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만추로 달려가고, 감나무의 감은 노랗다 못해 빨갛게 익었다.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봄에 꽃을 피운 나무는, 찌는 더위와 비바람이 언제냐고 묻기나 하듯이 의연하게 결실을 맺었다. 잎새 하나가 단풍으로 물드는 것과, 나무에 열매 하나가 여물기까지는 사람의 수고와 대자연의 조화가 있었다.
경제 규모로, 세계 스무 개 나라의 정상들이 서울에 모인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 파티의 주인은 우리나라이고, 열세 번째로 잘 사는 부자나라다. 파티가 열리기까지 모두가 열심히 일했고, 그 이면에는 일한 만큼이나 숱한 눈물과 땀이 있었다. 우리가 이 정도로 큰 소리 치며 살게 된 것은, 결코 권력자의 힘이 아니라 민초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요 결실이다.
그런데 이제 먹고 살만해서 그런지 유감스러운 게 한 가지 있다. 이순신과 김구, 유관순, 안중근에 대한 관심은 없고, 그저 연예인의 연애담, 성형수술, 결혼설, 심지어 연예인이 들었던 가방 하나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인터넷에 도배가 된다. 할아버지 이름은 몰라도 가수 이름과 TV 드라마는 궤고 있는 게 오늘의 청소년이고, 부동산, 주식, 펀드, 로또에 사족을 못 쓰는 게 오늘의 어른들이다. 왜 이렇게 우리네 삶과 사회가 경박해지는지 유감이 아닐 수가 없다.
G20 정상회의 폐막일 다음날이 '전태일 열사 40주기'다. 우리는 전태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순히 분신한 노동자로만 알고 있으면 곤란하다. 우선 그는 '부단히 노력하고 부지런했던 사람'이다. 구걸, 구두닦이, 신문팔이, 손수래 뒤밀이, 우산장사, 아이스케이키 장사, 담배꽁초 줍기 등 더 이상 천해 질 수 없는 처절하게도 밑바닥 생활을 했다.
그는 또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다. 청옥고등공민학교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학교를 다녔다. 그곳은 중학교를 못간 청소년들이 다닌 학교다. 전태일은 무척이나 공부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결국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가 재단사 일을 하다가 해고 된 적이 있는데, 열여덟 살 태일은 어머니를 졸라, 거금 2천7백 원으로 '축조 근로기준법해설서'를 구입했다. 여름에는 모기와 사투를 벌이고, 겨울에는 추운 골방에서 이불을 넘겨 덮고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그때 어려운 한문이 많아서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하는 넋두리를 하게 된 것이다.
또 전태일은 '불의에 저항하고 행동한 사람'이다. 그가 대구에서 상경한 1964년부터 분신하기까지인 1970년은 서슬 퍼런 박정희 시대였다. 노동운동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의 십대 여공들의 작업 환경은 열악한 정도를 넘어섰다. 햇빛조차 볼 수 없는 다락방에 빼곡히 들어앉아 하루 15시간 씩 일요일도 없이 일을 해야 했고, 한 달 급여로 겨우 천오백 원을 받았다. 야근 때 잠을 이기기 위해 각성제 주사를 맞아가며 몸을 망가뜨리고, 폐병으로 각혈하는 여공을 해고하는 것에 분노했다.
청년 전태일은 '바보회'와 '삼동회'를 조직하여 업주, 노동청, 언론, 청와대에 진정을 하고 맞서 싸운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그의 앞에는 철옹성 같은 거대한 장벽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은 나락이었다. 사방팔방이 모두 막힌 현실 앞에서 '허울뿐인 근로기준법'책을 태우고 스스로 몸을 불사른 것이다. 이렇듯 전태일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을 뿐 아니라 구조적 모순과 불의에 온몸으로 항거한 진정 용기있는 청년이었다.
G20이 열리는 서울, 전태일이 간 지 40년, 오늘을 사는 20대는 이른바 '알바'라는 신종 직업에 상당수가 종사하고, 로또 가게 앞을 서성이는 기성세대는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몰라 불안하다.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지만, 마약 중독과도 같은 제로섬 게임에 빠져 '정글의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만 우리 주변에 득세하고 있다.
