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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요람 '은파관광지'

'은파관광지' 원래 이름은 '쌀뭍방죽'

등록|2010.11.02 10:54 수정|2010.11.02 10:54
우리 마을은 맑고 따사한 늦가을 날씨가 사흘 연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논농사를 짓는 농민들이야 추수를 끝냈으니까 상관없는데 배추농사를 짓는 분들은 비가 너무 오랫동안 내리지 않는다고 울상입니다.

뒷동산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봄바람이 치맛자락을 훔치는 봄에는 처녀들이 바람나기 쉽고, 오곡을 거둬들이는 가을에는 총각들이 옆집 처녀와 장가드는 꿈을 꾸다가 바람난다고 했지요. 저도 마음은 20대여서 그런지 요즘 들어 바짝 누군가가 그립고 기다려집니다.

일요일이었던 어제(31일)는 오랜만에 가을 공기를 흠뻑 마시면서 거닐고 싶어 은물결과 숲이 조화를 이루는 은파광광지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은파관광지까지는 중간에서 한 번 갈아타야 하지만, 그만큼 볼거리, 말거리가 늘어나니가 재미가 쏠쏠합니다.

▲ 은파관광지 입구 목재 다리. 주로 산책을 하거나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이 이용하는 길입니다. ⓒ 조종안


▲ 노란 국화와 조화를 이루는데요. 하늘로 솟구치는 물기둥들이 두 사람의 인연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은파관광지에 도착, 나무로 만든 목재 다리를 지나 물빛다리 광장에 도착하니까 노란 국화에 둘러싸인 벤치에 다정하게 어깨를 기대고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부럽더군요. 분위기가 어찌나 좋은지 대나무 깃발의 '아름다운 내 고향'이란 글귀가 별나게 보였습니다. 

휴게소 정자에서는 노인들의 고스톱 판에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는데요. 조깅을 나온 외국인 노인 부부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체육시설을 설치해놓은 한쪽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체중관리를 하고 있더군요.

휴게소 정면에는 월남전과 6·25전쟁 참전 기념비가 충혼탑과 함께 우뚝우뚝 서 있었는데요. 동무들과 어울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외발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 타는 꼬마들 모습이 거대한 탑들보다 믿음직스럽게 느껴졌습니다.

▲ 물빛다리 사랑의 문 입구. 절차에 따라 다리를 오가면 가족이 화목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 조종안


▲ 무지개를 그려내며 솟아오르는 분수. 건너편 산은 오성산이 조산(祖山)이었다는 절메산. 옛날에는 그만큼 군산에 산이 많았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 조종안


▲ 가족 여섯이 ‘사랑 체험봉’에 손을 얹고 소원을 비는 모습. 부러울 정도로 보기 좋았습니다. ⓒ 조종안


은파관광지 저수지 둘레는 약 6.5km이고, 주변 산길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어 시민들에게 조깅과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길이 370m, 폭 3m의 현수교가 동서 방향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물빛다리로 불리는 현수교는 연인들이 사랑을 확인하고 1년 동안 소원을 비는 장소로 이름나있는데요. 사랑을 탐색하는 1단계부터 상징 조형물 둘레에 설치된 솟대에 기원 메시지를 메달아 놓는 7단계까지 사랑과 희망을 기원하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다리 종점부 '사랑 체험봉'에 손을 얹어 사랑을 고백하거나 가정의 화목을 비는데요. 부모와 자녀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사랑의 체험봉'에 손을 올려놓고 가족의 무병장수를 빌고 있었습니다. 사위까지 나와서 부모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모습이 보기 좋더군요.

'은파관광지' 우리말 이름은 '쌀뭍방죽'

▲ 연인과 함께 걸으며 사랑을 만들고, 1년에 소원을 한 가지만 기원해야 이루어진다는 물빛다리. ⓒ 조종안


군산대학교와 인접한 '은파관광지'는 오후가 되면 공기가 맑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넘칩니다. 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흙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나는 자갈길에 초가가 드문드문 서 있고, 인적이 뜸했으며, 밤이면 부엉이가 울어대는 벽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형님을 따라 지금의 은파관광지 부근 백두게에 있던 과수원에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가 탱자나무 숲 사이로 은파저수지를 처음 봤는데요. 금방이라도 물귀신이 나와 옷자락을 잡아당길 것 같아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길가의 이정표나 공문서에도 은파관광지로 표기되는 요즘엔 '미제지(米堤池)'나 '쌀뭍방죽'이 어디에 있는지 군산 시민 중에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말과 멀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요. 소중한 문화재 하나를 저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굽은 귀가 많아 ‘아흔아홉 귀 방죽’이라는 별칭이 붙은 은파관광지 전경. ⓒ 조종안


