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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정상회의'는 포퓰리즘" 근거 있으나 틀렸다

김용필 충남도의원의 오해와 무지...참여민주주의 롤모델 왜 모르나

등록|2010.10.28 14:05 수정|2010.10.28 14:05

▲ 제1차 충남도민정상회의에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심규상


지난 10월 20일 충남도청에서 주관하는 제1회 '도민정상회의' 평가자문단에 참여하기 위해 새벽밥을 먹고 충남 부여에 다녀왔다. 공모와 추천을 통해 각계각층에서 선발된 300여 명의 도민들이 무려 6시간에 걸쳐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10대 전략과 18대 세부과제를 선정했다.

진행상의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고 실현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한국정치사상 광역단위에서 시도된 최초의 참여민주주의와 심의민주주의의 실험이라는 점에서 감회와 기대가 컸다.

이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 것은 일주일 뒤 지방언론의 보도였다. 10월 26일 충남도의회에서 김용필 의원(자유선진당)은 "지방의회가 구성돼 있는데도 의회를 통한 의견수렴을 뒷전으로 한 채, 법과 조례에도 없는 도민정상회의를 추진하는 발상은 '직접민주주의'라는 포퓰리즘으로 지방의회를 유린하는 처사"이자 "갈등과 반목을 부추기는 우려스러운 코드정치"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오마이뉴스> 장재완 기자는 지역의 다양한 반응을 전하면서 김용필 의원은 얼마 전 음주추태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이자 의회에서 '친환경무상급식 특위추진'을 좌절시킨 장본인임을 말미에 밝혀 놓았다(관련기사 : "도민정상회의는 포퓰리즘" 충남도의원 비난 '봇물').

개인적으로 김용필 의원과 일면식도 없고, 그의 경력, 능력, 성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쓰는 동기는 도의원으로서 그의 문제 제기는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보와 보수, 지방과 중앙을 떠나 많은 정치인들이 그런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또는 촛불정국 때마다 불거지는 시민대중과 제도정당 중 무엇이 우선돼야 하느냐의 이론적 논의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가 새로운 시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는 6·2 지방선거 이후 많은 지방정부에서 도민정상회의와 같은 다양한 거버넌스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용필 의원의 문제를 꽉 막힌 보수인사의 시비걸기로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지방정치의 현장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보편적 문제로 수용하면서, 이를 설득하려는 자세와 진전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요구된다.

거버넌스는 의회와의 제도적 긴장·갈등 수반

개별 시민을 주체로 설정한 직접민주주의든 다소 조직화된 집단을 설정한 거버넌스이든 그들의 손으로 선출한 의회와의 갈등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스웨덴과 오스트리아처럼 사회적 협약기구가 발전된 국가들에서조차 노사정위가 만들어지고 확대될 때 보수정당과 우익단체들은 국회의 입법 및 대표 기능의 무력화를 들어 강하게 반발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나라당과 전경련이 노사정위를 폐지하는 대신 비상설의 느슨한 협의체를 두거나 아니면 아예 영미식의 노사자율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정당과 의회를 넘어선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요인은 전쟁이나 공황과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의 주기적 발발이다. 한 사회의 극심한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사회적 단합이 필수적이지만 의회정치는 그러한 과제를 수용하기에는 내재적인 한계, 즉 당파적 대립과 협소한 대표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국가에서 그러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내전 이후 스페인의 사회협약(1977), 국가부도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아일랜드 협약(1987), IMF 사태 이후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위원회(1998)가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둘째, 정당이나 그것의 집합체인 의회는 너무 자주 조직화된 이익집단의 포로가 돼 왔다는 경험적 관찰 덕분이다. 로비의 상징인 미국의 다원주의 정치는 힘 센 자본가나 전문가 집단의 영향력에 너무 쉽게 좌우되어 왔다. 노사정위원회로 상징되는 유럽의 조합주의 정치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대 집단의 배타적 협상력에 의존해 왔다.

양쪽 모두에서 정책결정과정에 조직화된 이익집단(organized interest group)의 과도한 영향력을 줄이고, 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농민, 실업자, 시민단체, 지역, 소수자 집단의 발언권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최근 유럽에서 다양한 사회협약과 거버넌스 기구들이 급증하는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거버넌스 실험들은 임금·고용·소득 등 노사의 이해관계에 제한되지 않고, 보육·연금·사회적 빈곤·교통·보건·지역발전·주택 등 공공정책의 전반적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현재 우리로서는 셋째 요인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실험들이 발전하고 성공하면서 의회의 무력화와 권한 축소를 우려했던 정치인들이 오히려 정당기능이 활성하되고 의회 역할이 확장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현재 어떤 선진국에서도 의결이든 자문이든 심의든 법적 위상과 상관없이 위원회의 명칭을 가진 민관협력기구가 의회를 대체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최근 선진국의 주요 정당들은 각종 거버넌스 기구에 보다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지방정부 차원에서 지방의회와 거버넌스의 파트너십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추세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지방 정부들은 아래로부터의 복지 확대 요구와 중앙정부로부터의 재정 감축 요구라는 이중 압박에 몰려 있다. 이렇게 어려운 객관적 환경 속에서 지역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대로 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주민들과 책임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앞장서 거버넌스 제도들을 적극 활용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김용필 의원의 발언은 도의원으로서 응당 제기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도민정상회의와 같은 실험이 지방의회를 유린한 포퓰리즘이거나 코드정치라는 주장은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철 지난 옛 노래이자 오해와 무지의 소산이다.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에 상처를 낼 정략적 계산을 따지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나서 도정 현안에 대해 지역별로 다양한 주민회의를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둘째 치고 자신의 재선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도민정상회의는 성공적 실험인가? 아니 부지사를 민주노동당 인사로 인선한 강원도와 경남도의 실험은 어떠한가? 보다 관련 있는 것으로서 고양시, 부천시, 서대문구의 주민참여위원회들은 안착할 것인가? 개혁적인 단체장들이 앞 다투어 추진하고 있는 주민참여조례는 소기의 성과를 발휘할 것인가? 국가 차원은 차치하고 지방정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거버넌스 실험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의 과제 극복이 필수적이다.

