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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항쟁에 대한 의지, 들불처럼 타오르고

[박용만과 그의 시대 32] 저 원수 하나 없이 할 공부

등록|2010.11.12 10:49 수정|2010.11.12 10:49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저 원수 하나 없이 할 공부'라는 말은 1909년 9월 22일자 '신한민보'에 나온다. 박처후가 기고한 글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 인근 한인 조진찬의 임대농장에 1909년 6월 초 '소년병학교' 깃발이 내세워지고 처음 하기군사훈련이 실시됐다.

생도의 한 사람으로 훈련을 마친 박처후가 기고한 기고문의 제목은 '오인(吾人)의 급선무는 재숭무(在崇武)'. 풀이하면 '우리의 급선무는 무력추구'

▲ 박처후 ⓒ 독립기념관

"나의 지극히 사랑하고 믿는 여러 형제자매들은 이 세상에 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여 이 글을 한 번 보시고 우리가 다 장래에 어찌해야 좋을 것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서로 각 처 원방에 산재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나 마음과 뜻은 서로 상통돼 고국을 사랑하고 불쌍한 민족을 구제코자 하나 그러하나 각 지식과 학력이 천단하여 날마다 근심하고 탄식만 하니 그러하면 아무 유익도 장래에 없을지니 우리가 서로 알고 생각나는 대로 신문 상이나 잡지 상에 기재하여 돌려가며 보고 지식을 서로 바꾸는 것이 제일 합당하는 줄 아나이다. (중략)

오늘날 우리의 급히 하고 먼저 힘쓸 것을 '철학'이라 하겠소? 아니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철학'은 어느 곳에 쓰겠소? 그러면 '신학'이라 하겠소? 아니오. 시방 이 압제 중에 무슨 말로 전도하겠소? 좋은 사람이 천당에는 나중에 갈지라도 목전에 심한 압제를 받을 수 없소이다. 그러하면 '농업'이라 하겠소? 아니오. 저 악한 자들이 사처에 편만하여 좋고 기름진 땅은 무리히 탈취하니 농업을 임의대로 하겠소?

(중략) 우리의 토지를 빼앗는 자 일인이요, 우리의 생업을 빼앗는 자 일인이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자 일인이요, 우리의 생명을 끊는 자 일인이라. 그러하니 오늘날 다른 공부와 사업을 다할 생각하지 말고 다만 '저 원수 하나 없이 할 공부'만 하옵시다. 우리의 원수를 없이 할 공부는 다른 것 아니요. 곧 '무학(武學)'이요, '무기(武技)'요, '무육(武育)'이라. '무학' '무기' '무육'은 급히 힘쓸 것이요 또한 먼저 힘쓸 것이라.

'무기(武技)'가 아니면 강토를 회복할 수 없고 '무기'가 아니면 생업을 임의로 할 수 없고 '무기'가 아니면 자유로 지낼 수 없고 '武技'가 아니면 이 세상에 살 수 없소이다. (하략)"

망해가는 나라를 눈뜨고 볼 수만 없어 무력항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한인들이 가 있는 곳마다 들불처럼 타올랐다. 무엇 보다 단위부대를 통솔할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가 각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국 와이오밍의 탄광에서는 광부들이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끌고 목총을 잡았다. 노예노동이나 다름없는 간고한 환경인 멕시코에서도 그리고 한인들이 대거 이주한 만주의 서간도에서도 당장 기약은 없지만 서둘러 무관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무관학교들 중 가장 먼저 세워진 학교가 바로 박용만이 주도해 세운 '소년병학교'였다. '저 원수 하나 없이 할 공부만 하옵시다'라고 주장한 박처후는 박용만 못지 않게 '소년병학교'와 운명을 같이 한 사람이다.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하기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안을 제출해 의결을 이끌어낸 사람도 박처후였다. 1912년 박용만 교장이 하와이로 떠나자 그 후임 교장이 됐다. 일본 영사관의 압력으로 '소년병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그는 두 해를 더 버텼다. '소년병학교'의 첫 졸업생이었던 그는 동시에 교관으로서 훈련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온 건 그의 나이 24세였던 1905년. 일 년쯤 머물다 박용만이 있는 커니 시로 이주했다. 보석상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수학과 영어를 공부했다.

