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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421)

― '짧은 기간에 이룩한 미증유의 성장' 다듬기

등록|2010.10.11 14:09 수정|2010.10.11 14:09
- 미증유의 성장

.. 그 작은 나라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이룩한 미증유의 성장을 두고, 우리는 최첨단 전자기술의 발전, 개방적이고 강한 정부, 그리고 뜻밖의 행운을 당연시하는 풍토를 원인으로 꼽는 경향이 있다 ..  <마르타 쿠를랏/조영학 옮김-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가쎄, 2009) 14쪽

'상대적(相對的)으로'는 '퍽'이나 '남보다'나 '제법'으로 다듬고, "짧은 기간(期間)에"는 "짧은 동안에"나 "짧은 나날에"로 다듬으며, '성장(成長)'은 '발돋움'으로 다듬습니다. '최첨단(最尖端)'은 '첨단을 달리는'이나 '가장 앞선'이나 '뛰어난'으로 손보고, "전자기술의 발전(發展)"은 "전자기술이 이루어지고"로 손보며, "개방적(開放的)이고 강(强)한"은 "힘있고 열린"으로 손봅니다. "뜻밖의 행운"은 "뜻밖에 찾아오는 행운"이나 "뜻밖에 얻은 행운"으로 손질하고, '당연시(當然視)하는'은 '마땅하다고 보는'이나 '기꺼이 받아들이는'으로 손질하며, '풍토(風土)'는 '흐름'이나 '모습'으로 손질해 줍니다. '원인(原因)'은 '까닭'으로 고쳐쓰고, "꼽는 경향(傾向)이 있다"는 "꼽곤 한다"나 "꼽는다"로 고쳐 봅니다.

 ┌ 미증유(未曾有) :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
 │   - 미증유의 민족적 수난 / 역사 이래 미증유의 사건 /
 │     미증유의 파문을 일으키다 / 육이오 동란이라는 만고 미증유의 대전란
 │
 ├ 미증유의 성장을 두고
 │→ 놀라운 발돋움을 두고
 │→ 눈부신 발돋움을 두고
 │→ 대단한 발돋움을 두고
 └ …

퍽 짧다고 할 만한 보기글인데, 이 한 줄에서 거의 모든 대목을 가다듬었습니다. 참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싶으나, 오늘 우리 누리에서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 모릅니다. 누구나 으레 쓰는 말투인데 제가 괜히 말꼬리를 잡는다 할 수 있고, 더없이 쓸데없거나 군더더기인 말투를 사람들 스스로 안 깨달으며 엉터리로 살아간다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날마다 밥을 먹고 있으나 무슨 밥이요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일구어 마련한 밥인지 살피지 않습니다. 아니, 살필 겨를이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누구나 날마다 옷을 입고 차를 타고 집에서 잠자고 하지만, 우리가 입는 옷이 어디에서 누가 거둔 옷감으로 어느 곳에서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돌아보지 않습니다. 차값이 얼마요 자동차 이름이 어찌어찌하며 성능이 어떠한 줄은 알지만, 이 차 한 대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원을 썼고 자동차가 구르는 동안 지구 삶터는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 나라 곳곳을 가득 채웠어도 새롭게 다시 짓고 있는 끝없는 아파트숲이 우리 터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를 느끼지 않습니다.

나 하나 살아가며 껴안는 옷과 밥과 집을 깨닫지 않는 흐름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어울리며 맞아들이는 옷가지와 밥차림과 집살림을 깨우치지 않는 물결입니다. 말과 글이란, 말결과 글결이란, 말씀씀이와 글씀씀이란 한낱 지식조각이기만 한 요즈음 모습입니다. 알맞게 잘 쓰려는 말마디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살갑게 잘 가누려는 글줄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아름다이 말하며 아름다이 생각하고 아름다이 꾸리는 삶자락을 붙잡지 못합니다. 알맞게 글쓰며 알맞게 생각하고 알맞게 가꾸는 삶마디를 보듬지 않습니다.

