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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86회)

간룡척(看龍尺) <1>

등록|2010.11.05 09:09 수정|2010.11.05 10:37
가슴 한 가운데 화살이 꽂혀 사내는 숨이 끊겨 있었다. 화살을 맞은 자리는 정면의 흉당(胸膛)이라 부르는 가슴 한가운데였다. 더군다나 화살을 날린 거리가 가까워 살 속 깊이 파고든 것 역시 치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한식이 눈앞으로 다가온 탓에 들판의 이곳저곳엔 선영을 찾는 참배객의 모습이 눈이 띄고 봄나들이를 나온 기녀의 호들갑스런 깔깔거림이 둥기당 둥당! 박자를 맞추는 장고소리에 어우러지고 있었다.

지명으로 보면 광주군 언주면의 역삼동(驛三洞)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있는 곳이다. 이곳엔 역촌을 비롯해 말죽거리 등의 역말이 형성돼 열두 개의 작은 역을 관리하는 찰방(察訪)에선 말과 숙소를 제공하였고, 주변 마을엔 어진 사람들이 많이 살아 양재(良才)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도찰방에서 반각 남짓 떨어진 삼거리의 야트막한 둑길 아래에 사체는 거꾸러져 있었다. 서른은 넘고 마흔은 안 돼 보이는 사내로 중인으로 뵈는 행색엔 먼 길을 다녀온 듯 미투리가 상당히 닳은 상태였다.

현장에 나간 정약용은 잡인의 범접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검안에 들어갔다. 사체는 죽은 지 여러 날이 된 탓에 코 밑에 진마유를 바른 서과는 죽은 자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두 개의 화살이 뚫고 들어간 살 주변엔 핏물이 약간 흘러 있었다.

죽은 자에게 살을 쏘았다면 상처주윈 당연히 건조하고 하얄 것이다. 피가 없으니 손으로 누르면 맑은 물이 나올 것이나 상처주위에 검은 상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았을 때 화살을 맞은 게 분명했다.

"죽은 자는 두 대의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만, 범인이 화살촉을 뽑아갔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냐. 혹여 창(槍)에 찔린 상처가 아니겠느냐?"

"창에 찔린 상처는 얕으면 좁고, 깊으면 창자루가 뚫고 들어가 상흔이 둥급니다. 이건 창이 아니라 화살 맞은 게 분명합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사내를 살해한 자는 피부를 찢고 화살을 뽑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사체의 입과 눈은 열려 있고 상투는 흐트러진 채였다. 여느 사체와 다를 바 없이 두 손은 약간 쥔 채 피육은 도드라졌다. 창을 맞았다면 내막(內膜)이 뚫리고 창자가 밖으로 빠져나올 게 분명했다.

"검시체식(檢屍體式)으로 볼 때, 사체는 죽은 지 얼마나 됐느냐?"
"악즙이 코와 입에서 흐르는 것으로 보아 열흘쯤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열흘?"
"검시체식에 의하면 시체는 죽은 지 2~3일이면 입이나 코, 뱃가죽이나 양겨드랑이 등의 살빛이 약간 푸르게 됩니다. 열흘이 지나면 코와 귀 안에서 악즙이 흘러나오고 이때는 배가 팽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몸이 비대한 경우다."
"하오면?"

"이 사체는 죽은 지 열닷새는 지난 거로 보인다. 네가 말한 것처럼 몸이 비대한 경운, 검시체식에서 지적한 것과 같을 것이나 형체가 마르고 약한 사람은 열닷새가 지나야 그렇게 된다. 계절이 봄이니, 아직은 입술이 뒤집어지고 구더기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의 신원에 대해 조사한 것은 사내의 좌측 허리께에서 나온 지남쇠 때문이었다. 요즘엔 방위를 살피느라 풍수사들이 대부분 윤도(輪圖)를 가지고 다니기에 지남쇠를 지닌 경운 많지 않았다. 오래 동안 지닌 것으로 보이는 손때 묻은 지남쇠 중앙에 '유(乳)'라 음각으로 패인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죽은 자의 몸에 신분을 알 수 있는 관인이나 호패가 없는 데다 지남쇠만 속옷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면, 이 사낼 해친 자가 몸에 지닌 물건을 모두 가져가고 이것만은 발견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신분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정약용은 주변에 아직 놀이패가 돌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사헌부 서리배를 딸려 서과로 하여금 탐문케 하고 자신은 관상감(觀象監)을 찾아가 지리학훈도 송길주를 바침술집에 청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사건이 일어나 도움 청할 일이 생겨 찾아왔습니다."

용의 형상을 한 지남쇠를 정약용이 내놓자 그것을 보고 놀란 표정인 송길주는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낮추었다. 예기치 않은 물건 임이 분명했다.

"이건 지남쇱니다만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보통의 지남쇠보다 작은 '간룡척(看龍尺)'으로 쓰이는 데 용도가 다릅니다."

"용도가 다르다니오?"
"간룡척은 땅의 길흉을 살피는 게 아니라 후손을 얻기 위해 여인네를 고를 때 사용하는 잡(尺)니다."

"여인네를 골라요?"
"보시다시피 간룡척 중앙엔 '유(乳)'란 글자가 음각으로 패였는데 이것은 간룡척을 지닌 자의 신원을 나타냅니다."

