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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상공인으로 식민지 조선에 뛰어들다

[박용만과 그의 시대 31] 유일한은 숙주나물을 건강식품으로 판매했다

등록|2010.11.10 12:05 수정|2010.11.10 12:05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정치적 자립도 '독립'이지만 경제적 자립도 '독립'의 한 기반이다. 유일한은 정치적 투사의 길 대신에 상공인으로서 식민지 조선에 뛰어들었다.

▲ 10살 때 미국으로 조기유학한 유일한은 박용만의 멘토링을 받았다. ⓒ 독립기념관

30세의 젊은 비즈니스맨 유일한이 북간도에서 부모를 만난 것은 1925년. 10살 때 박희병의 손을 잡고 태평양을 건너간 지 무려 20년 만이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보낸 1백 달러로 논을 사서 생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이 만주 벌판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셀 수 없었다.

유일한은 동포들의 질병 퇴치를 위해 제약사업에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중국인이었던 부인이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더 쉽게 했을지도 모른다.

1926년 그는 서울에 들어가 YMCA 안에 미국식 약방을 차렸다. 처음에는 염색약, 위생용품, 의약품을 미국에서 수입 판매했다. 차츰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플라민), 혈청 등 국민보건에 직결되는 약품들을 우선적으로 공급했다. 모르핀을 취급하자는 부하직원의 건의는 호통을 쳐 물리쳤다.

3년 후 유한양행을 설립해서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미국 제약회사들의 대리점이 됐고 주요 제약회사의 하나로 발전했다. 일제의 견제로 사업이 어려워지자 유일한은 가족들을 데리고 193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유일한은 미국의 투명한 경영기법을 실천했다. 한국사회의 관행이기도 했던 정치자금을 제공하거나 검은 돈은 일체 거래하지 않았다. 대신 세금은 어김없이 납부했다. 정직한 납세는 미국 같은 곳에서는 비교적 일반화 돼 있으나 한국에서는 미련한 짓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얘기가 교과서에까지 실린 적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자산 면에서가 아니라 윤리 면에서 성공 모델이 된 것이다. 한국의 최고경영인들과 경제학 박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그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뽑혔다. 소년병학교에서 박용만은 생도들이 독립군 장교로서의 자질을 기르고 조국 근대화에 헌신할 것을 새기게 했다. 그런 정신교육을 이미 소년기에 철저하게 받았으니 유일한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뽑힌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기업의 이윤을 교육 사업에 투자했다. 유한실업학교, 유한공업고등학교, 유한전문대학을 설립해서 7천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죽기 전 자신의 지분 주식을 모두 유한재단에 기증했다.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YWCA(한국여자기독청년회)에 기증함으로서 모든 사유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래 오직 할 게 없으면 사내자식이 숙주나물 장사를 한단 말이냐? 그건 아녀자들이나 할 짓이 아니냐?"
"그게 아니에요. 아버지. 숙주나물 사업은 돈을 많이 버는 큰 사업이에요."

북간도에서 다시 상면했을 때 부자지간에 주고받은 대화였다. 미시간 주립대학을 다닐 때 유일한은 미국친구 월리 스미스와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키운 뒤 건강식품으로 판매했다.

졸업 후 1921년 상하기 쉬운 숙주나물을 통조림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라초이(La Choy)'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숙주나물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중국음식 '찹수이'에 많이 넣는 재료다. 통조림화 함으로서 각지의 중국음식점에 대량공급을 가능케 했다. 유일한이 부사장이었던 라초이 회사는 4년 만에 자그마치 50만 달러의 매상을 올렸다.

그 후 라초이를 그만 두고 보유주식을 팔아 5만 달러로 유한주식회사를 설립했다.중국에서 손수건, 타월, 식탁보 등을 수입했는데 한인이 세운 무역회사로는 가장 컸다. 그는 사장에 서재필, 부사장에 정한경을 영입했다.

▲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의 '한인자유대회' 행진. 맨 오른쪽에서 그때 나이 24세의 유일한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 독립기념관


해방이 되자 유일한은 1947년 귀국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한국에 투자할 미국 회사들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데 문제가 생겼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은 유일한을 상공부장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것을 거절했다고 해서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꾹 참고 미국에 머물다가 1953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유일한은 10살 때 박용만의 숙부인 박희병이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곧 박용만이 있는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로 가 함께 살다가 박용만이 덴버로 이주해서 직업소개소 겸 숙박소를 운영할 때 덴버로 같이 옮겨갔다. 커니 시로 다시 온 게 13살 때였고 그때서야 '스쿨보이'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만능 운동선수였고 성격이 활달했다. 구김살 없는 태도로 교내의 여러 그룹활동에 참가했다. 변론반 반원, 미식축구 선수, 육상, 야구 등 커니 공립학교에서 수학한 어느 학생 보다 활발한 과외활동을 했다.

▲ 소년병학교 야구반. 앞줄 오른쪽 첫번째가 유일한. 뒷줄 중앙이 코치 박용만. ⓒ 독립기념관


▲ 커니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팀 일원으로 뛰었던 유일한(1912년) ⓒ 독립기념관


1914년 헤이스팅스 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후 미시건 주립대학으로 진학했다. 1909년서부터 여름방학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소년병학교'를 3년 마친 유일한은 1911년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겨우 16살 밖에 되지 않은 최연소자였고 같은 졸업생 중에 최고령자는 47세의 조진찬이었다. 조진찬은 1904년 나이 40세 늘그막에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에 이민 온 사람이었다. 그때 7살짜리 아들 오홍을 같이 데리고 왔는데 6년 후 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받았다.

▲ 소년병학교 교관과 생도들(1910년).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교장 박용만, 둘쩨줄 북 뒤의 소년이 조오홍, 맨뒷줄 왼쪽에서 5번째가 유일한 ⓒ 독립기념관


조진찬은 하와이에서 본토로 건너 와 커니 시 인근에서 농장을 임대경영하고 있었다. 박용만의 구상을 듣자 그는 두 말 없이 농장을 훈련장으로 내놓았다.

그의 농장에 소년병학교의 기를 세우고 군사훈련을 시작한 건 1909년 6월. 화씨 100도를 넘게 태양이 지글거리는 한 여름이었다. 13명의 생도들이 나팔 소리에 맞춰 아침에는 농장일을 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일과를 시작했다. 

▲ 군복차림의 늙은 훈련생 조진찬 ⓒ 독립기념관



조진찬은 농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보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군사훈련도 받았다. 네브래스카 평원에 쏟아지는 한 여름 불볕은 가마솥 같았다. 금세 군복이 물걸레처럼 젖는데도 조진찬은 개의치 않았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왜놈을 향해 총을 쏘기는 늙은이의 총알도 젊은이의 총알만치 뜨겁다."

그의 말이었다.

▲ 한 여름 불볕 속에서 사격훈련하는 생도들. 왼쪽에서 3번째가 당시 46세로 최고령자였던 조진찬(1910년) ⓒ 독립기념관


조진찬의 막내며느리가 한때 한국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부르던 동요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여라...'를 작사했다. 근래 그 곡이 일본의 아동가요를 차용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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