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개조'와 '이광수의 개조'는 개념부터 다르다
[서평] 이광수 <민족개조론> (1974(1922), 대성문화사(개벽)) 2
"'민족개조론'은 누구의 주장일까요?"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리고 아래와 같이 4명이 선택지로 제공됐다고 해보자. 순서는 나이 순이다.
1. 춘원 이광수 (1892년생)
2. 산운 장도빈 (1888년생)
3. 자산 안확 (1986년생)
4. 도산 안창호 (1878년생)
모르긴 해도 이광수를 고른 사람이 가장 많지 않을까? 장도빈과 안확의 이름은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일제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한민족의 부흥 방안으로 민족개조를 주장한 사람들이다.
민족 개조론의 대유행
이광수는 <개벽>에 실린 <소년에게(1921)>와 <민족개조론(1922)>에서, 장도빈은 <서울>에 실린 <아등의 서광(1920)>과 <우리 개조의 일반(1920)>에서, 안확 역시 <서울>에 실린 <개조론(1920)>과 <자각론(1920)> 등에서 각각 나름대로의 민족개조론을 폈다.
도산은 자기 사상을 출판한 적이 없다. 그래도 진짜배기 민족개조론자다. 다른 이들이 글로 민족개조를 '주장'할 때 도산은 몸으로 '실천'했다. 그는 숱한 연설로 민족개조를 역설했고, 직접 조직한 점진학교(1899), 공립협회(1905), 대성학원(1907), 청년학우회(1909), 대한인국민회(1912), 흥사단(1913)의 교칙과 약법(규약집)에는 민족개조 사상이 녹아 있다.
사실 민족개조론을 편 것은 네 사람뿐 아니다. 이돈화는 <최근 조선 사회 운동의 二三(1920)>에서 '삼대 개벽론'을 폈는데 '개벽론'은 개조론의 천도교식 표현이다. 황달영은 <우리 민족성의 장소와 단소(1920)>에서 나름의 개조론을 폈고, 김일엽(1896-1971)도 <여자의 자각(1920)>과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1921)> 등을 통해 조선 여성 개조론을 전개했다.
3.1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대 벽두, 민족개조론은 대유행이었다. 그런데도 요즘은 이광수의 것이 민족개조론의 전부이기라도 하듯 평가되거나 비판되곤 한다. 그러나 위의 몇 글만 보아도 민족개조론은 이광수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각 저술의 출판 년도를 보면 이미 많은 문인과 종교인, 언론인과 여성운동가들이 개진한 민족개조의 조류에 이광수는 뒤늦게 편승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남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셈이다.
그나마 그 숟가락마저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은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이광수는 상해 시절(1919-1921) 도산의 독립 활동과 그 배경이 된 민족개조 사상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배웠다.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그 약법을 외었고, 길고 까다로운 입단 문답을 거치면서 민족개조론을 숙지했음에 틀림없다. 또 이광수는 도산의 구술을 받아씀으로써 <민족개조론>의 초안을 작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광수의 변절과 <민족개조론>
그러나 1921년 상해를 떠나면서 이광수 행보는 크게 바뀌었다. 그해 4월 '귀국은 곧 투항'이라며 말리던 도산을 뿌리치고 이광수는 귀국했다.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천에서 일경에 체포됐으나 불기소로 풀려났다.
2.8독립선언의 주동이자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장을 체포하고도 일경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80년대로 치면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이 전대협 의장을 체포해 놓고 훈방한 셈이다. 이광수가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였다면 이건 매우 모욕적인 대접인데, 그래서 이광수는 상해를 떠나기 전에 이미 변절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혹 속에 경성으로 돌아온 이광수는 1921년 5월 한때 도피 행각까지 벌였던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재혼했고, 9월에는 일본 총독 사이토를 면담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자 사이토 총독의 정치 참모였던 아베 미쓰이에와 잦은 접촉을 갖기에 이른다. 이광수는 이들의 주선으로 월 수당 3백엔을 받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3백엔은 일선 기자 보수의 10배, 논설위원급 보수보다도 3배쯤 되는 액수였다고 한다.
이제 이광수는 가난한 유학생과 풍찬노숙의 독립운동가의 생활을 청산하고 대신 고정된 직장과 넉넉한 수입, 양가 출신의 신식 부인과 총독부의 비호를 누리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이 모두가 1921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인데, 바로 그 직후에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다.
