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죄요, 우리 탓이다
여기 한 억울하도록 '거룩한 주검'이 있다. 한 아름다운 인간이 죽임을 당했다. 한 슬픈 인간이 무섭도록 불의한 이 시대를 온 몸으로 비탄스럽게 고발했다. 최후의 몸짓으로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공정한 사회'에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죽음.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자살이다.
어쩌면 자살이 아니라, 참혹한 타살이 맞다. 누가 그를 죽였는가? 바로 우리다. 누구라고 남 탓하며 비난할 것도 없다.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마음과 철면피 같은 우리의 자화상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더욱 뼈져리게 반성할 자들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저 간악한 위정자들이다!
하늘도 무심하다. 거룩하고 성스런 한 인간의 죽음 앞에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다. 처절하리만치 불행한 한 시대의 죽음이다. 이 시대의 반인간적, 반인륜적 행태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죽음이다. 차마 분노마저 솟지 않는 이 쇠락한 마음들이여. 분노를 노래하라!
'편히 쉬십시오. 이승의 모든 괴로움을 잊으십시오.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님이시여!'
슬픈 주검의 유서를 보라!
"일자리를 못 구해 힘들다. ....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
장애 아들의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지원과 장애아동부양수당 받기 위해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물로 바쳤다.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 시신이 보관된 병원에서 시신을 인도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고인의 유서 말미에는 "아들아 사랑한다. 내 뼈는 화장해서 그냥 공원에 뿌려달라"는 슬픈 유언을 남겼다.(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8068)
무엇이 두려웠던지,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던지, 경찰은 장애우의 아버지 주검이 발견된 장소에 있던 목을 매단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인가? 무엇을 숨기려 하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이건 죄악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자 수는 해마다 1만2천여명을 상회한다. 하루 평균 3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도 25.2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2.4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풀이나 꽃처럼 사는 데에도 뜻이 있다
D. H. 로렌스는 <채털리이 부인의 사랑> 처음 부분에서 "우리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시대"라고 했다. 어느 시대고 비극 아닌 시대는 없었다. 늘 우리의 고통과 수고와 번뇌와 고민을 강요하는 불행의 시대였다. 그 불행의 역사를 견뎌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수많은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들이 스스로 고단한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구약성서>의 '모든 육은 들의 풀과 같도다'라는 말과 <전도서> 기자의 여러 번 반복되는 말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그 어떤 사람의 영혼이든지 값지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굳이 영혼의 몸을 실었던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은 분들의 세속적, 육체적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아야 한다.
야속한 면도 있지만, 기왕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안식이 있는 세상으로 갔으니 말이다. 망자(亡者)의 그 외롭고 고단한 인생 역정이 누구를 탓해서 회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원망해서 망자의 원망에 찬 마음까지 녹일 수 있는 일도 아닐 터이다. 그저 망자와 이승에서 인연과 친교를 나눈 분들의 추억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게 떠돌다 가도록 그냥 놔두어야 한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치고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어떤 이유로 해서 조금씩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상처의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본질적으로 상처의 아픔이야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상처 입은 영혼을 몸에 걸치고 살아나간다는 점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한결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각자의 영혼은 늘 어떤 종류의 '상처 입은 가시'를 지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가진 자나 없는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다 같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외침을 뒤로 하고 목을 매달아 혹은 분신(焚身)으로 쓰러져 간 우리시대의 불의로 말미암아 억울한 삶을 살았던 고귀한 주검들을 보아도 이 점은 아주 확연하다.
나라를 떠들썩할 정도로 요란스런 장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들은 인구에 회자(膾炙)할 것이고, 사회 저명인사의 주검들과 대조적으로 그저 그런 삶의 이력으로 살아 온 사람은, 그 주검의 의미조차 되새길 틈 없이 사라져 갈 것이다. 오늘 우리는 또 그런 분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주검의 사회적 의미와 아름다운 삶
난 어떤 주검에 대해서도 그 죽음의 의미를 깎아 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자살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게끔 만든다. 어쩌면 이 사회가 자살을 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외 없이 그 잘나빠진 '조중동'은 행복전도사의 죽음은 대서특필로 전하면서, 한 거룩한 주검 앞에선 침묵하고 있다. 한겨레는 얼마 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개탄하면서 이렇게 진단했었다.
