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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학교' 학생들은 장총으로 훈련을 받고

[박용만과 그의 시대 34] 생도들은 장총으로 사격훈련을 받았다

등록|2010.11.17 12:04 수정|2010.11.17 12:04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끝이 안 보이는 대지는 대장간처럼 후끈거렸다. 야산도 눈에 띄지 않는 네브래스카 주의 대평원. 하늘 끝이 곧 땅 끝이었다. 1911년 7월 18일 원근 각처의 주민들이 헤이스팅스 대학 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사정없이 내리꽂는 불볕 때문에 파라솔을 든 여인들도 많았다. 헤이스팅스 시 고등학교 악대들이 높은 음조의 행진곡들을 다투어 연주했다. 그들이 트럼펫을 치켜들 때마다 악기의 놋쇠는 햇볕을 한 줌씩 공중에 내던지고 있었다. 헤이스팅스 데일리 트리뷴 신문에 의하면 그날 4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는 것이다.

▲ 커티스 사에서 제작한 복엽비행기(1911년) ⓒ 저자미상(저작권해제)


학교 운동장에는 말은 들었지만 생전 보지 못했던 비행기 한 대가 군중의 시선을 온통 휘어잡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바닷가 키티호크 인근 모래사장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건 1903년 12월.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실험이었다.

미 육군과 계약을 맺고 대중 앞에서 공식적인 시범비행을 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8년 9월. 미처 3년도 안 돼 한적한 시골도시 헤이스팅스에 비행기가 나타난 것이다. 수십 마일 떨어진 농장의 농부들마저 농사고 뭐고 내팽개치고 몰려들었다.

비행기는 위 아래로 날개가 둘 달린 복엽기였다. 뉴욕 주 버펄로에 있는 커티스 사에서 제작됐다. 비행기 주위엔 비행복을 입은 조종사와 작업복을 입은 장정들이 서너 명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행기의 엔진이 폭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개 뒤에 붙은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작업복을 입은 장정들이 날개 끝을 붙잡고 밀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운동장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하늘로 치솟은 조종사는 마치 자전거를 탄 자세였다. 날개 앞에 앉아 조종간을 쥔 채 오른쪽 팔을 흔들며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날 모여든 구경꾼들 가운데는 헤이스팅스 시에서 30마일 북쪽에 있는 그랜드 아일랜드(Grand Island)에서 농사를 짓는 일본인 농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놀란 건 커티스 복엽기만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동양인들이 군복을 입고 총을 메고 군중 앞에서 행진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한 50명 가량의 그 군인들이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산병교련 시범을 보이자 구경하던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외치는 그 구령은 분명 일본말이 아니었다. 일본인 농부들은 수소문 끝에 그들이 한인들이고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여름마다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소년병학교'로서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3년 후 그들은 순회강연 차 그랜드 아일랜드를 들른 일본 영사관 직원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했다. 그 영사관 직원 이누이는 곧장 헤이스팅스 대학 학장을 찾아가 항의했다. 그래서 대학 측은 '소년병학교'에 더 이상 학교 시설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등록 학생 수의 감소 원인도 있었지만 '소년병학교'가 1914년 여름방학을 마지막으로 폐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인이 됐다.

'소년병학교'는 1908년 5월 박용만, 박처후, 정한경, 임동식(당시 36세.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 인근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나중 '소년병학교'에서 훈련받고 제1회 졸업생이 됨)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해서 그것을 문서로 만들어 그 해 7월 덴버에서 열렸던 '애국동지대표회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제안자는 커니 시 대표 박처후, 링컨 시 대표 이종철, 오마하 시 대표 김사형이 대신 맡았다. 회의에서 의논이 분분했으나 대표 세 사람의 강력한 주장과 박용만, 김장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통과됐다.

김장호는 구한말 군인 출신이었다. 하와이 이민선을 탄 사람으로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에 있는 유명한 블리스 군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비록 문구상으로는 "매년 방학에 커니 시로 모여서 운동 체조 조련도 연습하기로"했다는 표현이었지만 실제로 군사훈련 실시를 의결한 것이다.

