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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론, 민주주의를 위한 획기적인 기획

네그리의 <전복적 스피노자>를 통해 본 스피노자 톺아보기

등록|2010.10.12 11:24 수정|2010.10.12 13:22

전복적 스피노자그린비 출판사 ⓒ 이상미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근대 유럽의 민주주의 형성에 필요한 형이상학을 제공해준 저작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주체는 바로 '다중(multitudo)'인데, 이 다중은 고대 폴리스의 구성원이었던 '시민'과는 다른 뜻으로 쓰인다. 제한된 시민권을 누리는 폴리스의 시민과는 다른, 인간의 보편성에 기초에 각 개개인이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개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국가 시스템의 작동의 원리가 다중에게서 비롯된 사회였다.

스피노자의 시대, 민주주의에 대한 구상은 주로 통치권의 위임과 자연권의 소외라는 운용 형식을 연구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치론>을 통해 민주주의를 보다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자연법주의와 적절하게 결합시키는 정치 기획을 구상해낸다.

비록 그의 책 마지막 부분인 민주주의 장은 그의 죽음과 함께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그가 생각해낸 민주주의의 핵심 사상은 책 전반에 걸쳐 묻어난다(그러니까, 누구 말처럼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사과나무 심겠다고 삽 들고 달려들던 철학자는 아니었단 말이다).

<정치론>은 퇴보한 저작?

정치론 ⓒ 갈무리

1670년 출판된 <신학-정치론>은 주변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는다. 심지어 스피노자의 지인들조차 당대 질서와 부합하면서 정치 현실에 순응하도록 글의 논지를 수정하도록 권할 정도였다. 당대 출판업자들이 스피노자 사후 <정치론>을 출판했을 때의 서문을 보자.

"군주제나 귀족제로 다스려지는 사회가 폭군의 전횡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시민들의 평화와 자유가 손상되지 않은 채 유지될 수 있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되어야 하는가를 논증하고 있는 정치론."

결국 스피노자의 논의는 중앙집권 체계를 이뤄가던 당대 유럽의 논의 체계 속으로 편입되어 받아들여진다. 게다가 <정치론> 6장 귀족정에 대한 언급에서는 스피노자 자신이 진정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인 것마냥 마치 귀족정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이 들어 있다.

"그러나 경험은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 모든 권력을 단 한 사람에게 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듯하다."

이런 구절들은 그 자체로 스피노자가 예전부터 밀고 나갔던 방향성과 모순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서술을 통해 스피노자를 귀족정 옹호론자라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니체를 파시즘 옹호론자로 해석한 히틀러가 한 짓 만큼이나 바보 같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논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스피노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본래 자신이 지향하는 진실과는 별개의 상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정치론>에서는 군주제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며 <정치론>에서는 온화한 형태의 군주론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온화함이란, 여론의 일치(제도상으로 봤을 때는 입헌제도)와 권력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스피노자에게 왕은 결코 신이 아니며 국가 또한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다. 만일 입헌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개인의 권리가 침해 당하게 되면, 개인의 자유는 스스로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큰 목소리로 주장하게 된다.

이 때 자유는 결코 목소리가 크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자유를 부르짖는 자의 행동, 그 행동 속에서 작용하는 힘의 크기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폭 또한 결정된다.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유물론자인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얼마만큼의 힘이냐에 따라 오직 그만큼의 권리를."

다중의 제헌적 힘

<정치론>의 두 번째 장에서, 스피노자는 종속적 관계에 매여 있는 존재를 능동적, 급진적으로 재구성 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사람들이 모여 다중이 되고, 그 다중의 힘만이 스스로 집단을 구성하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권력을 만들 수 있게 되는 상태. 여기에서 '존재'는 집단적 구성 과정의 산물이며, 다중 속에서 항상 새롭게 구성된다. 스피노자는 '존재'가 절대적 열림의 경지로 나아가야 함을 제시한다.