"더 근본적인 대책은 갈수록 차가워지는 우리 사회에 온기를 회복하는 일이다. 경쟁은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을 이어가는 동력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오로지 천박한 승자논리로만 휩쓸려 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에게도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한번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줄 제도적 장치가 지금 우리 사회엔 턱없이 부족하다."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양이 아니라 가치에 달려 있다. 왜 그리스와 이태리 사람들의 자살률이 가장 낮을까? 내 소견으로는 지중해성 기후가 가지는 날씨에 의해 형성된 그들의 낙천적 기질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리에게 그만한 기후조건이 주어져 있지 않다면 그만한 삶의 환경 조건을 만들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없고, 배고프고, 경쟁에 뒤처진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 바로 이 사회야말로 진정 인간다운 사회이고, 인간이 만들어가야만 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자살의 미학'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다. 자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고, 실제로 우리 자신도 늘 어디서든 그 '죽음의 유혹'에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주검들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 주검에 대해서 연민을 넘어 공감을 함께 나누는 시대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인간은 육체적인 것에 매여 살면서도 정신은 높이 비상하려 한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모조리 무시할 수만도 없다. 그렇다고 정신만으로도 살 수 없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앞서면 인생의 심포니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것만으로는 그 심포니가 연주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적인 것 속에서도 영원한 것을 찾고 또 발견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현명한 사람은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했다. 공자도 죽음에 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죽음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거나, 정의로운 자이거나 불의한 자이거나 불문하고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게 찾아온다.
죽음보다 더 공평한 정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가, 아니면 추한 이름을 남기는가가 다를 뿐이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앞서, 우리의 삶 자체를 뒤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에서 무엇이 되는가 보다 어떤 삶을 살아가는 자체가 더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 알차고, 더 아름답고, 더 참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의 삶이 밝아질 때에 이웃의 삶도 밝아지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삶도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가 고달픈 하루를 살아가는 이웃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여기 한 억울하도록 '거룩한 주검'이 있다. 한 아름다운 인간이 죽임을 당했다. 한 슬픈 인간이 무섭도록 불의한 이 시대를 온 몸으로 비탄스럽게 고발했다. 최후의 몸짓으로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공정한 사회'에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죽음.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자살이다.
하늘도 무심하다. 거룩하고 성스런 한 인간의 죽음 앞에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다. 처절하리만치 불행한 한 시대의 죽음이다. 이 시대의 반인간적, 반인륜적 행태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죽음이다. 차마 분노마저 솟지 않는 이 쇠락한 마음들이여. 분노를 노래하라!
'편히 쉬십시오. 이승의 모든 괴로움을 잊으십시오.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님이시여!'
슬픈 주검의 유서를 보라!
"일자리를 못 구해 힘들다. ....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
장애 아들의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지원과 장애아동부양수당 받기 위해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물로 바쳤다.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 시신이 보관된 병원에서 시신을 인도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고인의 유서 말미에는 "아들아 사랑한다. 내 뼈는 화장해서 그냥 공원에 뿌려달라"는 슬픈 유언을 남겼다.(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8068)
무엇이 두려웠던지,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던지, 경찰은 장애우의 아버지 주검이 발견된 장소에 있던 목을 매단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인가? 무엇을 숨기려 하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이건 죄악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자 수는 해마다 1만2천여명을 상회한다. 하루 평균 3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도 25.2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2.4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풀이나 꽃처럼 사는 데에도 뜻이 있다
D. H. 로렌스는 <채털리이 부인의 사랑> 처음 부분에서 "우리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시대"라고 했다. 어느 시대고 비극 아닌 시대는 없었다. 늘 우리의 고통과 수고와 번뇌와 고민을 강요하는 불행의 시대였다. 그 불행의 역사를 견뎌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수많은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들이 스스로 고단한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구약성서>의 '모든 육은 들의 풀과 같도다'라는 말과 <전도서> 기자의 여러 번 반복되는 말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그 어떤 사람의 영혼이든지 값지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굳이 영혼의 몸을 실었던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은 분들의 세속적, 육체적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아야 한다.
