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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만원 드는 일을, '거저' 해냈다

치매 어머니를 위해 50여 일 만에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직통로 완성

등록|2010.11.20 11:25 수정|2010.11.20 11:25

▲ 50여 일 만에 집수리를 1차 완료하고, 어머니와 더불어 축배를 마신 다음 색색이 보자기를 소품으로 한판 굿을 벌였다. 굿은 성대하고 장엄했지만, 밤이 너무 깊은 시간이라 구경꾼이 없어 쓸쓸하고 조촐하게 그러나 옹골지게 끝을 보았다. ⓒ 김수복


"엄마, 엄마, 내가 드디어 돈을 이겼어, 돈을 이겼다고, 응? 봐, 봐봐. 조금만 기다려봐, 응?"

망치를 들고 일을 벌이기에 앞서 우선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바탕 난리를 떨었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당신의 손을 잡아준 것이 고맙다는 것인지 그저 "고맙소, 고맙소"만 되풀이하셨다. 그러다가 다시 "아따 보면 볼수록 아저씨는 우리 오빠를 빼다 박았어라우, 잉?"하면서 정말로 오랜만에 오빠라도 만난 듯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길게 내밀고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계셨다.

아 그래, 웃자. 웃자. 이런 날은 무조건 웃어야 한다. 소리도 크게, 으하하하, 그리고 통쾌하고 상쾌하게 으하하하. 웃고 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아 그런데 이건 참 영화 제목이었던가. 까짓 뭐 어떠랴. 특허 전문 변호사들이 떼돈을 번다는 둥 먼저 말뚝 박은 사람이 영원토록 주인이 된다는 둥으로 특허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설마하니 글자 몇 개 조합한 것까지 특허 운운하며 소송을 걸지는 않겠지.

여하튼 그랬다.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도 나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내 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신다는 것이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망치질도 탕탕... 검뎅을 마셔도 웃음이 났다

그리하여 있는 힘껏 소리도 탕탕 크게 날 수 있도록 일부러 힘을 주어가며 망치질을 했다. 그 시간대가 하필 밤이었다. 하루 종일 도배를 하고, 흙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를 기다린 시간이 또 있으니 밤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어쨌든 망치질을 하는 내내 입에서는 절로 노래가 나왔다. 어깨와 허리는 내가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저희들이 알아서 부드럽고 유연하게 춤추는 자세를 취해 보이고 있었다. 천장에서 연거푸 검뎅이 쏟아져 내리고, 쥐똥 같은 것이 가끔 입속으로 쏙쏙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미쳐 있었기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단 한 마디의 욕지거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미친 날들이었다. '미쳐 버린'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냥 미친 날들이었다. 그 날수가 무려 50여 일이었다. 전화도 가능한 받지 않으려고 멀리에 던져두고 삽질을 했다. 곡괭이질도 하고 망치질도 하고, 가끔은 담배를 피워 물고 수북이 쌓인 검뎅과 쥐똥 위에 쭈그리고 앉아 마당에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눈물 같은 것을 몇 방울 흘리기도 했다.

웃으면서 우는, 혹은 울면서 웃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지난 50일 동안의 내 모습이 아마 그런 꼴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무엇인가 일에 빠져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종류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극한의 고독이기도 하다. 작은 부엌문 저쪽의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중얼거리셨다.

"옆집에서 또 싸우는갑다. 아까도 싸우고, 또 싸운다. 어째서 그럴까, 어째서."

문짝을 제외한 벽 전체의 두께는 아마 3mm가 채 안 될 것이다. 3mm '이쪽'에서 나는 망치질을 하는데 그 소리에 놀란 어머니는 3mm '저쪽'에서 옆집의 누군가 싸운다고 걱정을 하신다.