존재의 절대적 자유를 긍정하는 스피노자의 자세는 놀랍다. 1672년 오라녜 가문의 추종자들의 비트 가문의 두 형제를 살해한 사건에 지극히 분노하면서도, 스피노자는 다중의 잠재성에 대해 의심 없는 긍정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하나의 유토피아로 상정하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으로 파악한 스피노자의 견해가 돋보이는 부분이다(대중의 광기를 목도한 자가 인간 본성을 신뢰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들은 각자 존재를 낳고 유지하게 하는 그 힘만큼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존케 할 권리를 갖는다. 곧 모든 존재가 본래 갖고 있는 자연권은 그 존재의 힘으로 표현된다. (스피노자가 파악한) 세상은 고유의 자연권을 가진 각 존재가 어떤 매개도 없이 서로의 욕망을 동력으로 관계를 맺는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내재적 적대관계는 오직 힘의 구성 자체가 진일보 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합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그들 모두는 함께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된다(정치론)" 스피노자는 홉스나 로크가 제기했던 통치권의 무소불위와 자연권의 초월적 양도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개인이 더 큰 역량을 지닌 지도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중 자체가 제도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능동적 조직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곧 다중이 지니는 제헌적 힘의 현실화이다.

나는 내 영혼의 선장, 나 자신의 주인

사람은 자연상태에서 '고립'을 두려워하고 자신보다 강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리를 이양하면서까지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 개인이 얻고 싶어하는 것은 '안정'과 '평화'일 것이다. 개인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하고 가능한 한 안전하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 하지만 역사 속에서 국가는 소속된 국민을 야수나 자동인형처럼 노예로 만든다.

하지만 올바른 국가는 인간이 안전한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만들고, 악의 없이 모든 국민이 서로를 신뢰하게 해준다. 결국 제대로 된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정치론> 속에서 귀족정이나 군주정의 당위를 인정하는 듯한 현실 타협적인 언급을 남기면서도, 군주제를 상이한 힘들 사이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만 그 당위를 인정했다.

스피노자의 구상은 점차 당대 군주제의 당위성을 부정하면서 그 체제에 온화함을 요구하고 종국에는 제헌적 관계를 다중의 운동과 결부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귀족정 또한 사회적 일치를 존중하는 모습을 통해 다중의 정치 형성과 결부될 수 있는 측면에 한해 정당한 현현으로 인정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형이상학을 세우기 위한 스피노자의 작업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초월성도 거부하며 권력의 초월성에 근거하는 당대 혹은 미래의 모든 이론들을 배제하는 국가에 관한 개념화, 2. 정치를 다중의 사회적 힘에 종속되는 기능으로 규정하는 것, 3. 제헌적 조직을 주체들 사이의 적대관계에 의한 필연적 운동으로 개념화 하는 것.

그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 작업을 통해 다중의 잠재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수행했지만 그 기획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죽었다. 스피노자는 존재를 규정하는 어떤 초월적 요소도 인정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현학적인 유토피아로 파악하지 않았다.

귀족정, 왕정이 현현하던 시기에 스피노자는 이미 그 정치체제들을 넘어선 기획을 갖고 있었고, 그 기획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그는 정치 체계에 대한 형이상학을 세우는 데 있어 매우 유물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자연권은 이성의 순리를 따른 다중에게 반드시 지켜져야 할 덕목이었고, 결코 군주가 신민을 압도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믿었다. 스피노자에게 실존의 권리는 오직 자신에게 있다. 자기 자신 이외에 자기 주인이 될 자는 없다.

스스로의 노동으로 각 존재가 평등하게 삶을 꾸려나가려는 기획, 민주주의 현현을 위한 유물론적 형이상학 계획이라니, 어쩌면 80년대 만화에서 나오는 악당의 "지구정복 계획"만큼이나 난해하면서도 독특하다. 그리고 그 기획은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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