<소년에게>와 <민족개조론>에 대한 반응
귀국한 해 11월 이광수는 <개벽>지에 <소년에게>를 발표했는데 이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민족개조론을 소개한 글이다. <소년에게> 때문에 이광수는 출판법 위반혐의로 종로서에 연행되었지만 역시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때 이광수는 이미 <민족개조론>을 완성하고 서문까지 써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반년을 더 기다렸다가 <개벽> 5월호에 이를 게재했다. 서문까지 완성한 원고를 어째서 6개월이나 묵혔을까? 의문이다.
또 <소년에게>와는 달리 <민족개조론>에 대해서는 일경으로부터 아무 시비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비가 독자들로부터 나왔다. 이광수의 논조에 불만을 품은 일부 청년 독자들이 개벽사를 습격해 기물을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광수의 이 두 글이 조선 민중을 비하함으로써 일제 문화정책의 신민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일제에의 투항서요 자기 과거의 반성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부터 민족개조론을 집중 소개한 잡지는 <개벽>과 <서울>이었다. 그러나 1920년과 1921년에 발표된 민족개조에 관한 다른 저자들의 글들은 일경의 주목도 독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바 없다. 그러나 유독 이광수의 <소년에게>는 일경의 제재를 받았고 <민족개조론>은 독자들의 분노와 다른 개조론자들을 포함한 문인들의 빈축을 샀다. 왜 그랬을까?
그 점을 보려면 도산의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집필했다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정말로 도산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생각 혹은 총독부의 구미에 맞게 수정한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또 수정을 했다면 무엇을 어떻게 수정했기에 독자들이 분노하고 문단이 그에게 등을 돌렸는가도 알아보아야 한다.
도산의 '회개' vs. 이광수의 '재건'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개조론>의 세밀한 내용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개조'의 개념만 살펴도 답은 쉽게 나온다. 도산과 이광수의 개조는 그 개념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도산은 개조라는 말을 '회개(repent)'의 뜻으로 사용한 반면, 이광수는 이를 '재건(reconstruction)'으로 받아들였다.
주요한은 <도산 안창호전(1983: 83쪽)>에서 "민족개조(民族改造)라는 표어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역시 도산이 지어낸 표어다. 그 당시 세계 개조, 사회 개조의 소리가 동서양을 흔들고 있었는데, 도산은 그것을 포착하여 한국 민족은 그 자신의 성격을 개조하여야만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기가 20년을 두고 주장해 내려온 민족의 자기 혁신을 <민족개조>라는 용어로 표현"했다고 했다.
그러나 도산의 '민족개조'는 일반적인 의미와 좀 달랐다. 그의 개조는 기독교의 '회개'에 가깝다. 1919년에 <개조>라는 제목으로 행한 연설에서 도산은 "예수보다 좀 먼저 온 요한이 맨 처음으로 백성에게 부르짖은 말씀이 무엇이오? '회개하라'였오. 그 후 예수가 맨 처음 크게 외친 말씀이 무엇이오? 또 '회개하라'라 였오, 나는 이 '회개'라는 것이 곧 '개조'임을 말하려오"라고 했었다.
기독교의 회개란 인간이 죄에서 돌이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산의 민족개조는 일시적으로 망가진 민족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도산이 비록 민족의 현재에 문제점이 많음을 지적했더라도 여전히 민족의 과거를 신뢰했고 미래를 낙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광수의 개조는 다르다. <민족개조론> 서장 첫 절인 '민족개조의 의의'에서 이광수는 1차 대전 후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이 곧 '개조(改造)'의 과정인데, 이를 건축에 비유하면서 "전혀 새로운 설계에 의하여 다시 짓는다 함"이라고 했다. 이 같은 '재건'으로서의 개조는 1919년 일본을 방문해 "철학의 재건(reconstruction in philosophy)"을 역설했던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사상과 연결된다. 현실이 달라졌으면 주체와 철학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광수에게는 조선이 제국주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만으로도 조선의 민족성이 열패하다는 증거가 된다. 열패를 벗어나 우승에 이르려면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영미나 일본 같은 우승자들의 선례를 따라 열패한 민족성을 버리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조 사상에서는 조선의 현재는 개탄되고, 과거는 불신되고, 미래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개조: 같은 말, 다른 뜻
이광수는 '민족개조'라는 도산의 용어를 차용했으나 엉뚱한 뜻으로 바꿔 버렸다. 말은 같은데 맥락을 바꾸니까 정 반대의 뜻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산의 사상을 국내에 소개한다면서도 그의 진의는 왜곡되었고 '민족개조'는 희망이 아니라 자기 경멸이 되어 버렸다. 도산의 민족 개조 연설이 가는 곳마다 환영과 박수를 받았던 반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비난과 반목을 낳았던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평미레, 2010/11/13)
1. 춘원 이광수 (1892년생)
2. 산운 장도빈 (1888년생)
3. 자산 안확 (1986년생)
4. 도산 안창호 (1878년생)
민족 개조론의 대유행
이광수는 <개벽>에 실린 <소년에게(1921)>와 <민족개조론(1922)>에서, 장도빈은 <서울>에 실린 <아등의 서광(1920)>과 <우리 개조의 일반(1920)>에서, 안확 역시 <서울>에 실린 <개조론(1920)>과 <자각론(1920)> 등에서 각각 나름대로의 민족개조론을 폈다.