▲ 보기에는 멀쩡한 벽이지만, 손으로 탁 치면 대번에 찢어지는 벽지만 남은 것으로, 그야말로 허울뿐인 벽이다. ⓒ 김수복


거동이 몹시 불편해진 어머니의 거동을 그나마 편하게 하는 방법은 방을 화장실 높이로 낮추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리를 시작했을 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관련기사:

미련할 바엔 끝까지 미련하련다). 하면서도 안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컨대 집을 죄다 뜯어놓고 공사를 하자면 일이 쉽게 풀리기는 하겠지만 그럴 경우 어머니를 어디로 모셔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머리털을 쥐어뜯다가 생각해낸 것이 부엌과 방의 경계를 그대로 두고 방을 뜯어낸다는, 아주 혁신적인 공법이었다. 이 새로운 공법을 개발해서 시공하느라 쓴 잔머리가 얼마였는가는 지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평소에 잔머리 따위로 목숨을 거는 인간들과는 상종을 않고자 노력해 왔건만 이번에 부득이 내 자신이 잔머리의 제왕이 되고 말았으니 세상이란 참 함부로 큰소리 칠 일이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이 공법은 당연하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과 문틀 그리고 도배지만 고스란히 남기고 벽을 구성하는 중요 소재인 흙을 모조리 뜯어낸다는 게 생각으로는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 작업은 고고학적인 발굴에 버금가는 고도의 조심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흙을 걷어낸 뒤에 남은 벽지 그러니까 허울뿐인 벽체를 보존하는 것 또한 극도의 긴장이 필요했다. 어쩌다 실수로 내 몸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벽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침실 겸 거실 겸 휴식공간 또한 사라져서 그야말로 난장판에 공사판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 벽체 철거작업. 이 흙을 가능한 한 먼지가 나지 않게, 무엇보다 벽지가 찢어지지 않게 털어내야 했다. 벽을 통째로 털어내기로 한다면 두세 시간도 채 안 걸리겠지만, 어머니가 계시는 쪽의 벽지를 고스란히 남겨야 하는 까닭에 이틀이나 걸렸다. ⓒ 김수복


600만 원? 내 손발은 어디 무슨 전시품이라더냐

이 모든 고생스러움과 창조적 행위의 배경에 '돈'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내 손에 만일 돈이 있었다면 이런 창조적인 발상은 아마 꿈에서도 해볼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돈이란 그리 썩 바람직한 존재가 못 되는 셈이다. 어쨌든 전문가를 불러 적정한 공사비를 산출해 보라 했을 때 그는 최소한 600만 원은 필요하다고 했다.

"600만 원? 600만 원이라니. 그게 뭔 소리여. 나는 60만 원도 안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업자도 모두가 어이상실로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업자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뭐냐 이거, 돈이 내 발목을 잡으려 하는 것이냐? 어디서 빚이라도 내다가 공사를 해라 이거지? 웃기지 말라. 내 손은 어디 무슨 전시품용으로 우리 어머니가 만들었다더냐.'

이렇게 해서 집수리는 온전히 나 혼자의 차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다섯 시간씩만 작업을 하겠노라 결심을 했지만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그 결심은 무효처리됐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어떤 날은 열다섯 시간도 넘게 검뎅과 쥐똥들 속에서 무거운 돌을 캐내고 흙을 퍼내는 동안 발등은 퉁퉁 부어오르고 무릎은 퍼렇게 멍이 들어갔다.

공사를 하는 내내 눈앞을 어른거리는 그림이 있었다. 내 기억이 허용하는 저 먼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어머니, 어머니라는 제목의 장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이 내 머릿속에서 줄곧 상영되고 있었다. 없는 돈에 자식이 여섯이나 되다 보니 거의 매일 아침마다 학교에 안 간다고, 돈 없이는 못 간다고 징징대는 아이들을 달래고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빼던 시절의 젊은 어머니가 혹시라도 약해질지 모르는 아들의 정신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 마지막 작업, 문틀과 벽지를 제거한 뒤의 모습, 마지막으로 한 장 남은 벽지를 걷어내면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게 된다. ⓒ 김수복


