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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학교에서 강조한 것은 '인내심'이었다

[박용만과 그의 시대 35]

등록|2010.11.19 10:30 수정|2010.11.19 10:30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 소년병학교 생도들의 도수체조. 등을 보이고 있는 교관이 박용만. ⓒ 독립기념관



▲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훈련하는 생도들. 뒤에 서 있는 지휘관이 박용만. ⓒ 독립기념관


강대국 일본에 군사력으로 맞서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이승만의 엇박자가 있었음에도, 그해 여름 김장호는 박용만이 자리를 비운 동안 군사교육을 충실히 실시했다. 박용만이 돌아오자 그는 극동으로 가기 위해 뉴욕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넘는다.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유명한 미주리 주 메콘 시의 블리스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독립운동의 현장인 극동으로 건너가 선진된 군사학을 가르치고자 했다. 또 소년병학교가 지향할 다음 단계의 과업과 현지에 설치할 기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목적이었다.

대륙을 가로지르고 대양을 넘고 또 다시 대륙을 횡단해서 김장호가 마침내 하얼빈 역에 내린 건 1911년 1월. 드디어 장부의 기백을 한껏 펼쳐 보일 결전의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 감회를 그는 이렇게 적어 보냈다.  

"나의 일편단심은 재미동포가 아니면 알 수 없을지니 동포여 동포여 만주 들 넓은 곳에 북소리 땅땅 나며 백두산 높은 봉에 태극기 펄펄 날릴 때 발걸음 맞추어 다 오시오. 어깨바람 활활 치며 어서 속히 내 뒤만 따르시오. 굿바이 신대륙아, 굿바이 대서양아."

석 달 후인 4월 12일자 <신한민보>에 김장호의 편지가 또 실렸다. 한인촌 12개 지역과 한인학교 5곳을 방문했으며 1천여 명의 동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동포들 중에 뜻을 같이해 몸을 바치기로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아 그 기쁨은 말할 수 없고 미주의 동지들이 속히 건너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 독립기념관

그리고 아라사 영사관에서 비자는 어떻게 받으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때는 베개와 요는 물론 작은 주전자도 필요하다는 등의 정보들도 같이 적었다. 하얼빈 역에서는 마차를 타면 되고 한인 집으로 가자고만 하면 데려다 줄 것이며 현지인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주선해 줄 것이니 아무 염려 말고 속히 모두 만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5월 10일자 신문에 실린 편지에는 그의 어조가 사뭇 달라진다. "생이 이전 편지할 때 여러 동포를 동으로 오시라고 청했으나 이곳 와서 보매 오시는 것이 필요치 않으니 아직 중지하시고 아무쪼록 여러 청년들은 공부와 실업에 종사하시오"라고 쓴 것이다.

만주 최초의 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때여서 그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게 무엇 보다 걸림돌이었다. 약 4개월 후 그는 미국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박용만은 김장호로부터 현지의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극동의 독립운동은 아직 미숙하고 불안한 상태이므로 성급하게 건너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됐다. 대신 구한말 군인들이 많이 와 있는 하와이에서 둔전제 군사훈련을 시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결론도 도출할 수 있었다.

김장호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이회영, 손정도 목사와 같은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해 주었다. 박용만은 하와이로 건너간 뒤에도 이들과 교신을 계속했다.
    

▲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목사 ⓒ 독립기념관

소년병학교가 강조한 정신교육은 독립군 장교로서 무엇 보다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었다. 박용만이 말하는 '인내심'은 꾸준히 준비해 조국이 부를 때 독립군 장교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절제하고 고학의 어려움을 견디며 학업을 마쳐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는 거였다.

1911년 5월 10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생활'이라는 글에서 박용만은 학생들의 일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년병학교 학생은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이라 일찍이 모아둔 돈도 없고, 남의 도움도 없이 3년 동안을 자기들이 벌어먹고 자기들이 공부하는 학생이니 대개 그 정형을 말하면 아침 6시에 기상나팔이 불면 일제히 일어나 5분 후에 검사를 치르고 또 연하여 세수하고 아침을 먹은 후 각각 시간 일을  농장에 나가 한 시간에 20전이나 25전을 받고 일하되 만일 시간 일이 학생의 수대로 다 되지 못하면 그 남은 학생들은 학교농장에 들어가 일을 하여 누구든지 12시 15분에 회식나팔을 불면 일제히 대열을 지어가지고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으며, 점심 후 한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자기의 마음대로 하고 그 후에는 공부를 시작하여 두 시간을 허비하고, 또 그 후에는 취군나팔에 응하여 군복 차려 입고 군기 가지고 조련장에 들어가 각양 조련을 연습하며, 6시에 다시 식당에 들어가며, 그 후에는 공치기, 달리기, 씨름, 총쏘기와 풍류치기와 나팔 불기와 여러 가지로 각각 소창하고 밤에 또 공부시키는 과정이 있어 각각 정한 시간대로 교과실에 들어오며, 만일 자기의 공부 시간이 아니면 방에 앉아 공부를 복습하다가 저녁 검사를 치르고 소등나팔을 불면 일제히 취침하더라.

