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이 있어야 탱고가 가능하다"
[유러피언드림-'사회협약의 나라' 네덜란드⑤] 노사협의기구 노동재단
<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 네 번째 대상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들의 평화로운 합의'를 이루어낸 '사회협약의 나라' 네덜란드다. 미국식 소득의 양극화 없이 고용성장을 이룬 인간적인 모습의 사회협약모델을 심층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 네덜란드 노동재단의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인터뷰 내내 솔직하고 겸손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갔다. ⓒ 조명신
네덜란드 헤이그(Den Haag) 중앙역 근처 버자우던하우트서베흐(Bezuidenhoutseweg) 거리. 이곳에는 행정수도·정치수도에 걸맞게 국회의사당과 정부 청사들이 위치해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60번지 건물. 여기에 네덜란드 사회적 대화기구인 노동재단(STICHTING VAN DE ARBEID)과 사회경제위원회가 들어서 있다.
지난 15일, 헤이그 중앙역에서 노동재단까지는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취재진이 노동재단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45분께. 노사가 함께 출자해 만든 기구인데도 '노동'이란 단어만 들어가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야니 모런(Jannie M. A. Mooren) 사무총장은 건물 입구에서 활짝 웃으며 취재진을 맞이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노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
▲ 네덜란드 노동재단은 정부청사들이 모여 있는 헤이그 버자우던하우트서베흐 거리 60번가에 자리하고 있다. ⓒ 조명신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중요한 사회경제정책을 '노사'(혹은 노사정) 협의를 거쳐 결정하는 '사회협약 문화'가 만들어졌다. 1982년 체결된 바세나르 협약이 이러한 역사의 대표적 사례다.
'노사협의기구'인 노동재단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5월 출범했다. 전후 네덜란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협조적 노사관계가 필수적'이라는 노사의 공통된 판단 때문이었다.
노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협의기구를 만든 데에도 그러한 공통의 인식이 깔려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사가 함께 이러한 기구를 만든 것은 네덜란드가 유일했다. 그만큼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노동재단은 이사회와 의제위원회(agenda committee), 실무위원회(working group) 등의 조직을 두고 있다. 이사회는 총 20명으로 구성된다. 노사를 대표하는 회장 2인을 중심으로 사측에서는 네덜란드경영자연합(4명)과 중소기업연합(2명), 농업·원예연합(2명)이, 노측에서는 네덜란드 노총(4명)과 기독노총(2명), 중간사무직노련(2명)이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네덜란드 노사는 노동재단에서 수시로 만나 대화하고 사회경제 현안을 논의한다. 의제위원회는 1년에 10여 차례, 실무위원회는 한 달에 3∼4차례 만난다. 이들은 ▲임금 ▲고용 ▲노사관계 ▲교육훈련 ▲파트타임 노동자의 지위 등을 논의하고, 특히 노사협상자들에게 줄 '권고안'을 만든다.
주OECD 한국대표부는 '네덜란드 폴더모델과 노동사회개혁 추진의 시사점'이라는 보고서(2006년 3월)에서 "사회경제위원회가 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사회경제정책에 관여하고 정부와 의회에 자문하는 기구라면 노동재단은 임금 및 고용이슈에 관한 1차적 자문기관"이라고 평가했다.
▲ ⓒ 조명신
6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동재단이 '노사간' 협의기구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1년에 두 번, 즉 다음연도 예산이 준비되는 봄(춘계협의)과 새로운 임금협상이 시작되는 가을(추계협의)에 정부 대표들과 만나 대화한다. 이 자리에는 총리와 재경부장관, 사회고용부장관, 경제부장관, 내무부장관 등이 참여한다.
노동재단은 1982년 바세나르협약 이후 사회협약체제의 핵심기구로 부상하고 있다. 바세나르협약 이후 나온 사회협약들이 모두 노동재단에서 나왔다는 점은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노사정위원회 체제와 달리 정부의 재정과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노사가 자율협의를 통해 중요한 사회경제정책들에 합의해왔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4월 출범한 한국의 노사발전재단은 네덜란드 노동재단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부가 노사발전재단의 운영자금(3000억 원) 중 일부를 출연했고, 민주노총은 빠진 채 한국노총과 경총, 대한상의만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재단과는 크게 다르다.
"우리는 정부기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 야니 모런 노동재단 사무총장은 사회협약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 신뢰해야만 하면 중단하지 않는 대화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 조명신
그러나 노동재단은 정부기구가 아닌 민간기구다. 일부에서는 "민간기구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노동재단은 철저히 '비정부기구'의 길을 고집하고 있다. 야니 모런 사무총장도 "(비정부기구여서)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
"우리는 (법으로 보장받는) 정부기구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단체를 원한다. 독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재정 등에 예속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노사간 자율협의는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82년 바세나르 협약 이후 합의한 사회협약들도 주로 노동재단에서 나왔다.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노사가 합의하면 정부에서 (합의사항을) 무시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해)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2008년 해고문제와 관련해 노사가 전혀 동의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협의가 결렬돼 국회에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사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동의하지 못하면 정부나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노사는)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2008년의 경우처럼 합의가 결렬되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당연히 합의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속한 쪽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란다.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사회적 대화를 하기 위해 노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서로 신뢰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100% 충족하지 못할 수 있으니 절충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대화를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이건 자동차를 사는 문제와는 다르다. (자동차는 맘에 안 들면 구매를 중단할 수 있지만 노사간 대화는) 맘에 안 든다고 관둘 수는 없다. 중단하지 않는 대화가 (사회협약 성공의) 관건이다. 우리는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계속 대화한다. 대화하다가 의견이 다르다고 중단을 선언하고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 ⓒ 조명신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노사가 작은 주제로 시작해 서로의 믿음을 확장시킨 뒤 좀 더 크고 중요한 주제로 옮겨가야 한다"며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에 반드시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네덜란드 모델은 철저하게 네덜란드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네덜란드 모델의 현재만 보지 말고 역사와 문화 등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네덜란드 모델을 한국에 적용하는 문제와 관련해 "한국을 잘 모른다"며 "(그것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관한 인류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웃었다.
또한 유럽연합체제가 네덜란드 모델의 독자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야니 모런 사무총장도 "유럽연합이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고 실토했다. 게다가 최근 출범한 우파 연립정부에서 구직에 관한 예산을 삭감하고, 연금받을 나이를 올리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노사갈등이 우려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서 비관적인 전망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재단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사가 대화할 수 있는 기구는 언제든지 필요하다. 경제적 문제가 없어지더라도 노사는 항상 서로 토론하고 대화해야 한다."
"두 명이 있어야 탱고를 출 수 있다"
▲ 야니 모런 사무총장이 취재팀에게 노동재단의 여러 회의실을 보여주고 있다. ⓒ 조명신
야니 모런 사무총장은 2시간에 가까운 인터뷰 동안 '대화'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썼다. 그가 되풀이한 "노사는 언제나 대화해야 한다"는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렇지만 민간기구에 불과한 노동재단이 사회경제위원회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한 힘은 분명히 '대화'였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고용 없는 성장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도 '대화'였다. 결국 그 대화의 힘은 '합의의 권위'를 만들어냈다.
노동재단을 빠져나왔는데도, 취재진의 머릿속에는 야니 모런 사무총장의 비유가 계속 맴돌았다. 그의 비유가 사회적 대화의 정신을 간결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두 명이 있어야 탱고가 가능하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 구영식 기자(팀장), 조명신 기자, 인수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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