 조사시켰는데 그 내용이 여간 좋지 않아 망설이던 참이었습니다. 장리(長利)를 놓고 기생을 빼앗아오는 등의 작태를 벌이고 있으니 벼슬자리에 나간다는 건 바랄 수 없고 사헌부에 고변장을 내야할까 어떨까 망설이던 참입니다."

"아하하, 이 사람. 장리를 놓고 기생을 빼앗아 오는 게 어디 내 뜻이었나. 아랫것들이 내 눈치를 살피느라 한 일이지. 자네가 대비마마께 잘 말씀드려 날 벼슬길에 나가게 한다면 내 만 냥의 돈은 아니 받을 것이네."

민홍섭에 대한 고변 기록은 여기까지였다. 정약용은 그가 호조에서 물러난 후 잠시 쉬던 중 예조에 뜻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것은 그의 뜻이라기보다 정순왕후의 고집이었다. 양사(兩司)의 대간들이 고신서경에 착수했으니 정약용도 가만있을 수는 없어 '정조외(政曹外)'라고 썼다.

일반적인 서경이었다면 인물 됨됨이를 보고 고신에 서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작불납(作不納)'이라 쓴다.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면 3차까지 재서경을 하는데 가계나 전력에 결함이 있어 인사담당부서나 청요직(淸要職)에 임명할 수 없는 경우 '정조외(政曹外)'란 단서를 달았다.

다시 말해 민홍섭은 가계부정자나, 서얼, 음행녀, 재가녀(再嫁女)의 후손이거나 횡령, 뇌물수수자 등이기 때문에 서경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무어라? 정약용이 그 놈이 단서를 붙였어! 그것도 '정조외(政曹外)라? 뇌물을 수수하고 횡령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 놈이 주상의 힘을 믿고 대비전을 우습게 여겨 내가 추천한 민홍섭을 불가라 했어! 놈이 하룻강아지 마냥 날뛰는 데 그대들은 두고 보겠단 말인가?"

[주]
∎장죄자(贓罪者) ; 횡령, 뇌물수수자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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