"오호!"
"사람들은 이걸 지남쇠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틀린 건 아니지요. 무신년(戊申年;정조12년)에 전하께서 관상감 감여(堪輿)들을 불러  그 가운데 네 명을 추려내 수원(水原)으로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네 명의 감여들은 와(窩) · 겸(鉗) · 유(乳) · 돌(突)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어떤 일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풍수사들이 떠난 후 대비마마가 관상감에 들어와 영사(領事)와 제조(提調)를 힐책하고 서약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 되어 소인도 대비마마께 충성서약을 했습니다."
"으음."

"전하께선 1년여가 지나도 풍수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정수찬 나으릴 해미현(海美縣)의 유배지에서 불러 올리셨습니다. 아마 경술년 이전의 일을 조사하시려는 생각이셨습니다만 벽파(僻派) 중신들의 반대로 방향을 바꾸신 것으로 보입니다."

"방향을 바꿔요?"
"예에. 소인은 그 점만 알 뿐 자세한 건 아지 못합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내가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으로 유배됐으나 해미에 있었던 건 고작 일주일이었어요. 유배가 풀린 건, 전하의 총애가 내린 것으로 알고 사헌부에 들어갔습니다만 말씀을 듣다 보니 새삼 깨닫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정약용으로 봐선 뜻밖의 상황이었다. 자신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벽파 중신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한 탓에 그걸 깨뜨리려 자신을 풀어준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송길주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전하께서 자신을 가까이 오게 한 이유가 도대체 뭔가? 송길주가 한소릴 날렸다.

"왕실에 전해지는 간룡법은 나인(內人)을 가려뽑는 비방입니다만, 보통은 <단결(丹訣)>을 위주로 나중에 <현녀(玄女)>가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음양가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걸 익혀 점차 전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몸을 만듭니다. 예를들어 진(眞)에 해당하는 미인으로 홍상미판(鴻潒未判) 한 명을 뽑고, 선(善)에 해당하는 미인으로 수경이촌(首經已忖)을 한 명을 뽑고, 미(美)에 해당하는 미인으로 미경산육(未經産育)을 한 명 뽑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진선미를 뽑는다면 홍상미판은 어떤 기준인가? 여기엔 기러기가 나온다. 기러기는 '양(陽)'을 따르는 새다. 또한 상은 질펀하게 물이 흐른다는 뜻이고 미판은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니 전체적인 의미는 '월경이 시작되기 전의 처녀'란 뜻이다.

다음으로 수경이촌의 수경은, '비로소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수는 머리를 나타내는 게 아니고 '정해진 곳에 이르거나' '비롯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전체적인 뜻은 월경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미경산육은 길이 뚫렸으나 완벽한 게 아니고 설령 사내를 접했어도 출산경험이 없어야 했다. 이러한 <음양가>의 입장관 달리 도교는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게 정약용이 가져온 간룡척 위에 패인 글자였다.

"전하께서 네 명의 감여를 수원에 파견한 것은 좋은 땅을 찾기 위함입니다. 어떤 땅이 좋은 땅이겠습니까. 관상감에선 명당이란 곳을 말했지요."

"어떤 자립니까?"
"살아있는 여인의 몸이, 죽어서는 명당이라 한 것이죠."
"그게 무슨···."

"천하의 명당은 여인의 몸을 그대로 옮겨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풍수법에선 이걸 와겸유돌(窩鉗乳突)이라 하지요. 이러한 네 가지 형상을 접목시키면 음패(陰貝)라 부르는 국(局)이 형성됩니다."

첫째 '와'란 더러는 얕고 기우는 모습이고, 둘째는 '겸'이니 간혹은 횅하게 열리거나 다물고 있으며, 셋째는 '유'니 길쭉하게 내밀거나 경사가 심해 두두룩한 모습이며, 넷째는 '돌'이니 높거나 낮게 또는 나지막이 솟아있는 유형이다.
정약용이 곤혹스런 낯으로 상체를 펴자 송길주는 낯을 굳힌 채 말을 깔았다.

"소인이 지금껏 얘기한 것은 항간에 알려진 얘기지만, 전하께서 네 명의 풍수사를 파견한 건 세상을 뜬 사도세자의 장지를 현륭원으로 삼은 데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자리가 다시없이 좋은 자린 지 알아봐야 하기 때문에 관상감의 감여들을 파견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조정에선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상소가 이어지고 있었다.

화평옹주는 선대왕2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세자와 친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묻힌 영우원(永祐園)의 문젯점들을 지적했었다.

"전하, 신 금성위 박명원 아뢰옵나이다. 장헌세자가 잠들어 계신 영우원은 네 가지 문젯점이 있는 것으로 첫째는 원소의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렸으며,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며,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위의 하나만 있어도 불미스러운 데 뱀 같은 미물이 마음대로 출입하고 있으니 어찌 안심할 수 있겠나이까!"

박명원의 상소는 사도세자가 누워계신 영우원의 일은 지술에 밝은 신하에게 물어 시급히 처리해야 한다고 주청했었다.

[주]
∎감여(堪輿) ; 풍수사
∎간룡척(看龍尺) ; 지남쇠
∎공서파(攻西派) ; 천주교인을 공격하던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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