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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박정희·이명박, 특별히 사랑했노라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빛과 그늘①] 강남 부동산 불패· 8학군의 탄생

등록|2010.11.23 10:14 수정|2010.11.23 15:12
올해는 부동산의 강남불패 신화를 탄생시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아파트가 처음 분양된 지 35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0년대에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탄생하면서 강남 특권층, 부동산투기, 8학군 및 위장전입 등 여러 사회문제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현대아파트 35년을 맞아서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강남개발의 역사, 이 지역의 부동산 실태, 현대아파트 재건축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기사는 김준희, 최육상 두 명이 공동 작성, 총 4편으로 구성했으며 각각 교육문화, 사회, 정치, 경제를 중심으로 접근했습니다.... 기자주

▲ 지난 8월 흐린 날, 강북에서 바라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모습. ⓒ 김준희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1970년대 후반,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김준희)에게 최고의 가수는 혜은이였다. 조용필이 나타나서 1980년대를 평정하기 전까지, 혜은이가 불렀던 '제3한강교', '감수광' 등의 노래는 언제나 나를 기분좋게 만들었다. '감수광'이 무슨 뜻인지 '제3한강교'가 어느 다리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3한강교가 한남대교라는 사실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되었다. 혜은이가 한남대교에 얽힌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남 개발에 있어서 한남대교는 꽤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한남대교가 착공된 것은 1966년. 처음 박정희 정권의 의도는 전쟁 등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서울시민들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 의도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현실화됐다. 한남대교는 강북과 현재의 강남구를 연결하는 첫 번째 한강다리였다. 한남대교가 완공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강남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 일대의 땅값은 거의 천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자고나면 땅값이 쑥쑥 오르는 '말죽거리 신화'가 이때 만들어졌다.

'강남 땅 사면 부자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유사시 대피'가 아닌 투기를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강남 개발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강남 지역을 '영동'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개발 초기에는 신축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시민들이 강남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강남은 학교도 유흥가도 없는 시쳇말로 '깡촌'이었으니까. 그래서 정부에서는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등에 유흥시설 신규허가 및 이전을 불허하는 정책을 발표한다. 강북의 유흥업소들이 대거 강남으로 내려왔고 강남에 유흥가가 조성됐다.

동시에 강남의 땅을 사서 그곳에 건축물을 지으면 나중에 그 건물을 팔아도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도 내놓았다. 기형적인 주택투기의 뿌리, '강남불패' 신화도 바로 이때 함께 형성된다.

그 강남불패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다. 서울 압구정동은 한남대교의 동쪽, 동호대교와 성수대교의 남단에 위치한다. 알파벳 'W' 모양으로 생긴 한강, 그 W의 한 가운데 아랫부분이다. 압구정동의 한 상인은 지도에서 압구정동을 가리키며 그 모습이 '복어배처럼 볼록하다'며 웃기도 했다.

7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강남과 압구정

▲ 과거 압구정이 있던 자리(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내에 있는 압구정지 표석) ⓒ 김준희


압구정(押鷗亭)이란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서 왕위에 등극시킨 책사 한명회의 호가 바로 압구(押鷗)였다. '압구'라는 말은 '세상 일을 모두 잊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명회는 지금의 현대아파트 자리에 압구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기도 했다. 정자 압구정은 조선시대 말에 사라졌지만 그 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4동 뒷편에 가면 '압구정지(押鷗亭址)'라는 글이 새겨진 표석이 있다.

압구정동 일대에는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배밭과 과수원이 많았다. 1970년대 중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배밭을 밀어버리고 대규모의 공사를 시작했다. 봄이면 배꽃이 만발하던 곳에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강남 특권층'도 이때 함께 탄생한다. 1978년, 현대그룹 계열사인 ㈜한국도시개발은 압구정동에 사원용 아파트 900채를 지어서 그 중 600채를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특혜로 분양하는 불법을 저지른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의원도 관계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특혜로 분양을 받아서 현대아파트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국회의원,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런 고위층들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모이면서 '강남 특권층'을 형성한 것이다.

