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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처먹는 자들이..." 이게 노래 가사?

MB시대 이전의 체제 비판적 랩 가사들1

등록|2010.11.03 16:58 수정|2010.11.03 17:14
많은 사람들에게 힙합은 저항의 음악으로 알려졌다. 특히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주로 인종 차별을 비롯해 흑인들의 빈곤에 대한 사회구조적 모순을 폭로하는 곡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서부 올드스쿨 힙합의 거물이었던 아이스 큐브(Ice Cube)의 '블랙 코리아(Black Korea)'라는 곡은 LA 폭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으며, 시카고 출신의 지성적인 래퍼 커먼(Common)은 몇몇 곡들에서 흑인해방을 위한 폭력투쟁 단체였던 블랙 팬더(Black Panther)를 찬양하는 가사를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체제 비판적인 가사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힙합이 단순히 저항적 음악이라고 보긴 어렵다. 힙합과 랩이란 건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들을 일정한 형식에 맞춰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일 뿐, 반드시 무언가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은 아니다.

▲ 지난해 9월 케이블채널 tvN의 한 프로그램 <백지연의 피플 INSIDE>에 출연한 Tiger JK. ⓒ tvN

이에 대해 한국 힙합의 선구자 Tiger JK가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하여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였다.

"힙합이 처음 시작된 흑인 빈민가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감미롭고 정수된 음악에 대해서는 감흥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 음악에 나오는 가사들은 인생이 아름답고 행복하고... 빈민가나 거리의 사람들이 듣기에는 동요같이 들리는 거죠… (중략)… 그런 면에서 힙합 안에서 랩을 저항음악인 동시에 갱스터 음악이라고 많이 오해들 하시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저항적인 것이 아니라 평소 생활을 담은 거잖아요."

따라서 힙합음악은 원래 저항적 음악이라기보단,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계층들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 음악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다.

실제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더 많은 힙합곡들은 마약이나 섹스 등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힙합 음악이 세계적인 주류 음악으로 성장하면서 예전처럼 저항적인 곡들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대신 뮤직비디오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찌와 프라다로 도배된 럭셔리한 래퍼들이 등장한다. 주류적 위치에 올라선 힙합의 현재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한민국 힙합의 위치는?

한편 대한민국의 힙합은 여전히 비주류와 주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또한 대다수의 래퍼들이나 힙합 뮤지션들은 사회 주류와 동떨어진 포지션에 위치해 있다.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드렁큰 타이거나 다이나믹 듀오, 리쌍 등의 그룹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만큼 한국 힙합에서는 여전히 사회 비판적인 곡들을 많이 찾을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2004년도에 발매된 에픽하이의 앨범 수록곡인 'Lesson2'의 가사를 보자.

▲ 에픽하이의 두 번째 앨범 'High Society'(2004). ⓒ 에픽하이

"민주 자본주의=파탄의 숲의 뿌리… (중략) … 배불리 처먹는 자들이 자유경제 삼켜 / 불경기라는 극 꾸며 경쟁심을 깎어 / 내가 왜 내 땀의 열매를 타인에게 바쳐 / 어째 내 꿈을 조립라인에게 맡겨 / Blind 교과서 사상의 학대 / 보수주의가 강요하는 상상의 낙태… (중략) …투표권은 노예선의 노 뿐…" - 에픽하이, 'Lesson2' 중

한 때 본인을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혔던 에픽하이의 타블로의 가사다. 여담이지만, 물론 이 곡은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참 가관이다. "이 땅의 법이 출석부라면 난 결석하리"라는 가사가 청소년들의 무단 결석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또한 같은 앨범의 수록곡인 'My Ghetto'의 가사를 보자.

"정치여 모든 법이여 / 빛을 보는 자들만의 벗이여… (중략) … 편안함의 과식 속에 허탈하는 강남 / 꿈의 바다 앞에서 막다른 한강 / 돈 많다는 자의 탐욕이 불타는 오늘 밤 / 사랑은 과속으로 폭발하는 잠깐" - 에픽하이, 'My Ghetto' 중

한편 사회에 대한 독설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래퍼인 UMC를 빼놓을 수 없다. 2005년도에 정식 발매된 UMC의 앨범 <XSLP>의 수록곡 'XS Denied'의 가사를 보자.

"무럭무럭 자란 아들 총선에 출마했군요 / 드렁큰타이거 훨씬 이전에 수건에 이름을 썼군요 / 진정한 힙합전사 우리나라 국회의원 / 졸라 큰 차 끌고 다니고 매일 서로 Diss 하잖아! … (중략) … 노동자들을 자른게 너 / 이승희 사진을 자른게 너 / 미군의 합법적 살인을 방치해 둔 것도 너야 / 근데 왜 내 입만 막아…" - UMC, 'XS Denied' 중

▲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1집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겉그림. ⓒ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지금은 은퇴했지만 한국 힙합 초창기 때 깊이있는 음악과 철학적인 랩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이하 진말페) 역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을 드는 가사를 선보였는데, 특히 2001년 부평에서 벌어진 대우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직접 다녀온 뒤 만든 '3월, 부평'이라는 곡의 가사는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진말페 1집 수록곡)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미없는 토론을 벌이는 객기에 찬 학생들 / 객기가 남긴 상처를 안고 그들은 왜 자꾸 자신을 위험으로 내던지는지 / 도대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 접근이 차단된 비공식적 사실들 / 9시 뉴스에서 쇠파이프를 휘두른 대학생을 잡을 때 / 곤봉에 무생물처럼 무너진 다음 30초는 찾을 수 없지/ 술자리에선 9시 뉴스를 인용하며 열을 올리고 / 2차에서는 주식 이야기 / 3차에서는 여자 이야기가 이어지겠지만 / 어딘가에서는 어딘가에서는…" - 진말페, '3월, 부평' 중

대한민국 힙합의 단골 주제는?

이외에도 오래돼서 구체적으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체제 비판적인 가사들은 한국 힙합에서 단골 주제였음이 분명하다. 이 당시 체제 비판적 가사들의 특징은 첫째,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 노동-자본 간의 모순에 대한 비판 등이 주를 이뤘다는 점과 둘째, 비판 대상이 모호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특징은 한국에서 힙합음악이 시작되고 발전한 시기를 보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한국에서 힙합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97~98년경이다. IMF 사태로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고 신자유주의적 질서로의 체제 재편이 진행되는 시기와 한국 힙합 음악이 시작되고 발전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즉, 당시 젊은이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현실에 대한 냉소는 자연스럽게 랩 가사에 묻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판 대상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순들을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쉽사리 결론지을 수 없는 어려운 주제였다. 대다수 래퍼들은 모순 그 자체를 신랄하게, 혹은 솔직하게 묘사하는 수준의 가사를 선보였다. (반면 1세대 래퍼들보다 훨씬 후대에 등장했고, 대학 시절 사회주의적 사상을 접한 타블로는 '자본주의'를 비교적 명확한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 대상의 모호성은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180도로 달라진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일면서, 랩 가사들의 칼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명박 정부를 겨누기 시작했다. 마치 진보운동 진영이 정치적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추상적 대상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이명박 정부라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 대상이 생긴 후 활성화된 것과 비슷하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 봇물 터지듯 쏟아진 MB 정권 비판 랩곡들은, 반MB 정서가 약간 소강 상태에 이른 지금까지도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 다음 편에서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각종 음반을 통해 신랄하게 MB 정권을 비판하는 랩 가사들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Hiphop The Vib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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