이 가을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한쪽에는 전태일 추모 문화제가, 또 한쪽에는 G20 축제가 열리고 있다. 양극단이 동시 상영되는 가운데 노조 지부장 김준일이 분신했다. 2010년 오늘에도 반복되는 이 비극의 불꽃을 보노라면, 역사를 향해 역류하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분신과 축제'라는 모순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듯이 가을 낙엽을 밟듯 스쳐지나간다. 1970년과 2010년의 정치적 대척과 시대적 역설은 우리의 슬픔지수를 드높인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화염에 휩싸여 절규한지 40년을 맞은 오늘, 전태일이 그토록 바랬던 평화시장의 평화가 진정 이 땅에 정착되었는가? 이 가을 전태일 열사의 묘비에 왠지 모를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경제 규모로, 세계 스무 개 나라의 정상들이 서울에 모인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 파티의 주인은 우리나라이고, 열세 번째로 잘 사는 부자나라다. 파티가 열리기까지 모두가 열심히 일했고, 그 이면에는 일한 만큼이나 숱한 눈물과 땀이 있었다. 우리가 이 정도로 큰 소리 치며 살게 된 것은, 결코 권력자의 힘이 아니라 민초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요 결실이다.
G20 정상회의 폐막일 다음날이 '전태일 열사 40주기'다. 우리는 전태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순히 분신한 노동자로만 알고 있으면 곤란하다. 우선 그는 '부단히 노력하고 부지런했던 사람'이다. 구걸, 구두닦이, 신문팔이, 손수래 뒤밀이, 우산장사, 아이스케이키 장사, 담배꽁초 줍기 등 더 이상 천해 질 수 없는 처절하게도 밑바닥 생활을 했다.
그는 또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다. 청옥고등공민학교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학교를 다녔다. 그곳은 중학교를 못간 청소년들이 다닌 학교다. 전태일은 무척이나 공부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결국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가 재단사 일을 하다가 해고 된 적이 있는데, 열여덟 살 태일은 어머니를 졸라, 거금 2천7백 원으로 '축조 근로기준법해설서'를 구입했다. 여름에는 모기와 사투를 벌이고, 겨울에는 추운 골방에서 이불을 넘겨 덮고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그때 어려운 한문이 많아서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하는 넋두리를 하게 된 것이다.
또 전태일은 '불의에 저항하고 행동한 사람'이다. 그가 대구에서 상경한 1964년부터 분신하기까지인 1970년은 서슬 퍼런 박정희 시대였다. 노동운동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의 십대 여공들의 작업 환경은 열악한 정도를 넘어섰다. 햇빛조차 볼 수 없는 다락방에 빼곡히 들어앉아 하루 15시간 씩 일요일도 없이 일을 해야 했고, 한 달 급여로 겨우 천오백 원을 받았다. 야근 때 잠을 이기기 위해 각성제 주사를 맞아가며 몸을 망가뜨리고, 폐병으로 각혈하는 여공을 해고하는 것에 분노했다.
청년 전태일은 '바보회'와 '삼동회'를 조직하여 업주, 노동청, 언론, 청와대에 진정을 하고 맞서 싸운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이 그의 앞에는 철옹성 같은 거대한 장벽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은 나락이었다. 사방팔방이 모두 막힌 현실 앞에서 '허울뿐인 근로기준법'책을 태우고 스스로 몸을 불사른 것이다. 이렇듯 전태일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을 뿐 아니라 구조적 모순과 불의에 온몸으로 항거한 진정 용기있는 청년이었다.
G20이 열리는 서울, 전태일이 간 지 40년, 오늘을 사는 20대는 이른바 '알바'라는 신종 직업에 상당수가 종사하고, 로또 가게 앞을 서성이는 기성세대는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몰라 불안하다.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지만, 마약 중독과도 같은 제로섬 게임에 빠져 '정글의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만 우리 주변에 득세하고 있다.
이 가을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한쪽에는 전태일 추모 문화제가, 또 한쪽에는 G20 축제가 열리고 있다. 양극단이 동시 상영되는 가운데 노조 지부장 김준일이 분신했다. 2010년 오늘에도 반복되는 이 비극의 불꽃을 보노라면, 역사를 향해 역류하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분신과 축제'라는 모순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듯이 가을 낙엽을 밟듯 스쳐지나간다. 1970년과 2010년의 정치적 대척과 시대적 역설은 우리의 슬픔지수를 드높인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화염에 휩싸여 절규한지 40년을 맞은 오늘, 전태일이 그토록 바랬던 평화시장의 평화가 진정 이 땅에 정착되었는가? 이 가을 전태일 열사의 묘비에 왠지 모를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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