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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른 아이, 이젠 아토피로 고생하지 않는다

[부자의 백두대간 종주기①] 봉화산~무명봉~중치 구간

등록|2010.10.25 17:30 수정|2010.10.25 17:30

등산로 주변의 화사한 단풍산행이 이어지다 보니 단풍의 빛깔을 느끼고 들국화에 코를 대보는 여유가 생겼다. ⓒ 서부원


아이의 아토피를 이겨내기 위해 시작한 아빠와의 산행. 한 번 두 번 늘어나더니 내친 김에 백두대간을 종주해보자며 부자간에 의기투합했다. 전문 산악인들이야 30여 개 구간으로 나눠 한 달 정도면 너끈하다지만, 아빠도 산행 '초짜'인데다 이제 겨우 아홉 살짜리 아이와 함께 하는 종주인 탓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우선 알려진 30여 개 구간을 다시 둘로 쪼개 60일 정도로 완주할 계획을 세웠다. 종주 능선에 대피소가 설치된 곳이 거의 없는 탓에 계획 짜는 게 등반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1:7만5000의 대축척 지도를 구해다가 구간별로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도로가 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하산할 때 마을이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인지 등을 아이와 함께 꼼꼼하게 체크해야 했다.

목표는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함께 완주하는 것이다. 이제 2학년이니 4년 남짓 남았다. 4년이면 충분한 듯하지만, 아이젠이 필요한 겨울과 폭염에 집중호우가 지나가는 한여름엔 산에 들 수 없으니 그리 넉넉한 것도 아니다. 거르지 않고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백두대간과 만나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화창했던 지난 주말(23일), 우리 부자는 백두대간 종주의 아홉 번째로 봉화산~무명봉~중치 구간을 걸었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은 소백산맥 줄기로,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의 경계선 구간이라며 아이가 아빠를 가르친다. 올봄부터 본격적으로 산과 친해져서 그런지, 대견하게도 지도와 나침반이 없어도 동서남북 방향은 물론 서 있는 위치 정도는 쉬이 간파해낸다.

가을 황금빛 억새 장관에 취한 9살짜리 아들

억새밭 사잇길로.가을은 울긋불긋 단풍의 계절? 금빛 물결 억새의 계절! ⓒ 서부원


"아빠, 가을이 참 멋져요!"

가을 산도 아니고 가을 단풍도 아닌, 가을이 멋지단다. 울긋불긋한 가을 빛깔도 그렇지만,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상쾌한 가을바람이 너무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냥 땅만 보고 걷더니, 등산로 주변에 핀 들국화에 코를 대보기도 하고 곱게 물든 단풍잎을 만져보기도 하는 등 여유가 생긴 모습이다.

낙엽에 파묻힌 등산화.아이는 이 종주 구간을 '낙엽의 길'로 명명하였다. ⓒ 서부원


그런가 하면 "오내평, 오내평…" 앞서 걸으며 무슨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길래 그 뜻을 물었더니, 오르막이 끝나면 곧장 내리막이고, 그 다음에는 늘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면서 등산로에도 규칙이 있는 것 같다며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듯 우쭐거렸다. 아이가 백두대간을 거의 완주할 즈음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산처럼 자신의 인생도 그러하다는 것을 저절로 깨우치게 되겠지 싶어 미소를 지어보였다.

꼬부랑재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넘어서니 사방이 탁 트인 산봉우리다. 그곳엔 물결처럼 일렁이는 억새밭이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곳으로 달려 뛰어들면 푹신한 솜이불처럼 포근하게 안아줄 것만 같았다. 그 장관에 취하는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가을 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왜 단풍만 떠올리지? 난 억새밭이 훨씬 더 멋있는데…."

누군가 그랬다지. '곱게 물든 단풍 보러 가을 산에 올랐다가 금빛 억새 물결에 취해 내려 간다'고. 아이는 아빠를 닮아 그런지 사진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억새 일렁이는 가을 산의 매력에 빠져선지 억새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랐다. 함께 억새밭 주변을 한참 맴돌다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대개는 양쪽이 가파른 비탈인 능선이지만, 등산로 주변에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이 나올라치면 예외 없이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몇몇 곳은 억새가 등산로를 가린 채 어른의 키쯤 자라 아이를 덮어버릴 정도다. 어떻든 바람에 흔들거리는 억새는 산행 내내 함께 하며 우리 부자에게 힘내라고 격려해주었다.

스프링 침대 위 같은 푹신한 납엽 등산로

부서져 방치된 안내 팻말지워진 글자의 흔적만이라도 읽어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종주자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보수가 절실해보인다. ⓒ 서부원


겨울이 오기 전에 두 번은 더 산에 들어야 한다.봉화산에서 중치에 이르는 백두대간 종주길은 가을이 완연했다. ⓒ 서부원


길을 나선 지 두 시간, 해발 920m인 봉화산 정상에 도착했다. 옛날 부산 동래와 남해 금산에서 올린 봉홧불이 한양으로 전달되기 위해 거쳤던 곳으로,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옆에 봉수대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주변의 산들은 모두 발아래 거느린 듯 우뚝한 모습이다.