위에 말한 바는 병학생들이 여름을 지내는 정형이며 8월 그믐이 되면 또 각각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흔히 스쿨보이로 들어가 한 주일에 2원이나 혹은 3원씩 받고 일하여 이것으로 지필(紙筆)도 사고 의복도 마련하니 그 구차한 것이 자못 많으나 그 자격은 장차 독립전쟁의 지휘관이라.

이렇게 지내는 것은 소년병학도의 생활이요, 이렇게 견디는 것은 소년병학도의 참는 힘이요, 또 이렇게 살고 참는 것은 소년병학도의 풍속이라...(하략) "

소년병학교의 영어이름은 'Young Koreans' Military School'이었다. 다시 번역하면 '한인청년 군사학교'가 된다. 소년병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은 다양했다. 과목수가 무려 10개나 됐다. 한글은 물론 영어, 중국어, 일어까지 가르쳤다.

한글은 김현구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같이 탔던 홍승국이 담당했다. 문법과 작문을 가르쳤으며 어린 나이에 건너 온 생도들이 부모에게 편지 쓰는 법까지 배우게 했다.

중국어 시간에는 한문을 가르쳤는데 슈피리어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던 한학자 박장순이 와서 가르쳤다. 그는 중국 고전인 사서(四書)를 번역한 실력가였다. 역사시간에는 구한말 군인이었던 이종철이 교사로 조선역사, 미국역사, 그리고 열국혁명전사(列國革命戰史)를 가르쳤다. 조선역사를 가르침으로 조선의 얼을 찾게 하고 미국역사를 가르침으로 조국의 미래상을 그려보게 하며 또 열국의 혁명전사를 배움으로서 독립전사의 갈 길을 가늠케 했다.

지리(地理)는 정희원이 맡아 만국지리, 조선지리, 군용지리를 세분해서 가르쳤고 과학은 이용규가 교사로 식물, 동물, 물리, 화학을 가르쳤다. 수학은 한때 <신한민보>의 주필이었고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지낸 백일규가 대수와 기하를 교수했다. 성경도 과목의 하나였는데 로이스 목사가 구약과 신약을 가르쳤다.

군사학은 이종철과 정희원이 담당했다. 훈련과 학술로 구분해서 가르쳤다. 훈련에는 도수훈련, 집총훈련, 소·중대 전투훈련, 야전실습, 사격연습이 있었다. 학술에는 보병훈련, 군대내무수칙, 군대예절, 군인위생, 군법, 명장전법(名將戰法)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 소년병학교 교관들. 중앙의 이종철은 구한말 군인 출신으로 군사학 교관이었다. ⓒ 독립기념관


이렇게 짜임새 있는 군사훈련을 받은 결과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는 소년병학교 출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면제해 줬다. 세 번의 여름방학에 걸친 훈련을 받았으니 두 해 동안의 군사훈련을 새로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다른 대학에서도 소년병학교에서 이수한 '변론'과 '성경공부' 그리고 '윤리'를 정식 과목으로 인정했다.

이것은 소년병학교의 교관단이 미국의 군사교육을 체험하면서 그 수준에 맞는 가장 적절한 훈련과정을 도입했음을 드러내준다.      

기상나팔이 생도들의 잠을 흔들어 깨울 때면 대평원은 이미 햇빛으로 가득 찬다. 아침식사가 끝난 7시 그들은 대열을 지어 농장으로 행진했다. 오후 3시 다시 나팔이 울린다. 대열을 지어 그들은 훈련장을 향해 행진했다.

행진 도중에는 군가를 불렀다. 박용만이 작사한 '소년병학교 군가'였다. '독립기 들고 북치는 노래 대장부 사업 이 뿐일세. 종군악 종군악 ...'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군가 소리는 이국 땅 들판을 쩡쩡 울렸다.

소년병학교 군가

이 몸 조선국민 되어 오늘 비로소 군대에 바쳐
군장 입고 담총(擔銃)하니 사나이 놀음 처음일세.
(후렴) 종군악(從軍樂) 종군악 청년 군가 높이 하라
사천년 영광 회복하고 이천만 동포 안녕토록
종군악 종군악 이 군가로 우리 평생

군인은 원래 나라의 번병(藩屛) 존망과 안위를 담당한 자
장수가 되나 군사가 되나 나의 직분 다 할 것 (후렴)

나팔소리 들릴 때마다 곤한 잠을 쉬이 깨어
예령 동령 부를 때마다 정신 차려 활동하라 (후렴)

우리 조련 이같이 함은 황천(皇天)이 응당 아시리라
독립기 들고 북치는 노래 대장부 사업 이 뿐일세. (후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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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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