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연재한 소설 자살도시를 어제 날자로 마쳤습니다. 부드럽고 향긋한 소식을 전해주는 문화란에 걸맞지 않은 어둡고 음울한 내용이었는데, 모진(?) 인내심으로 읽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의 글을 남깁니다.
자살도시는 이미 완성한 상태에서 연재했지만 결말을 어떻게 매듭지을지는 마지막까지 두통거리였습니다. 2가지 다른 결말이 있었는데 어떤 게 나을지 내내 끙끙거리다 어제 실었던 결말을 선택했고 지금도 이것이 최선이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차후에 공개되지 않은 다른 결말을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결말이 어떠하든 이 소설은 제가 예전부터 SF 형태로 구상했지만 설핏한 얼개만 있고 실팍한 알갱이를 채우지 못해 머리 안에서 꿍얼거리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1년여 전에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다 갑자기 뇌리에 스파크가 튀며, 마치 관찰자의 눈에 잡히지 않으려 제멋대로 유동하는 입자들이 현미경 안으로 순식간에 들러붙듯 자살도시라는 컨셉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면 초기 구상은 꽤나 조악했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 큰 그림이 그려지며 4편의 도시 시리즈로 구체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쓴 자살도시는 시간상으로 2편에 속하며, 나머지 3편과 4편 그리고 프리퀄에 해당하는 1편도 이른 시간에 나오도록 매진하겠습니다.
살짝 프리퀄, 3편, 4편을 이룰 스토리를 언급하자면 3부 <단죄(斷罪) 도시>는 자살도시에 나온 아기 재림자가 성인이 되어 겪는 내용이며, 4부 <요격(邀擊) 도시>는 자살도시에 나온 책 '요격의 권리' 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프리퀄은 자살도시 등장인물이었던 유니트, 로빙, 팔로어가 젊은 시절 세계변혁의 꿈을 갖고 혼미한 시대와 싸워나가는 과정을 다룰 것입니다.
자살도시를 쓰면서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지만 필력과 내공의 한계로, 자칫 헐거운 실타래처럼 풀어지게 만드느니 하나의 담화(談話)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저항폭력의 가치와 이것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문제였습니다.
소설의 아이디어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따왔지만, 제게 이 소설을 완성시킨 추동력을 준 건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촛불집회였습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파동 때 전국에서 벌어진 촛불집회가 갈수록 번져가면서 급기야 '폭력시위' 라는 거죽이 씌워졌습니다. 저는 대치중인 전경들이 군중들에게 끌려나왔을 때 대다수 시민들이 '폭력은 안된다!' 며 만류하는 장면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참으로 기묘한 의문과 아이러니에 휩싸였습니다.
당시에 성글지 못했던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자 생활의 무게에 깔려 사그라졌지만, 2008년 한나라당이 주도한 미디어법 개정 사태가 불씨를 되살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촛불을 요격의 정의로 승화시켜라! > 라는 기사를 기고했습니다. 이때 품은 생각과 의문들이 자살도시를 쓰게 만든 힘이자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저를 잡아주며 자살도시를 통해 풀어내려는 이야기들입니다.
왜 버젓이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한테 폭력은 금지돼야 하는가. 법이 악용될 때도 필히 준수해야할 규칙인가. 이외에도 여러 의문이 생겨났지만 폭력이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억압폭력과 저항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또한 법치국가라는 개념이 강자들이 조작한 미신은 아닌지. 그래서 법 준수를 철칙으로 받들지만 실제로 법치국가는 법에 무조건 순응해야 성립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법을 제정하고 올곧게 실행할 때' 이뤄짐을 우리가 잊은 건 아닐까요. 오히려 법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불의(不義)의 규칙'을 거스르지 못하고 받아들인다면 자발적으로 맹종하는 노예사회로 회귀할지도 모릅니다.
현 시대는 세계화와 무한경쟁이라는 쌍끌이 화차(火車)가 양극화와 빈곤의 대물림을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험난한 상황을 종교나 정신수양 때로는 다양한 희망론으로 극복하려하지만 '현실의 악을 두고 희망을 논하는' 행태가 궁극적인 사회악을 퇴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과적으로 반쪽 눈으로 세상의 이면을 외면하고, 아Q처럼 관념의 승리라 자탄하며 스스로 도취하는 절름발이 굴레에 머물 거라 봅니다.