야속한 면도 있지만, 기왕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안식이 있는 세상으로 갔으니 말이다. 망자(亡者)의 그 외롭고 고단한 인생 역정이 누구를 탓해서 회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원망해서 망자의 원망에 찬 마음까지 녹일 수 있는 일도 아닐 터이다. 그저 망자와 이승에서 인연과 친교를 나눈 분들의 추억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게 떠돌다 가도록 그냥 놔두어야 한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치고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어떤 이유로 해서 조금씩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상처의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본질적으로 상처의 아픔이야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간에 상처 입은 영혼을 몸에 걸치고 살아나간다는 점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한결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각자의 영혼은 늘 어떤 종류의 '상처 입은 가시'를 지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가진 자나 없는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다 같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외침을 뒤로 하고 목을 매달아 혹은 분신(焚身)으로 쓰러져 간 우리시대의 불의로 말미암아 억울한 삶을 살았던 고귀한 주검들을 보아도 이 점은 아주 확연하다.
나라를 떠들썩할 정도로 요란스런 장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들은 인구에 회자(膾炙)할 것이고, 사회 저명인사의 주검들과 대조적으로 그저 그런 삶의 이력으로 살아 온 사람은, 그 주검의 의미조차 되새길 틈 없이 사라져 갈 것이다. 오늘 우리는 또 그런 분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주검의 사회적 의미와 아름다운 삶
난 어떤 주검에 대해서도 그 죽음의 의미를 깎아 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자살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게끔 만든다. 어쩌면 이 사회가 자살을 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외 없이 그 잘나빠진 '조중동'은 행복전도사의 죽음은 대서특필로 전하면서, 한 거룩한 주검 앞에선 침묵하고 있다. 한겨레는 얼마 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개탄하면서 이렇게 진단했었다.
"더 근본적인 대책은 갈수록 차가워지는 우리 사회에 온기를 회복하는 일이다. 경쟁은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을 이어가는 동력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오로지 천박한 승자논리로만 휩쓸려 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에게도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한번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줄 제도적 장치가 지금 우리 사회엔 턱없이 부족하다."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양이 아니라 가치에 달려 있다. 왜 그리스와 이태리 사람들의 자살률이 가장 낮을까? 내 소견으로는 지중해성 기후가 가지는 날씨에 의해 형성된 그들의 낙천적 기질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리에게 그만한 기후조건이 주어져 있지 않다면 그만한 삶의 환경 조건을 만들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없고, 배고프고, 경쟁에 뒤처진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사는 사회, 바로 이 사회야말로 진정 인간다운 사회이고, 인간이 만들어가야만 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자살의 미학'은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다. 자살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고, 실제로 우리 자신도 늘 어디서든 그 '죽음의 유혹'에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주검들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 주검에 대해서 연민을 넘어 공감을 함께 나누는 시대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인간은 육체적인 것에 매여 살면서도 정신은 높이 비상하려 한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모조리 무시할 수만도 없다. 그렇다고 정신만으로도 살 수 없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앞서면 인생의 심포니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것만으로는 그 심포니가 연주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적인 것 속에서도 영원한 것을 찾고 또 발견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현명한 사람은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했다. 공자도 죽음에 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죽음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거나, 정의로운 자이거나 불의한 자이거나 불문하고 모두에게 가장 공평하게 찾아온다.
죽음보다 더 공평한 정의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가, 아니면 추한 이름을 남기는가가 다를 뿐이다. 이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앞서, 우리의 삶 자체를 뒤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에서 무엇이 되는가 보다 어떤 삶을 살아가는 자체가 더 소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 알차고, 더 아름답고, 더 참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일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의 삶이 밝아질 때에 이웃의 삶도 밝아지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삶도 밝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모두가 고달픈 하루를 살아가는 이웃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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