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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운치있는 정자, 표현할 수 없는 기품 넘쳐

고려 문신 조승숙이 지은 교수정

등록|2010.11.05 11:55 수정|2010.11.05 12:00

교수정고려 말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 선생이 세웠다는 교수정 ⓒ 하주성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도로변에 커다란 노송 숲이 있다.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낮은 담에 둘러쌓인 고풍스러운 정자 하나. 고려 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태조 7년인 1398년에 세운 교수정이다. 이곳에 정자를 세운지 600년이 넘었다.

조승숙(1357~1427)은 고려 말 우왕 7년인 138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와 교수정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조승숙 선생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 교수정. 그곳에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교수정경남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도로변에 서 있다 ⓒ 하주성



교수정낮은 담장 안에 서 있는 교수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76호이다. ⓒ 하주성




소나무 숲속에 선 교수정
     

교수정 주변은 소나무 숲이다. 지나는 길에도 고목으로 변한 소나무들이 눈에 띤다. 낮은 담장을 둘러친 교수정은 정면 삼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정자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자를 지은 이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이야 도로변이지만, 아마 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주변이 숲이었을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뒤편에 있는 작은 능선을 생각해보면, 이 정자의 처음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있는 산 밑, 냇가 곁에 이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아이들이 글을 배우러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선생은 일어서 미소를 띄우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을 것이다. 

교수정정면 삼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으로 지어진 교수정 ⓒ 하주성



정자 한편 뒤편으로 몰아 드린 방 ⓒ 하주성



편액작은 정자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 하주성




성종이 내린 사제문


교수정을 바라보면 좌측 뒤편에 방을 드렸다. 정자에 방을 놓을 때는 중앙에 놓거나, 아니면 뒤편 중앙에 놓는다. 그러나 교수정의 방은 뒤편 한 편으로 몰아놓았다. 정면으로 두 칸, 측면에 한 칸 방을 놓고 이곳에서 기거라도 했던 것일까? 방 앞에서 마을을 바라다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여기저기 걸린 편액에서 이 정자의 모습을 본다. 밖으로 나와 냇가곁에 가니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에는 음각을 하고 붉게 칠을 한 글이 적혀있다.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그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뽑은 글귀라는 것이다.

성종이 내린 하사문 중에서 뽑은 문구라고 한다 ⓒ 하주성



교수정어디서 보아도 교수정은 그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정자이다 ⓒ 하주성




비는 정자의 담 밖, 냇가 바위 위에 서 있다. 자연 암반 위에 세운 비를 보려고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래도 겨우 비문을 찍고 돌아선다. 이 비 앞에서 보는 정자의 운치가 남다르다. 그래서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일까? 넘어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또 다른 정자의 멋. 그래서 세상은 '새옹지마'라고 한 것일까?

정자를 한 바퀴 더 돌아본다. 참으로 작지만 풍취가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잘 정리가 된 주변이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일각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니,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는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자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감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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