굽은 귀가 많아 '아흔아홉귀 방죽이라는 별칭'이 붙은 은파관광지는 저수지를 중심으로 나룻리, 한밭골, 절메, 보리마당, 임방절, 새터, 사창골, 방아골, 개정지, 용둘리 등 우리 고유의 옛 지명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은파 관광지'란 명칭은 70년대 중반 개인업자가 '은파(銀波)'를 붙여 유락시설 허가를 내면서 부르기 시작했는데요. 당시에는 이름이 정감이 가고 예쁘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60년대 초에 나온 '군산 시민의 노래' 가사에도 '금파, 은파···'란 대목이 나오거든요.

중종 25년(1530년)에 발간된 '신동국여지승람'에 '미제지(米堤池)'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한때는 '미제방죽', '미제저수지'라 했고, 저수지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을 붙여 '절메 방죽'으로도 불렸습니다.

쌀 미(米) 자에 방죽을 뜻하는 제(堤)가 들어가는 이름 미제지(米堤池)는 우리말로 '쌀뭍방죽'이 되는데요. 은파관광지의 저수지 수로가 옥구 평야의 젖줄이고, 사창(社倉)골, 방아동, 벌이마당 등 부근에 쌀 관련 마을 이름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우리말 이름 탄생 기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저수지 서북쪽에는 벌이(보리)마당, 임방절, 절메산. 동북쪽에 새터, 안백두개. 동남쪽에 방아동, 사창(社倉)골, 남쪽에 용처, 개정리가 자리 잡고 있고, 설화로는 '금 도구통 금 도구때', '애기장수 서울터 만들기', '세 바위 전설'(애기바위, 중바위, 개바위) 등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시인 고은의 고향이자 요람이기도

▲ 은파관광지 입구 휴게소에 세워진 고은 시인의 시비(詩碑). 이날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손님에게 비가 서있는 내력을 설명해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 조종안


가을 햇볕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은물결과 무지개를 만들어내며 솟는 분수를 구경하고 오다가 고은 시인의 시(제목 '삶')가 음각으로 새겨진 시비 앞에 섰습니다. 고은의 시비가 왜 은파에 있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는데요. 은파관광지는 고은의 고향이자 요람입니다.

저수지 둑 건너편 용둘리(용둔마을)에는 고은의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시비를 보는 순간 일제강점기에 이곳을 지나서 등하교 하던 고은의 코흘리개 시절 모습이 그려지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집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군산중학교에 다닐 때도 은파관광지 주변 산길과 논길을 오갔을 터인데요, 남의 참외밭을 얼마나 헤집고 다녔는지, 교복에 단추는 다섯 개 다 달렸었는지, 급우들과는 사이가 좋았었는지 등도 궁금했습니다.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 일본 선생이 연합함대 야마모토 대장이 전사했다면서 너희는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니까 모두 야마모토 대장처럼 훌륭한 군인이 되겠다고 답했는데, 고은 시인은 그보다 높은 천왕 폐하가 되겠다고 해서 무기정학 당했었다는 일화도 생각났습니다.

일제 교육을 받으면서도 집에서 머슴들과 한글을 깨우친 덕에 해방된 후에 4학년으로 월반하니까, 때리던 친구 녀석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계급적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는 고은, 그는 지금도 사춘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웃마을 개사리에 살았던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앞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면서 이름은 밝힐 수 없다는 고은. 사춘기 시절의 짝사랑을 못 잊는 팔순 노인을 보면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고은 시비에 새겨진 시(詩)

제목: '삶'

비록 우리가 몇 가지 가진 것 없어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뭇잎새의 모습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의 소리 들을 일이다
우리가 기역 니은 아는 것 없어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古群山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다 가지겠는가
또 무엇을 生而知之로 안다 하겠는가
잎새 나서 지고 물도 차면 기우므로
우리도 그것들이 우리 따르듯 따라서
無情한 것 아닌 몸으로 살다 갈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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