새마을 운동 이후 어머니의 삶은 돈과의 투쟁

어머니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하자면 '돈과의 투쟁'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것도 무슨 거창한 투쟁의식이나 원한의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투쟁의 방식 가운데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비폭력 무저항'의 투쟁이었다. 도둑질이나 강도를 모의하고 사주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기를 당하고도 "그 사람도 얼매나 폭폭했으면 나 같은 사람을 다 속였겠소"하는 식으로 오히려 사기꾼의 고개를 못 들게 하는 방식의 투쟁을 어머니는 참으로 오래도록 끌어왔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로 요약되는 새마을 운동 이후 불어닥친 이상한 열풍 속에서 우리의 살림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아버지는 무슨 영광을 보자는 것인지 마을 이장을 20년 가까이나 하시면서 집안일은 거의 외면한 채 살림을 축냈다. 다른 사람은 마을 이장 하면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해마다 논을 넘겨주고 밭을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미래는 내 것이라는 듯 공무원들을 집으로 데려다가 닭을 잡고 오리를 잡았다. 그 닭이며 오리들은 어머니가 애써 키우신 것들이었다.

회고하면 새마을 운동 이전의 아버지는 모범적인 가장이었던 것 같다. 겨울에는 뒷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가마니를 짜고 멍석을 엮었으며, 그러면서도 틈틈이 마을 아이들의 한문 공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부부의 금실은 뭐라고나 할까, 가끔 티격태격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보기에 적당히 좋을 정도였다. 밥을 지을 때면 항상 아버지가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훌륭했다고 여겨진다. 하긴 어머니의 연세 40대 중반에 막내를 보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아무튼 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어머니에게 고난의 시작이었다. 거의 매일 찾아오는 새마을운동 담당 공무원들을 상대하느라 아버지는 점점 손님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그렇다고 이장에게 무슨 정해진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락 때 나락 한 말, 보리 때 보리 한 말이라는 정해진 보수가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나 모두 그 정해진 보수를 받아내는 재주는 없었다. 자발적으로 가져오면 받고 안 가져오면 잊어 버리는 식이었다. 마을이 워낙 소농 위주인데다 그것마저 소작농이 태반이다 보니 애써 달라고 하기도 사실은 계면쩍은 일이었을 것이다.

받아야 할 것을 달라고 하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결국 장사였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아이들의 학용품값이다 기성회비 같은 것들을 충당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농사일 틈틈이 광주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광주의 양동 도매시장에서 메리야스나 플라스틱 용기 같은 것들을 사서 머리에 이고 마을을 돌며 외상을 주고 추수 뒤에 받는 방식의 장사였다. 겨울이면 동상에 걸려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몸을 이끌고 다니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집안 어른들이 아버지를 크게 꾸짖고 나섰다.

"명색이 가장이라는 사내가 어째서 저리도 쯧쯧쯧, 자네 당장 그놈의 이장인지 된장인지 노릇 그만두게."

집안 어른들 간에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이장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는 마을 사람 모두의 인감을 이장이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새로 이장을 맡은 사람이 마을 사람들의 인감을 도용해서 농협으로부터 거액의 대출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법원 집달관들의 딱지 세례를 받고서야 "어매 이것이 뭔 일이여" 했다. 밥짓는 솥에 붉은 딱지가 붙고, 쟁기질을 하는 소의 코뚜레와 멍에에도 딱지가 붙었다.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지만, 전임 이장은 1년 반 정도 감옥을 사는 것으로 대속이 되고 말았다. 돈은 이미 여지저기 흩어져 있는 자식들의 사업자금 등으로 다 소모되어 버린 탓이었다. 지금처럼 입금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압류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그런 시절이 아니었던 까닭에 농협의 빚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부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 3년이 채 안 돼 이장 자리는 다시 아버지 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장직에서 최종적으로 물러나던 무렵, 우리 집에는 단 한 마지기의 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가 유선방송 사업을 한다고 보증을 서 달라 하면 보증을 서 주고, 현금을 빌려 달라 하면 또 거절을 못하고 빌려주는 방식으로 아버지는 혼자만의 영웅이 되어갔다.