1913년 6월 4일 미국에서 최초로 한국유학생회가 조직됐다. 소년병학교 출신들이 주동이 된 것이다. 시카고 대학, 노스웨스턴 대학, 네브래스카 대학과 오마하와 링컨 시 소재 고등학교 한인 학생들이 헤이스팅스 시로 모였다. 그들은 회장으로 박처후를 선출하고 1년에 두 번씩 영문잡지를 발행하기로 결의했다. 

박처후는 1915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소년병학교 교장을 맡은 외에도 네브래스카 거류민회 총회장을 지냈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웰치의 통역 겸 조수로 귀국한 박처후는 연희전문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세 갈래의 노선이 있었다. 대략 안창호는 교육, 이승만은 외교, 박용만은 무력을 통해 목표를 달성코자 했다. 물론 세 노선 다 나름의 당위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기르는 길 밖에 없다는 박용만의 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그런 발상을 한 사람은 박용만만이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각처의 한인들이 다투어 무관학교를 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박용만의 주도로 1909년 6월 처음 군사훈련에 들어간 '소년병학교'는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무관학교였다. 다음 해 2월에는 멕시코의 메리다 지방에 '숭무학교'가 설립됐다.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에 의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건 1911년이었다.

1914년 6월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했다. 같은 해 북간도에서 이동휘가 '대전학교'를 설립했다. 1920년 2월 캘리포니아 주 윌로우스에는 김종림과 노백린 장군에 의해 '한인비행학교'가 창설됐다. 군용 비행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 소년병학교 야구반. 맨 뒷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심판 정희원. 4번째가 코치 박용만. 정희원은 슈피리어 탄광의 한인광부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 독립기념관


소년병학교 출신 정희원은 졸업하자 와이오밍 주의 탄광으로 향했다. 몇 안 되는 광부들의 손에 목총들을 쥐어주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는 소년병학교에서 생도로 훈련을 받았고 졸업 한 후에는 교관이 돼 일반지리와 군사지리를 가르쳤다. 여름에는 '소년병학교'에서 가르치다가 가을이면 콜로라도 주 북쪽에 인접한 와이오밍 주를 찾아갔다. 수 백리 떨어진 오지를 찾아간 정희원이나 언제 써먹을지도 모르는 군사훈련을 군말 없이 받은 광부들이나 어찌 보면 그들은 어리석지 않은가.   

와이오밍 주 슈페리어는 탄광촌인데 한인들이 여럿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광부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비록 목총이지만 여러 모양의 사격자세를 훈련시키고 군사학을 가르쳤다. 생도수가 많지 않아 학교라고 이름을 붙일 순 없고 '소년병학회'라고 불렀다.

▲ 와이오밍 주 슈피리어 탄광촌(1910년). 다수의 한인들이 광부로 일했다. ⓒ Nakaoo Studio(저작권 해제)


▲ 슈피리어 탄광촌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한인광부들(1911년) ⓒ 독립기념관


석탄을 채굴하는 회사는 노동력이 귀해 광부를 구하기가 어려운데다 목총을 가지고 훈련하는 게 위협적이지도 않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낮에는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캐고 일과가 끝난 후 저녁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다.

정희원은 그 후 콜로라도 주 동쪽에 인접한 캔사스 주로 이주했다. 토피카 주립대학을 다녔는데 거기서도 캔사스 시 한인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무력에 의한 독립 달성은 그의 강박관념이었고 그것도 중증이었다. 

소년병학교 교관 중에 김장호가 있었다. 1904년 하와이로 건너 왔는데 구한말 군인 출신이었다. 나이는 박용만 보다 5살이 많았다. 김장호 때문에 소년병학교 생도들은 산병교련과 기본적인 제식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역시 군사훈련에 뜻을 두고 1910년 9월 22일 만주를 향해 떠났다. 먼저 와이오밍의 슈피리어 탄광에 가서 교련도 가르치고 노동을 해서 여비를 마련했다. 그 해 12월 10일 뉴욕에서 배를 탄 그는 런던, 파리, 베를린을 거쳐 다음 해 1월 25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 동포들에게 한인소년병학교를 소개했다. 그 후 만주나 연해주의 무관학교에서는 박용만의 군사교범들과 소년병학교 교재들을 구하게 됐다.  

박용만 역시 네브래스카 주에 '소년병학교'를 세운 것에 그치지 않고,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간 지 1년 반 만에 국민군단을 창설했다. 1920년 이후 북경에 있을 때도 내몽고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려 했으니 무장투쟁의 집념은 가히 병적이라 할 만큼 요지부동이었다.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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