성기고 끈끈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차기작에서는 촘촘하게 벼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자살도시는 이미 완성한 상태에서 연재했지만 결말을 어떻게 매듭지을지는 마지막까지 두통거리였습니다. 2가지 다른 결말이 있었는데 어떤 게 나을지 내내 끙끙거리다 어제 실었던 결말을 선택했고 지금도 이것이 최선이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차후에 공개되지 않은 다른 결말을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초기 구상은 꽤나 조악했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 큰 그림이 그려지며 4편의 도시 시리즈로 구체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쓴 자살도시는 시간상으로 2편에 속하며, 나머지 3편과 4편 그리고 프리퀄에 해당하는 1편도 이른 시간에 나오도록 매진하겠습니다.
살짝 프리퀄, 3편, 4편을 이룰 스토리를 언급하자면 3부 <단죄(斷罪) 도시>는 자살도시에 나온 아기 재림자가 성인이 되어 겪는 내용이며, 4부 <요격(邀擊) 도시>는 자살도시에 나온 책 '요격의 권리' 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프리퀄은 자살도시 등장인물이었던 유니트, 로빙, 팔로어가 젊은 시절 세계변혁의 꿈을 갖고 혼미한 시대와 싸워나가는 과정을 다룰 것입니다.
자살도시를 쓰면서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지만 필력과 내공의 한계로, 자칫 헐거운 실타래처럼 풀어지게 만드느니 하나의 담화(談話)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저항폭력의 가치와 이것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문제였습니다.
소설의 아이디어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따왔지만, 제게 이 소설을 완성시킨 추동력을 준 건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촛불집회였습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파동 때 전국에서 벌어진 촛불집회가 갈수록 번져가면서 급기야 '폭력시위' 라는 거죽이 씌워졌습니다. 저는 대치중인 전경들이 군중들에게 끌려나왔을 때 대다수 시민들이 '폭력은 안된다!' 며 만류하는 장면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참으로 기묘한 의문과 아이러니에 휩싸였습니다.
당시에 성글지 못했던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자 생활의 무게에 깔려 사그라졌지만, 2008년 한나라당이 주도한 미디어법 개정 사태가 불씨를 되살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촛불을 요격의 정의로 승화시켜라! > 라는 기사를 기고했습니다. 이때 품은 생각과 의문들이 자살도시를 쓰게 만든 힘이자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저를 잡아주며 자살도시를 통해 풀어내려는 이야기들입니다.
왜 버젓이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한테 폭력은 금지돼야 하는가. 법이 악용될 때도 필히 준수해야할 규칙인가. 이외에도 여러 의문이 생겨났지만 폭력이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억압폭력과 저항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또한 법치국가라는 개념이 강자들이 조작한 미신은 아닌지. 그래서 법 준수를 철칙으로 받들지만 실제로 법치국가는 법에 무조건 순응해야 성립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법을 제정하고 올곧게 실행할 때' 이뤄짐을 우리가 잊은 건 아닐까요. 오히려 법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불의(不義)의 규칙'을 거스르지 못하고 받아들인다면 자발적으로 맹종하는 노예사회로 회귀할지도 모릅니다.
현 시대는 세계화와 무한경쟁이라는 쌍끌이 화차(火車)가 양극화와 빈곤의 대물림을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험난한 상황을 종교나 정신수양 때로는 다양한 희망론으로 극복하려하지만 '현실의 악을 두고 희망을 논하는' 행태가 궁극적인 사회악을 퇴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과적으로 반쪽 눈으로 세상의 이면을 외면하고, 아Q처럼 관념의 승리라 자탄하며 스스로 도취하는 절름발이 굴레에 머물 거라 봅니다.
성기고 끈끈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차기작에서는 촘촘하게 벼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본문에 기사 링크 걸어놓은 것이 보기 흉하다면, '촛불을 요격의 정의로 승화시켜라' 를 클릭하면 해당 기사로 링크되게 해주세요. 혹시 이것도 적당하지 않다면 기사 제목 소개만으로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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