당시에는 나락 수매를 하면 현장에서 수매대금을 본인이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수령하는 제도가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까닭으로 이장이 일괄수령해서 본인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마치 당신 소유이기나 한 것처럼 누가 잠깐만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하고 "그러세 그럼"하는 식으로 잘난 척은 혼자서 다하고 나중에 피해는 가족이 분담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그나마 충실(?)하게 수행하는 시기는 선거 기간 동안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마당에 고무신이 몇 짐이나 쌓였고, 아버지의 주머니는, 가령 주머니가 열 개 달린 옷을 입고 있다면 열 개 모두 돈으로 가득했다. 그 많은 돈이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어떤 날은 어머니에게도 주어지고 아이들에게도 쓱, 쓱, 곶감이라도 빼주듯 빼주시는 거였다.

당시의 철없는 생각으로는 해마다 달마다 선거를 했으면 좋겠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은 흐르고 있었고, 아버지도 이제는 당신이 그동안 뭔가 거대한 거품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무 늦었던 것인가. 자발적으로 이장직을 내놓은 뒤로 아버지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폐인의 길을 걷게 됐다. 자식들 뒷바라지에도 숨이 가쁜 어머니가 이제는 '서방'이 여기저기에 깔아놓은 외상 술값을 갚으러 다녀야 하는 역할까지 떠안게 됐다.

그쯤되면 어머니의 언행이 몹시 거칠어질 법도 하건만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어머니는 오히려 조용해져 갔다. 물건 값을 떼이고도 떼어먹은 사람을 욕하거나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밭뙈기 장사들이 벌이는 사업장에 품팔이를 나갔다가 며칠씩의 품삯을 떼이고도 "나는 두 다리 뻗고 잠이라도 자지만" 하는 식으로 오히려 사기꾼들의 잠자리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바보스럽기 짝이없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내가 차츰 얻게 된 교훈은 뭐라고나 할까, 사람이 돈을 의지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나 할까, 그랬다. 그런 어떤 무언의 말씀이 어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장남 명색의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들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아 흡수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중증 치매라는 진단을 받기 전의 어머니께서는 가끔 "에미가 못나서 가난을 물려주고 말았다"고 서글픈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하시곤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으로는 가난이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백 번을 생각해도 가난이 아니었다.

진부한 것, 상투적인 것, 흔해빠진 것, 모두가 이러이러하니 나도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따위들을 거부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릎 꿇거나 돌아서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정면 돌파하는 어떤 명징한 정신 같은 것이 어머니로부터 내게 전해졌다는 믿음이 있었다. 어머니가 만약에 돈놀이 같은 것이라도 해서 필요 이상의 많은 돈을 가진 부자였더라면, 그래서 미성년의 시기에 벌써 가난한 사람 알기를 영혼 없는 무슨 동물처럼 해 왔다면 내가 오늘날 이렇게 어머니의 곁에 머물고자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동생이 여럿이다 보니 여럿 가운데 한 녀석은 '부모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 있느냐'고 곧잘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녀석도 세상을 조금만 더 살아보면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지난 날에 했던 자신의 그 소리를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어떤 배경에 의해 운영되는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그 꼬투리나마 붙잡게 되는 순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이 가난해도 정직하고 남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좋은 것이로구나 하는 고도의 성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인들 모를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수십여 년 동안 축척된 이런 모든 그림들이 그리고 생각들이 지난 50여 일 동안 내 머릿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바람에 망치로 무릎을 때리고도 그리 아픈 줄을 몰랐고, 삽으로 발등을 찍어 놓고도 그 순간에만 이를 악물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신음소리를 냈을 뿐 이내 잊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외벽을 끝내고 방에 보일러를 깔고 미장을 하고 도배를 하고 드디어 장벽을 걷어내기에 이르렀다. 내 방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방은 근사하고 훌륭하게 완료, 완료가 된 것이다.

