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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겠다며 집 나간지 넉달

호주 육가공처리업체로 워킹 간 아들놈이 보낸 메일 한 통

등록|2010.11.23 18:35 수정|2010.11.23 18:35
서해안 연평도에 북한이 발사한 폭탄이 떨어져 군인들과 주민들이 다쳤다는 속보가 나온다. 그곳 주민들과 자식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님들은 얼마나 걱정이 많을까. 그러던 차 지난 7월 중순경 호주로 워킹홀리데이(working holiday-나라간에 협정을 맺어 젊은이들로 하여금 여행 중인 방문국에서 취업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해주는 제도)를 가 있는 아들놈으로부터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놈을 내가 억지로 군에 보냈는데, 허걱~공교롭게도 배치받은 곳이 최전방 철책선이었다. 그래도 이 애비 원망 한 번 안 하고 지난 1월 무사히 제대를 했다. 근데 이놈이 제대하던 바로 그다음날, 그것도 엄동설한 칼바람이 부는 새벽녘부터 알바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디라고 말도 안 하고 어떤 날은 그다음날 새벽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랬다. 그때 아들놈은 호주로 워킹을 가기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방송국 세트장 철거와 몸은 고달파도 일당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다니며 알바를 했던 것이였다. 비행기값만 지원해 주면 나머지는 지가 다 알아서 한다며 나를 설득했다. 호주 멜버른 어딘가에 있는 육가공회사에서 고기부산물을 처리하는 일인데 자리 잡히는데로 영어공부도 하고 세상 물정도 익혀서 오겠단다. 아울러 졸업할 때까지 드는 학자금은 본인이 빡시게 벌어 정승같이 쓰면서 학교생활을 하겠단다.

그런 놈을 어떻게? 보내야지, 암. 그래서 보냈다. 남자놈이 어디가든 중심 흔들리지 않고 도둑질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가기 전날 소주 두 병 시원하게 나눠먹고 비행기 태워 보냈다. 공항서 돌아오는데 찍힌 문자 한 통 "아빠, 고맙습니다. 제가 알바비 쓰고남은 돈 50만원 아빠통장에 넣어 드렸습니다"  이 애비를 뭘로 알고 저놈이... 그랬다. 그랬던 그놈이 호주 간 후 첨으로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

"아빠, 방갑...메일주소는 이게 맞을려나; 기억이 가물가물ㅠㅠㅠㅠㅠㅠㅠ
암튼 오늘 일이 쉬게되서 빈둥대다가 이렇게 보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맨날 이렇게 쉬니 개뿔 돈도 안되고 죽겠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이 자슥이 지 친구한테 보내는 걸 잘못 보냈나. "ㅠㅠㅠ, ㅋㅋㅋ"가 뭐시여.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더 읽어는 봐야 겠다. 부모 자식간에 이처럼 허물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 내가 울 아부지한테 이랬다가는? ㅎㅎㅎ 나도 잘모르겠다. 아무래도 욕 한 바가지 정도는 먹었겠지.

"앞으로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돈이나 공부나 제스스로 어느정도 만족할만한 목표치까지는 이룬 다음에 한국 들어가려고 하오니 좀 걸리더라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ㅜㅜ 안그래도 요즘 저랑 처지가 비슷한 형 한명이랑 학교니 진로니 이것저것 알아보고 찾아보고 짱돌 굴리며 용쓰느라 나름 스트레습니다ㅋㅋㅋ 저도 맘같아선 당장이라도 한국 가고싶지만 간다고 뭐 달라지겠습니까"

아들아, 좀 아니 많이 걸리더라도 이해하마. 너 들어 온다고 달라지는 거 없으니 아니 들어와도 된다. 비싼 비행기 타고 간지 이제 넉 달밖에 안 됐고, 너 돈 벌어 이 애비한테 비행기표라도 사서 보내면 덕분에 나도 호주땅 한 번 밟아나 보자. 여기는 지금 북한에서 포 쏘고 난리도 아니다.

"요즘 곧 살인폭염이 시작되려는지 폭풍전야처럼 요몇일 바짝 찬바람이 불어요. 이 바람이 멈추면 45도를 육박하는 호주의 살인여름이 시작된다고 하니 ㅋㅋㅋ 뭐, 이깟 더위 이에 타향살이쯤 피끓는23세 청춘에겐 아무 문제없습니다. 자고로 돈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랬다고  나중에 학교다닐 생각하면 까짓꺼 앞으로 1, 2년인들 더 못하겠습니까 (솔직히 못하겠음ㅋㅋㅋㅋ)"

그래 피끓는 니 나이 23살이면 달리는 6-1번 마을버스에서 뛰내려 철근도 씹어먹을 나이 아니겠니. 호주산 소고기 덩어리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말대로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쓸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안 되겠니. 그러다가도 순간 "솔직히 못하겠음"이라는 말에 목이 칵 메여온다. 철책근무시 무릎 도가니에 물이 차 수술할 때도 알리지 않던 놈이 오즉하면 저 소리를 했을까 싶네요.

"아직은 학비마련이 머나먼 꿈만같지만 ㅠㅠㅠㅋㅋㅋ 이렇게 빡쌔게 번돈 학비로 내면 수석졸업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암튼 전 이렇게 미친 자신감 하나로 살고있으니 아무 걱정마시고 건강관리 잘하세욧! 앞으로 적어도 사십년은 더 창창하셔야 되니깐 지금부터 신경쓰셔야 됩니다. 무슨 내용이 마치 지금 이라크 파병이라도 와있는 것 같네요ㅋㅋㅋ

암튼 부디 건강하시고 집에도 '제발' 별일없이 조금씩 조금씩 다 잘풀리고 다가오는 연말, 몸도 마음도 따듯하게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들 올림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일교야, 수석 졸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 애비 걱정말고 니 걱정이나 잘하세요. 아닌 밤중 폭탄이 날아오는 현실에서 잠시나마 혼동스럽고 불안했던 오늘. 그러나 이제는 이 애비를 걱정해 주는 든든한 방공호 같은 자식이 있으니 무엇인들 두려울까. 아무쪼록 내 자식만큼이나 연평도 모든 이들도 무사하길 빌어본다.

군대가서 첨으로 보낸 아들놈 편지...최전방 철책으로 자대배치 받고도 잘이겨 냈듯이 이번 워킹도 잘해 내리라 믿는다... ⓒ 서정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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