봉수대에 관해서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모양을 보자마자 옛날 통신수단 아니냐고 물을 정도였다. 얼마 전 어느 그림책에서 읽었다는데, 단지 불을 피우는 곳이 어딘지, 어디로 불빛과 연기가 새 나가는지 등을 물었을 뿐이다. 세워진 건 그저 모형일 뿐이라, 흙바닥에 돌멩이로 그려가며 설명해주었다. 봉수대에 기대어 챙겨간 김밥을 먹었다.

봉화산 정상에서 전북 장수와 남원, 그리고 경남 함양의 세 시군의 경계인 무명봉을 지나 광대치에 이르는 길은 가을이 더욱 완연했다. 아이는 그 구간을 '낙엽의 길'로 명명하였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에 등산로가 보이지 않았고, 스프링 침대 위를 걷는 듯 푹신푹신한 느낌이 발끝으로 전해졌다.

"아빤 낙엽 밟는 소리가 어떻게 들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너는?"
"난 과자 바삭거리는 소리 같아. 이렇게 큰 낙엽 소리는 처음 들어. 아빠와 내가 번갈아 낙엽을 밟으며 가니 무슨 악기 소리 같기도 하고. 아참, 다음 주에 배울 <즐거운 생활> 단원 제목이 뭔지 알아?"
"가을? 단풍?"
"바로 '낙엽 소리'야."
"정말 공교롭다, 그치? 그럼 오늘 예습 제대로 한 거네."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흔적들안내 팻말이 없는 백두대간 종주길에 이런 리본은 길잡이 구실을 한다. ⓒ 서부원


나뭇가지마다 걸린 리본들이 이곳이 백두대간 등산로라는 걸 알려줄 뿐, 안내 팻말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띄엄띄엄 세워진 것도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거나, 글자가 지워져 있으나마나 한 것들뿐이다.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을 미리 알고 오지 않았다면, 시간 감각을 잃어 헤맬 뻔했다.

"아빠, 지난 번 지리산이나 설악산에서는 1km가 멀다 하고 팻말이 서 있더니, 이번 구간에서는 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 빼고는 단 하나도 멀쩡한 게 없네. 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그러하듯, 산도 잘 알려진 곳이 아니면 무시당하나봐."
"우리 오늘 내려가면, 군청이나 산림청에 전화를 걸어 팻말을 보수해달라고 부탁해볼까?"

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광대치에 닿았다. 잣나무 밭이라는 뜻의 경남 함양 백전면과 전북 장수의 지지계곡을 이어주는 소담한 고갯길이다. 지금은 오가는 발길이 끊겨 잡풀만 무성하고, 외려 백두대간 등산로 쪽이 옛날 광대치 모습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 해발 980m의 월경산을 비껴 넘어서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을 지나면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중치에 이르게 된다.

가히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었다. 산행 내내 입을 쉬지 않던 아이도 연신 물을 들이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월경산 정상 주변엔 족히 3m는 돼 보이는 철로 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흉물스러운 그것을 아이는 흡사 TV에서 본 휴전선 철책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이름을 적은 리본이 가을 단풍보다 더 울긋불긋하게 삭막한 벽을 수놓고 있었다.

더이상 아토피로 고생하지 않는 우리 아이

봉화산 정상에서표지석 너머로 운봉고원이 보이고 그 뒤 아스라한 능선은 지리산 자락이다. ⓒ 서부원


월경산을 굽이돌아 내리막에 접어드니 서산에 걸친 해가 비스듬히 가을 산을 비추고 있었다. 따스하던 햇볕이 이내 서늘해져 가을 숲에 부딪히는 바람소리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아이와 적어도 두 번은 더 산에 들어야 하는데, 가을을 다 누려보기도 전에 겨울이 올 것 같았다.

"아빠, 예전엔 힘만 들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디어 해냈다는 그런 기쁨뿐이었는데, 이번엔 많이 달랐어. 힘은 들지만 산행이 조금 즐거워졌고, 공부도 되는 그런 느낌? 아무튼 다음 코스도 기대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정 다음번이 기대되는 건 아이보다 아빠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수개월 동안 아이와 집에서 나눈 대화보다 함께 산행하면서 나눈 그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나마 짬을 내어 만들려고 노력해봐야 억지춘향일 뿐, 부자간의 자연스러운 대화는 여간해선 이뤄지지 않았다. 자칫 왜 자꾸 귀찮게 하느냐는 핀잔만 듣기 십상이다.

이제 더 이상 아토피로 고생하지 않는다. 이것이 꼭 어릴 적부터의 산행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아이가 아빠와 함께 산에 들면서 건강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수확이 있다.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와 아빠가 시나브로 가까워졌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돼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우리 부자가 백두대간을 완주해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저 휴전선 앞 진부령까지 완주하려면 앞으로 족히 50일은 더 걸어야 하고, 아이와 그 시간만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때마다 아이와 무슨 얘기를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설렌다. 하나 분명한 것은 꼭 그만큼 우리 부자는 가까워져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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