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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좀 그만 마셔" 부부여행 중에도 싸웠다

[44일 동안 아내와 떠난 여행 이야기③] 여행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니

등록|2010.10.11 14:15 수정|2010.10.11 14:15
여행을 다녀온 후, 1년 만에 여행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모두 5회에 걸쳐 기사를 올릴 예정입니다. 부족하지만, 소중히 정리해 올립니다. 앞으로 올릴 여행기의 목차와 아내와 함께 다녔던 곳은 기사 아래에 있습니다. - 기자 주

밤 거리에 우연히 본 노점.(광주)우연히 만난 밤길의 노점 불빛이 이쁘기만 하다. ⓒ 이시우



길에서 사람을 만났네

사람들은 여행자에게 친절하다. 길을 물으면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 우리의 길을 찾아준다. 가는 방향이라도 같다면 동행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백수해안도로 끝자락쯤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더위와 허기에 지쳐 있을 때 거짓말처럼 트럭 한 대가 우리 곁에 멈췄다. 아들과 함께 읍내에 나가던 아저씨는 우리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사라졌다. 그 흔한 구멍가게조차 안 보이는 길에서 마실 물이 바닥났을 때, 무작정 어느 집에 찾아들어가 페트병에 그득 담긴 얼음과 물을 얻은 적도 있다. 얼음 페트병을 흔쾌히 내준 집 주인 옆에 아들 녀석이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착장까지 트럭을 태워준 거금도 중년 부부는 자신들이 뿌리 내리고 살던 섬의 안내까지 해주었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뭍에서 온 손님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한참 낯선 길을 걷다 식당을 찾지 못해 끼니를 놓친 적도 있었다. 보이는 건 들판이고, 고개를 들어 찾을 수 있는 건 산뿐이었다. 지방도로 한가운데서 나와 아내는 더위와 허기에 지쳐 있었다. 그러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정자 하나가 보였다. 거기엔 마을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늘이라도 잠시 빌릴까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어르신들이 모인 자리로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운이 좋다면 시원한 물이라도 얻어 마시면 그만이다 싶었다. 어르신들은 아내와 나의 행색을 보고는 대번에 묻는다.

"어디서 온 겨? 밥은? 이거라도 먹을랑가? 이 더위에 무슨 사서 고생이랴?"

그러고는 당신들이 잡숫던 밥과 반찬을 내민다. 이런 행복한 밥을 먹으려고 오늘 그리 길을 헤매고, 더위에 땀을 쏟았구나. 찬밥에 서너 가지 밑반찬이라도 수만 원짜리 한정식이 부럽지 않았다. 밥이 좀 부족한 걸 알았는지 할머니 한 분이 잠시 자리를 떠 뜨거운 밥을 고봉으로 담아온다. 어른이 주신 음식은 고맙고 맛나게 먹는 게 최고의 예의라 배웠다.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뚝딱 해치웠다. 이렇게 맛난 밥을 언제 먹었던가. 밥이란 이렇게 감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행을 하면서야 깨달았다.

그리 밥을 비우고 나무 그늘을 지붕 삼아 드러누웠다. 할머니가 다가와 목침 하나를 주신다. 목침은 그 어떤 수면제보다 효과가 강했다. 누운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바람은 이불이 되어 우리를 덮어 주고, 벌레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 귀를 간지럽게 했다.

자고 일어날 때까지 어르신들은 조용히 저만치서 말씀을 나누고 있었고 빨래는 평화롭게 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편히 낮잠을 즐겼으니 우린 다시 낯선 길을 휘적휘적 걸을 수 있었다. 어르신들께는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자 밑에는 어르신들이 앉아 있었다.

거금도에서.길을 물으니, 선뜻 트럭에 오르라 한다. ⓒ 이시우



여행을 해도 부부는 싸운다

사람과 사람이 맺은 모든 관계는 다투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는 과정의 되풀이라고 나는 믿는다. 단 한 번의 싸움도 없는 관계는 구라이거나, 애정이 없다고 또한 믿는다. 문제는 어찌 싸우고, 또 어떻게 화해하는가다. 일종의 싸움의 룰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우리는 당연히 다투고, 싸우고, 다시 화해했다. 그 원인이란 물론 사소한 데서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하고 술을 좀 더 마시겠다는 나와 이를 말리는 아내가 빈정이 상하거나 서운한 감정이 생기고, 이게 다시 괜한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별 일 아니게 지나갔을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생활인이기에 한 푼의 벌이도 없이 다니는 여행 앞에 문득 불안을 느껴 싸움이 되기도 했다. 더운 건 질색인 내가 뙤약볕 아래에서 괜한 짜증을 부려 아내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경우도 있었다.

싸움이 생길 것 같아 내놓은 해법은 아니었지만 여행을 하면서 가끔은 따로 있기로 했다. 상대가 혼자 놀거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 주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벤트'도 아니었다. 그저 점심을 먹고 나는 박물관을 간다든지, 아내는 시장과 골목을 걷는다든지 정도의 시간. 또는 저녁을 먹고 나는 혼자 바다를 보면서 캔맥주 한 두 개를 마셨고, 아내는 책을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책 한 권 읽었다.가방에 책 한 권을 찔러 넣었다. 돌아오는 길, 책 몇 권쯤을 읽고 돌아왔다. ⓒ 이시우



부부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관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혼자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나는 홀로 바다를 보면서 여행을 떠나기 전과 지금을 생각했다. 유일한 해결책이 여행이 아닐까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떠난 길이었다.