▲ 공사완료. 방에서 화장실로, 부엌으로, 그 어디로든 무엇에 걸려 넘어질 걱정 없이 직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 김수복


춤을 추었다,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굿을 했다

장벽을 걷어내던 날 어머니에게 우선 신고를 드리기로 했다. 내가 드디어 돈을 이겼다고,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돈을 이겼다고 큰소리로 열 번도 넘게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문틀을 탕탕 쳐서 흔들리게 해놓고 톱으로 잘라낸 다음 문짝을 뜯어내고 이어서 허울뿐인 벽체를 구성하는 벽지들을 걷어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하나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방에서 화장실까지 그대로 직통, 화장실에서 방까지 또한 그대로 직통, 방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다시 방으로, 어느 한 곳 막힘이 없이 쭉쭉 뻗어서 무엇에 걸려 넘어질 걱정은 이제 하나도 없는 신세계를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손으로 건설한 것이었다. 공사를 할 당시만 해도 직통이 되리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후련하게 뻥 뚫린 고속도로가 되리라는 그림은 그려보지 못했다.

아하, 기쁘다. 너무도 기쁘다. 이런 날 이런 시간을 아무런 이벤트도 없이 넘어간다면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축배를 들자. 아니다. 이런 날은 술 몇 잔으로 축배나 들 것이 아니라 굿을 해야 한다. 술 기운으로 노래 몇 소절이나 흥얼거리다가 말아서야 될 것인가.

그래, 굿을 하자. 무슨 굿을 할까. 씻김굿을 할 것이냐 살풀이를 할 것이냐. 해원굿도 있고 축원굿도 있고 문굿도 있고 오만 가지 굿이 있다. 아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따질 일이 아니다. 여럿 중에 하나를 고를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섞어서 다른 하나를 만들어 내보자. 어차피 오늘은 새로운 공법에 의해 돈의 항복을 받아낸 날이니 역시나 굿도 새로운 형식을 갖춰야 제법 구색이 맞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 굿을 하기로 하고 일어서서 일단 숟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태권도의 품새 모양으로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가 옆으로 뻗었다가 해보는데 아이고, 가랑이가 너무 아프다. 뱁새가 황새 따르려다 뭐 어쩐다더니 꼭 그짝이다. 이런 자발 없고 방정스런 굿이 아니라 좀 더 폼나는 굿을 해야 한다.

▲ 수리완료 뒤의 외벽. 손이 두 개뿐이고 눈도 두 개뿐이라서 한 손에 못을 들고 한 손에 망치를 들고 머리와 다리를 이용해서 문을 고정시킨 채 못질을 하다 보니 모든 문들이 조금씩 크거나 작거나 혹은 기울어 버렸다. 그런데 해놓고 보니 이런 모양새가 내게는 오히려 맞는구나 싶어서 매우 흡족하다. 창조란 역시 계획의 산물이라기보다 우연의 행복이다 싶기도 하다. ⓒ 김수복


어쨌든 나는 이제 무당이다. 무당에게는 신기가 있어야 한다. 신기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어떻게 현현되는가. 일차적으로 눈빛이다. 그러나 내 눈빛으로 나를 설득할 수는 없으니 다른 소품이 있어야 한다. 딸랑이 방울이라든가 철릭(무당이 입는 옷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히고 큰 소매가 달렸다) 같은 것 말이다. 딸랑이 방울은 집에 없으니 철릭으로 하자.

해서 철릭을 하나 급히 만들자 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데 별똥별처럼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설이나 추석 때 아우들이며 친척들이 하나씩 들고 온 선물들, 그것을 싼 보자기가 제각기 색깔도 다르고 문양도 달라서 곱게 접어 모셔두었었는데 아하, 이런 때 쓰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것이야말로 선경지명이 아니고 무엇일 것이냐.