강남 8학군도 이때 만들어진다. 아무리 고급 신축아파트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학교가 없으면 학부모들은 그 지역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강북에 있는 명문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내놓는다. 강남에 새로운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는 기존의 명문고를 옮기는 것이 강남부자들에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강남 특권층과 함께 만들어진 8학군

▲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가는 길. ⓒ 김준희


군사정권이라도 학생들이 멀쩡하게 다니고 있는 학교를 강제로 이전 시킨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교 측은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지만 정권의 설득과 합의 끝에 결국 1976년 경기고가 첫 번째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강북 경기고 부지는 이후에 정독도서관으로 변신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78년에는 휘문고가 경기고의 뒤를 이어서 강남으로 내려왔다.

1978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강북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할 경우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말한다. 철권을 휘두르던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으니 학교 측도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80년에는 숙명여중고와 서울고, 1984년에는 중동고가 강남으로 각각 이전한다. 이렇게 해서 강남 8학군이 조성된다.

백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의 모교인 배재중고교도 1984년에 중구 정동에서 강동구 명일동(이전 당시 명일동, 현재는 고덕동)으로 이전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변두리로 내려오게 된 당시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학교 이전 문제에 있어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같은 것은 아마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8학군에서 명문대학 합격자의 수가 많아지자 위장전입의 문제가 생겨났다. 위장전입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녀의 교육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위장전입이라는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으로는 워낙 자주 거론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위장전입에 대한 불감증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위장전입도 그렇지만 8학군 자체도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보내려는 학부모들이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강남으로 이사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입학 정원을 초과해서 학생들이 전입해 들어오기 때문에 한때는 서울시내 과밀고교의 절반이 강남지역에 몰려 있을 정도였다.

교육감 선거를 통해서 바라본 강남의 성향

▲ 동호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압구정 현대아파트. ⓒ 김준희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를 보면 '압구정'으로 대변되는 강남구 주민들의 교육관이 얼마나 투철한지 알 수 있다. 2008년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보수성향의 공정택 후보는 서울시 전체 25개 구 중 단 8개 구에서만 이기고도 교육감에 당선됐다.

공정택 후보는 전체 40% 득표율을 올리며 경쟁자인 진보 성향의 주경복 후보를 불과 1.5% 포인트 차이로 힘겹게 이겼다. 그런데 이 1.5% 포인트 차이가 보여주는 실질적인 내용은 가히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공정택 후보의 당선을 이끈 것은 단연 강남구 주민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공정택 후보는 강남구에서 5만2032표를 얻어, 1만9256표에 머문 주경복 후보를 3만2776표 차이로 제쳤다. 이는 공정택 후보 49만2611표, 주경복 후보 47만616표 등 두 후보들이 얻은 전체 득표수 차이인 2만1995표를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 영등포구, 용산구, 중구, 종로구 등에서도 공정택 후보가 앞서기는 했지만 강남구의 기여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올해 6월 2일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 성향의 곽노현 후보는 34.34%를 득표해 보수 성향의 이원희 후보를 불과 1.1% 포인트 앞서며 교육감에 당선됐다. 서울 25개 구 가운데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6곳에서만 이원희 후보가 우세를 보였고 나머지 19개 구에서는 곽노현 후보가 승리했다.

2008년 선거와 마찬가지로 강남구는 보수 후보에게 표를 실어줬다. 다만, 이번에는 보수 후보가 여럿으로 나뉘는 바람에 단일 진보후보로 나선 곽노현 후보를 꺾는 '보수후보 몰표'를 행사하지 못한 점이 2008년과 다를 뿐이다.

35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현대아파트

▲ 35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낡은 외관의 압구정 현대아파트. ⓒ 김준희


이렇듯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남 보수층의 형성, 망국적인 부동산투기, '8학군병'으로 불릴 정도로 잘못된 교육열풍과 그에 따른 위장전입 등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바로 1970년대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다름 아닌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1차 입주년도는 35년 전인 1976년이다. 그때 이후로 강산이 세 번 반 바뀔 시간이 흐르며 서울시에 무수히 많은 아파트가 생겼지만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명성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시대 때에도 한강변에는 정자가 많았지만 한명회의 압구정이 가장 유명하고 또한 논란거리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정자를 세우는 것은 현실정치에서의 은퇴를 의미했다. 하지만 한명회는 정자를 세우고도 권력에 연연했기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압구정은 권력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던 한명회의 아쉬움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곳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이 모이고 만들어진다.

▲ 동호대교 남단 압구정역 앞에 위치한 현대백화점.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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