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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흙집이 아니라, 뒷간이라고?

[여행]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못지않은 양양 달래길

등록|2010.11.17 13:28 수정|2010.11.17 17:34
달래길을 찾았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달래길, 걷기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게도 낯선 길입니다. 양양읍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하월천리로 갔습니다. 달래길에 대한 단서는 어렴풋이 보이는 지도 한 장뿐이었습니다.

읍내에서 만난 양양 분들도 처음 듣는 길이라며 억센 강원도 사투리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지도 한 장과 그 아래 몇 자 적힌 주소가 전부였습니다. 주소를 다시 보았습니다.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하월천리 달래촌이었습니다.

▲ 달래촌과 인구2리의 5백년 된 연리목 소나무 ⓒ 김종길


7번 국도에서 인구리로 접어들어 하월천리 가는 길을 잡았습니다. 인구2리에서 정이품송을 닮은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줄기가 하나로 붙은 연리목이었습니다. 초행길이 당황스러워도 주변의 풍광에선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사진은 나중에 찍기로 하고 눈에만 담았습니다. 돌아오면서 배추를 수확하고 있는 마을주민들한테 수령을 물어보니 자신들은 잘 모르겠고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500년은 되었다고 하더군요. 한눈에 보아도 잘생긴 나무입니다.

양지말이라는 곳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멋진 당산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눈에만 담았습니다. 달래길에서 나오면서 이곳에 다시 들렀습니다. 180년이 된 높은 나무는 새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가지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좁은 논길을 따라 당산나무로 오더니 여행자에게 무슨 일인가하고 오랜 세월을 물었습니다.

▲ 웃달래마을의 감 따는 풍경과 뒷간 ⓒ 김종길


응달말을 지나니 시냇가를 따라가던 도로가 갑자기 산중으로 갑니다. 정자골, 사씨성, 가마골로 길은 이어집니다. 한참이나 산길을 달려 고개를 넘었습니다. 평지가 언뜻 보이는 듯하더니 웃달래라는 마을이 나왔습니다.

요즘 보기 힘든 흙집이 눈에 띄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따던 주민에게 흙집의 용도를 물었습니다. "저거요. 정랑이라요." "아, 예." 바보스럽게도 그제까지 보이지 않던 양쪽으로 난 문이 보였습니다. 뒷간이라는 걸 왜 생각 못했을까요. 정랑 벽에는 나무쟁기가 매어져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옛 풍경에 감 줍는 부부가 정겨웠습니다.

▲ 응달마을을 지나면 흙길임도가 이어진다. ⓒ 김종길


쟁골 인근쯤에서 길을 물었습니다. 골짜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달래길을 물으니 "이 주위가 전부 달래길인데, 어디를 갈 겁니까?" 적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달래촌에서 시작된다고 하더군요." "아, 달래촌요.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됩니다. 아니면 하월천리 응달마을에서 달래촌까지 산길로 가면 달래길이지요. 하얀 집이 있고 안내도도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됩니다."

▲ 달래길을 찾는 여행자에게 설명하는 응달마을 주민 ⓒ 김종길


얼마를 가니 솟대가 장식된 마을 초입이 보였습니다. 주민으로 보이는 노인 몇 분이 있었습니다. 달래촌인가 싶어 차에서 내렸습니다. 알고 보니 응달마을이었습니다. 달래촌은 조금 더 가야 된다고 마을 주민 한 분이 말했습니다. 다행히 이곳에는 달래길이 시작됨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설명해준 주민 덕분에 겨우 길을 찾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애 방면에서 들어왔다면 달래촌을 쉽게 찾았을 것입니다.

▲ 응달마을의 어느 농가 ⓒ 김종길


주민의 안내대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이곳에는 흙집들이 더러 남아 있습니다. 새로 지은 집과 묘하게 어울리는 흙집의 벽에는 겨울에 먹을 시래기가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여행자가 좋아하는 소박한 풍경입니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멘트길이 다소 가파르게 산중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리 숲이 울창해도 여행자는 반듯한 포장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우였을까요. 고개를 넘으니 거짓말처럼 흙길 임도가 나왔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갑니다.

▲ 계곡가 바위 아래 토종벌꿀통 ⓒ 김종길


양지바른 곳의 무덤에는 잔디가 곱게 자랐습니다. 응달진 큰 바위 아래에는 토종벌꿀통이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꺼두고 싶은 전화가 갑자기 울립니다. 양양에 사는 시인의 목소리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 계곡과 숲, 생태관찰 코스가 어우러진 달래길은 현남면 하월천리 달래촌에 80㎞ 거리로 조성된 트레킹 코스다. ⓒ 김종길


주고받는 대화가 다할 즈음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흐르는 소리였습니다. 길 아래 수풀을 헤치고 물소리 나는 곳으로 무작정 내려갔습니다. 잎을 떨군 가지 사이로 하얀 물살이 보입니다. 사방이 바위절벽이고 나무들이 하늘마저 가려버렸습니다. 물 위로 떠내려 온 나뭇잎 하나가 이 숲의 유일한 유랑객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습니다. 이미 시간도 계곡을 따라 내려가 버렸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아직은 울긋불긋한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길 위로 나왔습니다. 산속으로 길은 이어졌습니다. 길가에 예쁜 보랏빛 열매가 있었습니다. 좀작살나무였습니다. 새 가지가 날 때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 삼지창을 닮아 작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작살보다 작아 좀작살이고요. 작지만 동글동글 무리지어 맺힌 모습이 참으로 예쁩니다.

▲ 달래길에서 만난 까치밥 감과 보랏빛 좀작살나무 열매 ⓒ 김종길


좁은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를 돌아가니 갑자기 앞이 탁 트였습니다. 놀랍게도 층층 다랭이논이 있었습니다. 얼핏 보아도 12도가리(논배미)는 되어 보였습니다. 콤바인 한 대가 가을일을 끝내고 쉬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도가리가 있었겠지만 몇 개의 작은 도가리를 큰 도가리로 만들어 기계가 들어갈 수 있도록 경지 정리를 한 모양입니다.

▲ 달래길 산중에서 만난 다랭이논 ⓒ 김종길


산길을 계속 올랐습니다. 고갯길에 다다르자 더 이상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작년 혼자 산행을 하다 멧돼지떼를 만나 식겁해, 깊은 산중을 찾는 것이 조금은 겁이 났습니다. 대신 계곡 쪽으로 난 논두렁길을 걸었습니다.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런 길 말입니다.

여행자말고도 한 명이 길을 따릅니다. 논바닥에 길게 늘어선 또 다른 여행자입니다. 깨를 털고 난 논에 깊게 드린 그림자는 평생 여행자와 같이 할 도반입니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닌 여행자는 늘 행복합니다.

▲ 여행자의 도반 ⓒ 김종길


다랭이논 끝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산촌 사람들이 이미 감을 따고 까치밥으로 남긴 감 하나가 대롱대롱 늦가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달래촌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달래길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하월천리 달래촌 80km에 조성된 달래길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달래길'이라는 이름을 단 트레킹 코스입니다. 달래촌 화동(꽃골)에서 시작되는 달래길은 계곡과 숲, 생태관찰 코스가 어우러져 설악산 삼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에 비해 아직 덜 알려졌지만 지속적인 홍보가 된다면 이에 못지않은 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11개의 코스가 조성되었고 앞으로 200km까지 확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여행자도 이 모든 코스를 언젠가 꼭 걷고 싶을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인 길이었습니다. 시골마을의 여유와 설악산의 풍경을 담고 있는 달래길이 강원도의 또 다른 명소가 될 날도 멀지 않아 보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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