보자기들을 꺼내놓고 보니 오방색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거의 근접해 있다. 이거면 됐다. 충분하다. 열 개도 넘는 색색이 보자기를 한 손에 쥐고 흔들어대며 큰소리로 "어허 엇 싸"하는데 어머니가 좋다고 박수를 치며 뭐라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나 어린 시절에 "굿 보러 간다"고 저녁에 밥숟갈을 놓자마자 설거지도 안 하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서 가 보았던 굿판이 생각난다. 그 시절의 농촌에서 굿판은 최고의 문화행사였다. 울다가 웃다가 소곤거리다가 다시 울고 웃는 시간의 되풀이 속에서 구경꾼들은 어느새 구경꾼이 아닌 굿의 주체로 거듭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한마음 한뜻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몰아낸 그 굿판이 요새 다시 살아나고는 있지만 이미 그때의 그 맛을 잃어 버렸다. 잃어버린 그 맛을 이제 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바가지를 엎어놓고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바라춤 흉내도 내보고, 보자기를 두 손으로 마주잡고 팔을 벌렸다가 구부리며 '얇은사 하이얀 고깔'의 승무 흉내도 내보고, 80년대 이애주 교수가 우리에게 흠뻑 안겨준 눈물의 카타르시스, 어쩌면 그렇게도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연상케 할까 싶었던 그 춤사위도 흉내내보고 등등 이런저런 온갖 춤이며 굿판을 재생해보았다. 아뿔사, 아 이런, 이런, 한 가지가 빠졌네. 이런 장면은 필히 사진으로 기록해서 가문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나. 밤이 너무 깊어서 누구를 부르지도 못하겠고, 뭐 어쩌냐. 그냥 놀아보자.

"자 유씨 성에 봉춘 이름 가진 아주머니 노래 한 곡 뽑으시고요."
"아이고 나는 노래 못해요. 못 헌당게요."
"아따 지난 번에는 혼자서 잘도 하등만. 자, 얼른 한 곡조."
"아이고 못 헌당게요. 일본 노래밖에."
"좋아요 좋아. 일본 노래라도 해봐. 근데 그게 무슨 노래예요?"
"잘 다녀오라고, 좋은 것이라고, 학교서 단체로 해야 한다고 해서 했는디 나중에 알고 봉게 나쁜 노래드만."
"아아, 그러니까 학도병 나가는 데서 일장기 흔들며 불러주는 송별의 노래? 엄마 나이 열 살 즈음에 학교서 그것을 했다고? 아이고 우리 엄마가 그런 노래까지 다 하셨구만 잉?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참말로 파란이 만장한 생을 건너 오셨네. 그런 의미에서 자 한 잔, 응? 한 잔만 마셔봐."

어머니는 안 마신다고 도리질을 치다가 결국 한 모금을 마시는 성의를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그 한 잔 술에 취했는지 금방 잠이 들어 버렸다. 방바닥에 앉은 채로 꾸벅거리는 어머니를 불끈 안아 올려서 의자에 앉히려 하는데 어느새 눈을 뜬 어머니가 내 어깨를 꼭 끌어안는다. 떨어질까 무서워서인지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정이 발동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어머니는 아들의 재롱잔치 같은 굿 구경을 다시 할 준비가 되었다.

▲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 김수복


그래, 굿이란 역시 구경하는 눈이 있어야 신명이 난다. 그리하여 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신명이 나서 색색이 보자기를 양 손에 나눠들고 흔들어 대다가 그것을 다시 어머니에게 마치 서양의 망토처럼 걸쳐드리고 크게 한 번 절을 한 다음 젓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중모리에서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꼴깍 넘어갔다가 다시 중모리, 진양조로 얌전하게 내려와서 내멋대로식 태평가 아니 육자배기 한 곡조를 불러보는데 꼭 이런 식이었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새각시가 되었네. 새각시에게 아들이 어디 있을 것이여. 색색이 고운 옷 입고 시집을 가야 아들이 생기지.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내일모레 시집을 보내야겠네. 시집을 보내야겠네."

이렇게 해서 지난 50여 일간에 걸친 대장정은 일단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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