첫째는 법적·제도적 안정성을 통한 실효성의 확보이다. 최근 지역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거버넌스 실험들은 하나같이 비공식적 법적 구성으로 인해 아무런 구속력이나 성문 절차 규칙이 없고, 그것을 추진하는 기구의 경우 자체의 정관이나 예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신사협정의 관행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 참여자 사이의 신뢰와 존중의 규범이나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으며 사회적으로도 사회협의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거버넌스의 법적·제도적 구속력 여부가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

과거에도 투명사회위원회, 일자리위원회, 저출산고령화위원회 등 중앙정부 차원의 민관협력기구가 남발되었고, 의제21같은 지방기구들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뻔질나게 참여만 하였지 실제 정책으로 실현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공론화에는 성과가 있었을 수 있지만 합의된 정책이 좌절되거나 무산되면서 초기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참여자 사이에는 자치단체장들의 치적을 홍보하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되었다는 자조가 팽배하여 있다.

둘째는 참여자의 '대표성과 책임성' 문제이다. 특히 시민단체(NGO)의 대표성과 책임성 문제는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노사정과 달리 시민단체는 공익에 대한 표상 이외에 대표성의 위임을 주장할 어떤 제도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거버넌스 실험에 가장 강하게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지역에 뿌리를 둔 3대 관변단체와 직능사회단체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지역의 명망가와 전문가로 구성한다면 차라리 안한 것만 못하다. 

도민정상회의가 보완해야 할 과제는?

안희정 충남지사가 시도하였던 도민정상회의에 대해 필자는 첫 출발치고는 올바른 방향과 적절한 목표를 설정하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한계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해 평가하겠지만 사실 주민회의(town-hall meeting)가 시도될 보다 적절한 단위는 시·군·구의 기초단체이다. 따라서 바른 문제 제기는 쓸데없이 왜 했느냐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실제 기반인 기초단체에서 이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가이다. 지각 있는 의원이라면 중단을 외칠 것이 아니라 함께 뿌리 내릴 대안을 궁리해야 한다. 

6·2 지방선거 이후 MB 정부에서 죽었던 거버넌스의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다. 그러한 새싹들이 민주주의의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체장들의 역량과 책임감, 구체적으로는 거버넌스를 통해 도출된 제안과 합의들을 무거운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정책으로 집행하려는 진정한 노력과 구체적인 성과가 관건이다.

묘하게도 지방수준에서는 단체장과 지방의회, 교육감의 당정과 이념적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 분점 상황이 보편적이다. 안희정 지사가 실천하는 정치인이라면 도민정상회의에서 도출된 10대 전략과 18대 과제를 놓고 의회나 교육청을 열심히 설득하고 때로는 갈등을 감내해야 한다. 정당과 의회의 설득이라는 숙제는 노무현 대통령도 끝내 풀지 못하였던 정치인으로서는 운명적 과제이다. 그래서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범위는 확대되고 책임감은 강화되어야 한다. 지역으로 내려 갈수록 노인복지와 보육문제에 있어서 견해 차이는 줄어든다. 4대강이나 국가보안법 폐지와 달리 이 문제에 대해 3대 관변단체와 진보적 시민단체의 주장들은 충분히 수렴이 가능하다. 지역의 진보와 보수, 직능사회단체들의 균형 있는 참여를 설계하되 결정과 집행에 대한 관과 민의 책임 공유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들 역시 기왕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면 아웃사이더로서의 비판보다는 참여자로서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도민정상회의로 상징되는 지역에서의 새로운 실험들은 운영의 안정성, 정책의 실효성, 참여자의 책임성이라는 점에서 분명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보완되어야 할 과제이지 중단될 이유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집행부와 입법부가 상생할 수 있는 win-win 전략이기 때문에 보다 작은 단위에서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지방정치의 진짜 적은 직접이든 참여이든 민주주의의 실험이 아니라 예산과 권한을 독점한 채 책임과 고통을 지방정부에 전가하고 있는 중앙정부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프레시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상호 기자는 현재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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