도산은 자기 사상을 출판한 적이 없다. 그래도 진짜배기 민족개조론자다. 다른 이들이 글로 민족개조를 '주장'할 때 도산은 몸으로 '실천'했다. 그는 숱한 연설로 민족개조를 역설했고, 직접 조직한 점진학교(1899), 공립협회(1905), 대성학원(1907), 청년학우회(1909), 대한인국민회(1912), 흥사단(1913)의 교칙과 약법(규약집)에는 민족개조 사상이 녹아 있다.
사실 민족개조론을 편 것은 네 사람뿐 아니다. 이돈화는 <최근 조선 사회 운동의 二三(1920)>에서 '삼대 개벽론'을 폈는데 '개벽론'은 개조론의 천도교식 표현이다. 황달영은 <우리 민족성의 장소와 단소(1920)>에서 나름의 개조론을 폈고, 김일엽(1896-1971)도 <여자의 자각(1920)>과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1921)> 등을 통해 조선 여성 개조론을 전개했다.
3.1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대 벽두, 민족개조론은 대유행이었다. 그런데도 요즘은 이광수의 것이 민족개조론의 전부이기라도 하듯 평가되거나 비판되곤 한다. 그러나 위의 몇 글만 보아도 민족개조론은 이광수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각 저술의 출판 년도를 보면 이미 많은 문인과 종교인, 언론인과 여성운동가들이 개진한 민족개조의 조류에 이광수는 뒤늦게 편승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남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셈이다.
그나마 그 숟가락마저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은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이광수는 상해 시절(1919-1921) 도산의 독립 활동과 그 배경이 된 민족개조 사상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배웠다.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그 약법을 외었고, 길고 까다로운 입단 문답을 거치면서 민족개조론을 숙지했음에 틀림없다. 또 이광수는 도산의 구술을 받아씀으로써 <민족개조론>의 초안을 작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광수의 변절과 <민족개조론>
그러나 1921년 상해를 떠나면서 이광수 행보는 크게 바뀌었다. 그해 4월 '귀국은 곧 투항'이라며 말리던 도산을 뿌리치고 이광수는 귀국했다.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선천에서 일경에 체포됐으나 불기소로 풀려났다.
2.8독립선언의 주동이자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장을 체포하고도 일경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80년대로 치면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이 전대협 의장을 체포해 놓고 훈방한 셈이다. 이광수가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였다면 이건 매우 모욕적인 대접인데, 그래서 이광수는 상해를 떠나기 전에 이미 변절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혹 속에 경성으로 돌아온 이광수는 1921년 5월 한때 도피 행각까지 벌였던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재혼했고, 9월에는 일본 총독 사이토를 면담했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자 사이토 총독의 정치 참모였던 아베 미쓰이에와 잦은 접촉을 갖기에 이른다. 이광수는 이들의 주선으로 월 수당 3백엔을 받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3백엔은 일선 기자 보수의 10배, 논설위원급 보수보다도 3배쯤 되는 액수였다고 한다.
이제 이광수는 가난한 유학생과 풍찬노숙의 독립운동가의 생활을 청산하고 대신 고정된 직장과 넉넉한 수입, 양가 출신의 신식 부인과 총독부의 비호를 누리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이 모두가 1921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인데, 바로 그 직후에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다.
<소년에게>와 <민족개조론>에 대한 반응
귀국한 해 11월 이광수는 <개벽>지에 <소년에게>를 발표했는데 이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민족개조론을 소개한 글이다. <소년에게> 때문에 이광수는 출판법 위반혐의로 종로서에 연행되었지만 역시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때 이광수는 이미 <민족개조론>을 완성하고 서문까지 써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반년을 더 기다렸다가 <개벽> 5월호에 이를 게재했다. 서문까지 완성한 원고를 어째서 6개월이나 묵혔을까? 의문이다.
