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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박용만과 그의 시대 26] 박용만이 있는 네브래스카 주로

등록|2010.10.29 10:52 수정|2010.10.29 10:52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김현구에 의하면 전명운은 교육도 많이 받지 않았고 일찍이 여자에 빠졌으나 타고난 꾀가 많아 세상사는 요령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나 어려운 상황을 잘 돌파하는 재주도 있었다. 영어회화도 제법 했고 러시아어도 초보적인 것은 가능했다.

전명운에게 블라디보스토크는 춥고 배고픈 땅이었다. 또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장인환의 재판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연기를 거듭하던 재판은 1909년 1월 2일 공판을 열고 장인환에게 25년의 징역을 선고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네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시베리아만을 관통하는 국내선이 아니었다. 만주로 남행했다 다시 러시아로 북행하는 국제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내려 왔다가 다시 북행하므로 갈아타는 역이 여럿이었다. 그때마다 전명운은 기민하게 앞장섰다.

기차가 느리게 달려 창밖의 풍경은 잘 바뀌지 않았다.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들 모양 그들은 차츰 말을 잃어 갔다. 기차가 정거하면 뛰어 내려가 먹을 것들을 사들였다. 조리된 양고기나 닭고기, 말린 생선과 생선 통조림 등을 구해 오면서 뜨거운 물도 얻어다 차를 만들었다.    

모스크바까지는 19일이나 걸리는 지루한 여정이었다. 게다가 러일전쟁에 패전한 이래 러시아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황제에 대한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고 수상쩍으면 잡아가는 세상이었다. 열차에서 전명운은 러시아 육군 대령에게 접근해서 그의 호의로 신분을 의심받는 일은 피하게 됐다.

▲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간이역. 1900년대 초. ⓒ Sergei M. (저작권 해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갈아타야 하는 플랫폼을 찾지 못해 기차를 놓쳤다. 전명운은 이때도 날쌔게 어떤 폴란드 귀족에게 접근해서 그의 친절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독일을 통과해서 홀란드로 갔고 여객선을 타고 해협을 건너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의 사우스햄턴 항에서 마침내 네 젊은이는 미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뉴욕에 도착한 건 1909년 늦은 봄. 송진헌은 뉴욕에 남겠다고 하고 세 사람은 대륙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덴버의 박용만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박용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덴버라는 정거장 이름과 박용만이라는 사람 이름만을 달랑 들고 무작정 눈 먼 여행을 계속했다.    

세 사람의 여비는 아주 바닥이 난 상태였다. 첫날은 뉴욕의 동포가 싸준 음식을 먹었다. 시카고에서 동포가 싸준 음식을 받아 또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사흘 동안은 음식 살 돈이 없어 굶지 않으면 안 됐다. 덴버에 도착해서 박용만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네브래스카 주로 떠난 뒤였다. 그들은 체부에게 한인 유학생의 주소를 물었다. 다행히 그들의 숙소를 가르쳐줘 찾아갔으나 집에 없었다.

그들은 중국인 가게를 하나 찾아냈다. 중국인 주인 말로는 한인들이 더 이상 자기 가게로 물건을 사러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말은 그 전 해 애국동지대표회가 열렸을 때만 해도 한인들이 많았으나 공부 때문에 다른 주로 많이 빠져 나갔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들은 허기가 져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선반에 진열된 식품들을 보았지만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세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봐야 겨우 16전이 달랑 남아 있었다. 선반에 '중추명월'이라는 상표를 단 통조림이 보였다. 그게 월병(찹쌀떡)인 줄 알고 15전을 내고 샀다. 열어보니 배를 포함해서 중국 과일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눈치 챈 가게 주인이 부랴부랴 빵과 버터를 내왔다. 그걸로 빈 속을 채우자 곧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셋은 그리 멀지 않은 역으로 걸어가 대합실에서 정오까지 잠에 빠졌다.

한낮이 지나 유학생의 거처로 가던 중 한인 유학생을 거리에서 만났다. 그들이 세들어 사는 방은 형편없이 작았다. 모두 학자금이 없어 학교를 중단하고 돈벌이에 나서려는 참이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그들을 위해 근처에 셋방을 얻어줬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로 떠나면서 운영하던 직업소개소 겸 여관의 운영을 맡긴 사람이 윤병구였다. 그의 주선으로 홍승국과 김현구는 가사도우미로 일자리를 얻고 전명운은 철도 노동일을 찾아 와이오밍으로 떠났다. 가사 도우미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 때려치우고 두 사람은 박용만을 찾아 네브래스카 주로 떠났다. 

김현구는 그 해 가을학기를 네브래스카 주의 링컨 시에 있는 한 초등학교의 5학년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박용만 곁에서 실로 오래간만에 안심하고 첫발을 뗀 것이다.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 시에는 박용만이 설립한 '소년병학교'가 여름방학 마다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김현구와 홍승국은 헤이스팅스 공립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여름방학이면 '소년병학교'의 생도로 훈련을 받았다. 생도이면서 교사 역할도 했는데 3년 후인 1912년 제2회 졸업생들이 됐다. 두 사람은 훈련생들에게 한글과 문법을 가르쳤다.
  

▲ 1911년 여름 태극기를 게양하는 소년병학교 생도들. 김현구도 그 중 한 사람. ⓒ 독립기념관


김현구는 자신의 자서전도 남겼다. 그 속에 박용만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적었다.

"네브래스카에서 나는 박용만과 한 지붕 아래 살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교신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그로부터 배웠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형제라고 생각하라. 남의 모멸을 막으려면 형제끼리 결코 싸우지 말고 손을 잡아라.(형제끼리 싸우는 건 칼로 물 베기다.) 인색하지 말라. 남에게 빚을 지지 말고 내게 빚을 지게 하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근거 없는 의심을 품지 말라. 이런 것들은 동서양의 묵은 교훈들이지만 박용만은 그것들을 실천했다. 이승만이 굴욕과 모욕과 기만으로 그에게 못된 짓을 하는데도 그는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그걸 보면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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