▲ 남북전쟁 때 쓰던 장총으로 사격훈련하는 생도들. 대열 뒤에서 지휘하는 박용만. ⓒ 독립기념관


그 해 12월 겨울방학 기간에 박용만, 박처후, 임동식 세 사람이 다시 모여 대소사를 의논하고 학생들이 오면 커니 시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임동식의 농장에서 우선 기숙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훈련과 동시에 농장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역시 커니 시 인근 조진찬의 농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훈련에 필요한 군용총도 구입했다. 미군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스프링필드 구식 장총이었다. 남북전쟁 때 사용되던 것들인데 정부의 불하품으로 지역의 총포상에서 팔고 있었다.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목총이 아닌 이 장총을 가지고 실제 사격훈련을 받았다.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정부와 교섭하고 정한경은 커니 시청과 교섭하여 미국 헌법은 외국인의 군사훈련을 허용하지 않는데도 묵허를 받았다. 1909년 6월 조진찬의 농장에 '소년병학교'의 군기를 세우고 처음 훈련이 시작됐다. 학생 수는 13명이었다. 이 '소년병학교'는 독립운동사에 있어 해외에 최초로 설립된 사관학교인 셈이다. 또 박용만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공개적으로 벌인 첫 사업이기도 했다.

다음해 4월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 찾아왔다. 헤이스팅스대학의 재무이사 존슨이 그들을 방문한 거였다. 대학의 기숙사와 학교 시설 일부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농지도 20에이커를 임대해 주겠다는 거였다. 헤이스팅스 시는 커니 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리 떨어진 소도시다. 그래서 붙잡는 커니 시를 뒤로 하고 '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 시로 옮겨갔다.

▲ 헤이스팅스 대학 ⓒ 이미경(사용허가)


존슨 부부는 신앙심이 깊은 장로교 신자였다. 그의 부인은 선교사로 극동을 다녀왔다. 헤이스팅스 대학이 '소년병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독교를 전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만주 선교를 다녀온 로이스 목사도 있어서 '소년병학교' 과목의 하나인 성경을 가르쳤다. 헤이스팅스 데일리 트리뷴 1910년 7월 1일자 신문은 '한인학교는 잘 자리 잡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제자리를 찾은 듯 안정되고 있다.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군사훈련을 위시하여 대학 준비과정 학과들이 짜진 이 학교에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의 군사훈련을 맡고 있는 김장호 교관이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블리스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학교 책임자들은 이번 여름의 훈련생 수에 만족하며 내년 여름에는 더 많은 훈련생들이 등록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박용만은 개학이 되자 학교를 김장호에게 맡기고 한인들이 많은 서부로 떠났다. 학교를 알리고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귀환하기 전 이승만이 헤이스팅스를 방문했다. 박용만이 초청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 해 6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들른 것이다.

▲ 소년병학교를 방문한 이승만이 생도들과. 오른쪽에서 3번째(1910년) ⓒ 독립기념관


이승만은 훈련생들을 상대로 매일 세 번씩 부흥기도회를 열었다. 찬송가를 소리 높이 부르는 가하면 울부짖는 통성기도도 했다. 그는 장인환, 전명운, 안중근이 형법상 살인범들이며 민족의 명예를 더럽혔고, 일본이 강대국이어서 군사적으로 맞선다는 것은 망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이나 부흥기도회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생들에겐 황당한 것이었다. 그는 현지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사실상 일본의 영토가 된 지 오래였고, 황제가 있다고 하나 허수아비일 뿐 모든 중요한 결정은 통감부에서 내렸다고 말했다.

두 달 동안 서부지역을 돌면서 약 6백 불을 모금한 박용만은 8월 25일 헤이스팅스로 돌아왔다. 그 돈으로 군복과 야구팀 유니폼을 구입하고 교사들에게도 급료의 일부를 지급했다. 이승만에게도 여비를 지불했다. 바로 며칠 후인 8월 29일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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