 ┌ 미증유의 민족적 수난
 │→ 여태까지 이 겨레한테 없었던 고단함
 │→ 이제껏 이 겨레한테 없던 괴로움
 │→ 이제까지 이 겨레가 겪은 적 없는 힘겨움
 ├ 역사 이래 미증유의 사건
 │→ 역사에 처음 있는 사건
 │→ 이제까지 역사에 없던 사건
 └ …

너무 바쁜 하루하루이기 때문에 내 삶을 나 스스로 한결 알뜰살뜰 일구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너무 배부른 일거리를 붙잡고 있거나 지나치게 배고픈 일자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내 말삶과 글삶을 알차게 돌보기 힘든지 모릅니다. 볼거리가 너무 많고 즐길거리가 지나치게 많은 탓에 말이든 글이든 차분하게 다스리기 어려운지 모릅니다.

영어 미친바람은 어쩌다 불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닙니다. 그예 뿌리내린 된바람입니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 아이들한테 슬기롭고 빛나는 삶을 못 가르치기 때문에 해마다 더욱 커지는 모래바람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슬기롭고 빛나는 삶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반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 未曾有 : 없다 + 일찍이 + 있다
 │→ 일찍이(曾) 있지(有) 않았다(未)
 ├ 이제까지 없던 일이다
 ├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다
 └ 그동안 있은 적이 없다

한자말 '미증유'를 낱낱이 뜯어서 헤아려 봅니다. "일찍이(曾) 있지(有) 않았다(未)"를 이와 같이 엮었는지 다른 뜻으로 엮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자 뜻을 하나하나 새기고 낱말책 뜻풀이를 살피면서, 이렇게 지은 이 낱말은 '한자말 아닌 한문'이구나 하고 절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다시금 곰곰이 헤아립니다. 우리 옛사람은 이와 같은 때에 어떤 말을 했을까요. 우리 어릴 적에는 어떤 말을 나누었을까요. 저는 어릴 적에 "없던 일"이나 "있지 않은 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으레 읊던 "없던 일"이나 "있지 않은 일" 같은 말마디는 아주 마땅한 소리이겠으나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국어를 담은 사전이든 낱말을 엮은 책이든, '없던일'이나 '없는일' 같은 새말을 빚어 실어 놓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같은 새말을 굳이 안 빚어도 됩니다. 아니, 이 같은 새말을 구태여 빚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니까요. 그냥저냥 꾸밈없이 글을 쓰고 생각을 나누면 넉넉하니까요.

또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보니, 우리들이 어릴 적이든 머나먼 옛적이든 꾸밈없이 말하고 생각을 나누던 나날에는 "없던 일이었어" 하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토씨 '-의'를 붙이느니 마느니 하고 골머리를 앓지 않았습니다. 동무들하고 "우리 형이야"나 "우리 엄마야" 하고 말해야 자연스럽고 스스럼없었지 "나의 형이야"나 "우리의 엄마야" 하고 말한 적조차 없지만 이렇게 적힌 글을 읽으면 왠지 소름이 돋고 간지러웠습니다.

 ┌ 미증유의 파문을 일으키다
 │→ 끔찍한 파문을 일으키다
 │→ 터무니없는 물결을 일으키다
 ├ 육이오 동란이라는 만고 미증유의 대전란
 │→ 육이오 동란이라는 처음 겪은 큰 전란
 │→ 육이오 동란이라는 둘도 없는 큰 전란
 └ …

쉽게 쓰면 그만인데 쉽게 안 쓰니 '미증유' 같은 한문이 뜬금없이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살갑게 나누면 좋은데 살갑게 나누지 않으니 '미증유 + 의' 말투가 갑작스레 불거지며 어느새 사람들 입에 달라붙고는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스레 이야기하면 아름다운데 사랑스레 이야기할 마음이 없으니 "미증유의 성장"이고 "미증유의 파문"이고 하는 말투가 지식인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 입과 손과 귀와 머리와 가슴까지 파고들면서 말뿌리가 흔들립니다.

참 끔찍합니다. 저는 끔찍하다고 느낍니다. 그지없이 슬픕니다. 저는 슬프다고 느낍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 흐름과 물결을 돌아보면 앞으로도 이 같은 삶이나 생각이나 말이 고스란히 되풀이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느긋함뿐 아니라 사랑스러움을 찾으면 좋을 텐데, 둘레 이웃 가운데 느긋함과 사랑스러움을 고맙게 맞아들이려고 하는 이를 찾기란 몹시 힘듭니다. 그야말로 사랑보다 돈이 더 좋고, 믿음보다 아파트가 더 나으며, 나눔이나 어깨동무보다 권력과 가방끈이 더 반갑기만 한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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