또 <소년에게>와는 달리 <민족개조론>에 대해서는 일경으로부터 아무 시비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비가 독자들로부터 나왔다. 이광수의 논조에 불만을 품은 일부 청년 독자들이 개벽사를 습격해 기물을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광수의 이 두 글이 조선 민중을 비하함으로써 일제 문화정책의 신민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일제에의 투항서요 자기 과거의 반성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부터 민족개조론을 집중 소개한 잡지는 <개벽>과 <서울>이었다. 그러나 1920년과 1921년에 발표된 민족개조에 관한 다른 저자들의 글들은 일경의 주목도 독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바 없다. 그러나 유독 이광수의 <소년에게>는 일경의 제재를 받았고 <민족개조론>은 독자들의 분노와 다른 개조론자들을 포함한 문인들의 빈축을 샀다. 왜 그랬을까?
그 점을 보려면 도산의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집필했다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정말로 도산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생각 혹은 총독부의 구미에 맞게 수정한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또 수정을 했다면 무엇을 어떻게 수정했기에 독자들이 분노하고 문단이 그에게 등을 돌렸는가도 알아보아야 한다.
도산의 '회개' vs. 이광수의 '재건'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개조론>의 세밀한 내용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개조'의 개념만 살펴도 답은 쉽게 나온다. 도산과 이광수의 개조는 그 개념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도산은 개조라는 말을 '회개(repent)'의 뜻으로 사용한 반면, 이광수는 이를 '재건(reconstruction)'으로 받아들였다.
주요한은 <도산 안창호전(1983: 83쪽)>에서 "민족개조(民族改造)라는 표어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역시 도산이 지어낸 표어다. 그 당시 세계 개조, 사회 개조의 소리가 동서양을 흔들고 있었는데, 도산은 그것을 포착하여 한국 민족은 그 자신의 성격을 개조하여야만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기가 20년을 두고 주장해 내려온 민족의 자기 혁신을 <민족개조>라는 용어로 표현"했다고 했다.
그러나 도산의 '민족개조'는 일반적인 의미와 좀 달랐다. 그의 개조는 기독교의 '회개'에 가깝다. 1919년에 <개조>라는 제목으로 행한 연설에서 도산은 "예수보다 좀 먼저 온 요한이 맨 처음으로 백성에게 부르짖은 말씀이 무엇이오? '회개하라'였오. 그 후 예수가 맨 처음 크게 외친 말씀이 무엇이오? 또 '회개하라'라 였오, 나는 이 '회개'라는 것이 곧 '개조'임을 말하려오"라고 했었다.
기독교의 회개란 인간이 죄에서 돌이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산의 민족개조는 일시적으로 망가진 민족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도산이 비록 민족의 현재에 문제점이 많음을 지적했더라도 여전히 민족의 과거를 신뢰했고 미래를 낙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광수의 개조는 다르다. <민족개조론> 서장 첫 절인 '민족개조의 의의'에서 이광수는 1차 대전 후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이 곧 '개조(改造)'의 과정인데, 이를 건축에 비유하면서 "전혀 새로운 설계에 의하여 다시 짓는다 함"이라고 했다. 이 같은 '재건'으로서의 개조는 1919년 일본을 방문해 "철학의 재건(reconstruction in philosophy)"을 역설했던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사상과 연결된다. 현실이 달라졌으면 주체와 철학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광수에게는 조선이 제국주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사실만으로도 조선의 민족성이 열패하다는 증거가 된다. 열패를 벗어나 우승에 이르려면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영미나 일본 같은 우승자들의 선례를 따라 열패한 민족성을 버리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조 사상에서는 조선의 현재는 개탄되고, 과거는 불신되고, 미래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개조: 같은 말, 다른 뜻
이광수는 '민족개조'라는 도산의 용어를 차용했으나 엉뚱한 뜻으로 바꿔 버렸다. 말은 같은데 맥락을 바꾸니까 정 반대의 뜻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산의 사상을 국내에 소개한다면서도 그의 진의는 왜곡되었고 '민족개조'는 희망이 아니라 자기 경멸이 되어 버렸다. 도산의 민족 개조 연설이 가는 곳마다 환영과 박수를 받았던 반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비난과 반목을 낳았던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평미레, 20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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