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그림<불교 미술의 해학> ⓒ 불광
<불교 미술의 해학>을 읽으면서 '화두' 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미륵불이 결가부좌를 하지 않은 까닭은?'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불좌상의 경우 결가부좌를 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륵불상의 경우 의자에 앉아 있거나 쪼그려 앉아 있는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다. 왜 그럴까?
미륵불은 미래 인간 세상에 내려올 부처를 일컫는다. 미륵불이 내려와 만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물이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며, 사시 계절이 순조로워서 질병이 없고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롭고 서로가 즐거워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람들은 미륵불이 내려올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다. 권력의 횡포와 가진 자들의 부정이 난무하던 세상일수록,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정직한 노동으로 사람다운 생활을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일수록, 미륵불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강해졌다. 그런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미륵골, 미륵댕이, 미륵리, 미륵당, 미륵산, 미륵내, 그리고 수많은 미륵불상들….
마을과 산천의 이름에 미륵을 붙이고, 미륵불상을 조각해 세우면서 미륵 세상을 꿈꾸었다. 하루라도 빨리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힘겨운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갈망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미륵불은 올 기약조차 없었다. 조급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미륵불좌상의 모습에 반영되었다.
▲ 보은 법주사 마애 미륵불결가부좌를 하지 않고 쪼그려 앉은 모습이 특이하다. ⓒ 권중서
결가부좌는 빨리 중생에게 오시기에 불편한 자세이다. 급한 마음이라 한시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다. 오신다면 미륵 부처님의 등이라도 떠밀어서 모시고 싶은 간절함이 절절히 묻어 있는 것 같아 해학적이다. (책 속에서)
<불교 미술의 해학>은 종교로서의 불교를 떠나 우리 조상들의 삶과 자취가 속속들이 묻어 있는 생활문화로서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쪼그려 앉은 미륵불상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은 단지 불교란 종교에 한정되어 나타났던 건 아니었다.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구원자를 그리워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꿈이기도 했다.
힘겨운 삶을 살던 이들은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의 현실에 맞섰다. 삼국시대 이래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불교 건축, 조각, 미술품에서도 그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에는 잠자리보다 작은 용이 있고, 개구리에 짓눌려 버둥대는 용도 있다. 해남 대흥사 수미단에는 술에 취한 듯 해롱대는 용이 있다. 신비스럽고 지엄한 존재로서의 용은 어디로 가고 작은 미물에 불과한 잠자리, 개구리만도 못한 용이 등장했을까.
부처님의 세계는 절대 평등의 세계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각자 자기의 삶을 최고로 느끼고 살아가는 연화장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발아래인 수미단에는 별의별 종류의 생명들이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서로 간 존재의 의미를 존중하며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듯이 잘난 놈, 못난 놈이 함께 수미단에 빼곡히 나타난다.(책 속에서)
지상의 종교 또한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종교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표현한다. 풍자와 해학은 힘없는 서민들이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표현하던 수단이었다.
<불교 미술의 해학>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다. 권력의 횡포와 가진 자들의 부정이 난무하던 시절,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을 조롱하며 새 세상을 향한 갈망을 간직하고 힘겹게 살아왔던 이들의 애환을 속속들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권중서/불광/2010.3/18,000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