근거 없는 대안이었지만, 확실히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아내의 얼굴은 달라졌다. 자주 거르던 식사도 잘하고, 그 더운 날 길에서 깡충거리며 뛰고, 웃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들과는 마치 10년쯤 된 친구처럼 금세 수다를 즐기고, 그러다 사라져 어디를 갔나 찾으면 그리 좋아하는 동네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놀고 있었다. 매일 걷자고 나를 조르기도 하고,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자주 수첩을 꺼내 메모도 했다.

그러다 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도 해서 그런 아내를 보는 나를 덜컥 겁나게 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아픈 마음을 달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이내 내 마음도 안정되었다. 물론 그러다가도 간혹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여행은 계속되었다. 다툼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는 일이란 이렇게 옆구리에 항상 끼고 사는 지겨움과 불현듯 찾아와 순식간에 사라지는 행복감의 연속과 되풀이였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전국의 강아지들.아내는 길에서 만난 강아지를 좋아했다. 신기하게도 강아지들도 아내에게만은 경계를 풀고 꼬리를 흔들었다. ⓒ 이시우



여행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니

길을 나서기 전 여행도 일상이 될 수 있을지 묻는 아내의 질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여행이 일상이 될 만큼 오래 여행을 한 적도 없고, 여행이 일상이 된다면 여행 또한 지겨움이 될 것 같아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였다. 한 두 달의 여행이 일상이 될 수 있는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다만 매일 아침 일어나 오늘은 또 어디를 여행할지를 정하고, 짐을 싸고, 다시 길을 나서는 일도 힘들고 지칠 수 있다는 사실을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여행은 즐겁고, 길에서 만난 이들은 친절했으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감동스럽기만 했다. 그럼에도 매일 어딘가로 항상 움직여야 하고, 오늘은 어디서 식사를 해결하고, 잠자리를 정할지 결정하는 일이 때론 힘들었다. 모든 길은 낯설었고, 정해진 다음 행선지가 없었으니 다음은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일도 부담스러웠다. 갈 길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때론 이마저도 누군가 대신해줬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문득 여행 후 돌아가야 할 일상이 벌써 겁나고, 이렇게 길 위에 서 있는 일이 과연 옳은지, 이 기간만큼 뒤처지는 건 아닌지를 걱정해야 했다. 큰소리 치고 나선 길이었지만, 결국 우리도 평범한 생활인이다. 여행을 하기 위해선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나와 아내는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지금의 여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순간순간의 삶이 걱정스럽기도 했고, 다시 돌아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지도 두려웠다.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는 생활인으로서의 걱정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달리 생각했다.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건 할 수 있는 행동도 없다는 걸 의미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저 상황이 허락해줄 때까지 길 위에 서 있으면 그만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그곳의 삶이 일상이고, 그래서 여행도 일상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내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여행처럼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이렇게 아내는 나를 위로했고, 소심하고 귀 얇은 나는 아내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44일을 버틴 것 같다.

빨간색으로 그은 줄, 우리가 지나온 길.전라남도 지도를 들고 여행을 다녔다. 지나온 길을 아내가 빨간색 펜으로 표시를 했다. ⓒ 이시우

우리 부부의 여행 안내서
■ 목차

― 1. 여행이 시작되기 전
"우리 잠시 어디로든 떠나자. 한 달이나, 두 달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모함, 또는 용기
여행도 일상이 될 수 있을까

― 2. 단지 44일 동안①
'카메라를 왼쪽으로 멜까? 오른쪽으로 멜까?'
길, 구불구불한 이 땅의 길
걸으며 느낀 행복

― 3. 단지 44일 동안②
길에서 사람을 만났네
여행을 해도 부부는 싸운다
여행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니!

― 4. 단지 44일 동안③
섬과 노을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우리 여행의 노하우
축축한 마음이 햇빛에 마르던 날
그곳에서의 시간, 오늘이 며칠이지?

― 5. 여행 후
여행의 끝에서
여행의 후유증

■ 참고<지난 여행 일정>

* 1차(9. 1.∼9. 28.)
서울→장성(9. 1.∼2.) → 광주(9. 2.∼3.)→영광(9. 3.∼4.)→백수해안도로(9. 4.∼5.)→백바위해수욕장(9. 5.∼6.)→나주(9. 6.∼7.)→목포(9. 7.∼8.)→우이도((9. 8.∼10.)→목포(9. 10.∼12.)→영암(9. 12.∼14.)→해남(9. 14.∼15.)→완도(9. 15.∼16.)→강진·화순(9. 16.∼17.)→순천(9. 17.∼19.)→고흥 거금도(9. 19.∼20.)→고흥 녹동(9. 20.∼21.)→청산도(9. 21.∼24.)→보길도(9. 24.∼28.)→완도→목포→서울(9. 28.)

* 2차(10. 5.∼10. 20.)
서울→부산(10. 5.∼10.)→통영(10. 10.∼12.)→전주(10. 12.∼13.)→군산(10. 13이∼16.)→고창(10. 16.∼17일.)→부안(10. 17.∼18일.)→전주(10. 18.∼20.)→서울(10. 20.)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저의 블로그(http://blog.naver.com/timerain9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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