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0년대 초에 군대생활을 하였습니다. 4월 9일 집에서 출발하여 집결지 남원으로 가서, 입대 친구들과 함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밀고 여관에서 잤습니다. 다음 날 남원역 광장에 모여서 논산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애인이 있는 장정들은 애인과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눈물을 찍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40년 전 4월에.
논산에 도착한 날 저녁에 8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구보로 수용연대로 들어갔습니다. 첫날 저녁, 막사 하나에 왕창 집어넣고 누워 자라고 하였습니다. 갓 입대한 장정들이 도저히 다 잘 수가 없을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데, 기간병 하나가 들어오자마자 질서를 잡아버렸습니다. 기간병은 <동작 봐라, 자리에 눕는다! 실시!>라고 말하고는 들고 온 '빠따'를 휘둘렀거든요.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맞으니까 잽싸게 침상에 쓰러졌습니다.
아주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그 시끄럽던 내무반을 평정해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0일간은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사역병으로 끌려 다니다가 겨우 교육연대로 넘어갔습니다. 그날이 21일, 정식 입대 날입니다. 지금은 집에서 군대에 들어 온 날이 입대 날이라는데, 그때는 교육연대로 넘어가는 날이 입대 날이었습니다. 6주간의 기본교육을 마치고 다시 김해공병학교로 갔습니다. 4주간의 특과교육을 이수하고 제3보충대를 거쳐 우리 형님들이 군대생활을 하였던 강원도로 갔습니다. 우리 중대는 양구의 어느 산에서 군용도로를 닦고 있었습니다. 공병이 된 나는 날마다 미제 야전삽과 곡괭이로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농사꾼으로 일하다가 입대한 나는 그 일이 그 일이었지만, 대학을 다니다 온 친구들이나 사무직으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온 친구들은 무척 힘들어하였습니다.
나는 농촌운동을 한답시고, 조국과 민족이 어떻고 하다가 입대하였습니다. 군대생활 3년간은 내가 조국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와 보니 엉망이었습니다. 군인들이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분간 일하고 10분간 휴식을 반복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정말 걱정스러웠습니다.
행동도 군인답지 않게 보였고,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면 산골짜기 천막 안에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꼴이라니. 일도 죽자 살자해야 할 텐데,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인지 막노동꾼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나날을 보낸다고 해야겠지요. 참 군인으로 헌신하고 기회가 되면 목숨까지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나는 적잖은 실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파견지 분대의 가장 졸병이었던 나는 혼자 초번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천막 안에는 남포등을 켜 놓고 질퍽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지요. 나는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깊은 산 속에서 혼자 보초를 서면서 이상한 새 울음소릴 들으면서,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도자 삽날을 방패삼아 서서 기다리는데, 군인 한명이 걸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손들어 뒤로 돌아!"
벼락같은 소리를 냅다 질렀습니다. 군대 들어와서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뒤로돌아 섰습니다. 다음 순서는 암구호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순간에 천막 안에 누워서 허접한 소리를 나누던 분대원 전원이, 빈총을 들고 다 뛰어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이런 것을 두고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삽질할 때는 삽질꾼이고 농담을 주고받을 때는 농담꾼이지만, 여차하면 다들 총을 들고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다음은 그 2년 후의 일입니다.
우리 중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 후에 내무반에서 야간 교육을 하고 있었고, 나는 후배 한 명과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특별한 지시를 받고 보초를 서고 있었지요. 인근 부대가 야간 훈련을 하면서 우리한테 협조를 구하지 않았다며, 철저히 경계근무를 하라는 거였습니다. 사실 내무반에서 교육을 한다고 해 봐야 절도 있는 교육은 아니었습니다. 시간 보내기 교육이었지요.
보초를 끝낼 시각이 다 돼 가는 그때, 한 떼의 군인들이 야간훈련을 하면서 골짜기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후문에서 보초가 정지명령을 내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말소리를 내면서 오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서 있던 내가 힘찬 목소리로 다시 정지구령을 내렸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일은 초병의 구령을 무시한 것도 문제인데, 나한테 전등을 비추면서 돌을 던져 내 눈두덩을 깬 것입니다.
이때 내가 공포탄을 한방 쐈지요. 그랬더니 내무반에서 교육 중이던 중대원들이 다들 총을 들고 뛰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중대원들의 민첩하고 군인다운 경계출동 태세는 자랑스러운 정도였습니다. 나는 의무과로 가서 치료를 받고 당직 사령실로 가서 상황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무모한 짓을 감행한 그 훈련부대의 인솔 장교도 와 있었습니다. 그 장교는 당직 사령관과 나한테 백배사죄하고 갔고, 나는 상처 난 얼굴 치료를 마친 뒤 표창장과 함께 포상 휴가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두 번의 현장체험을 통하여, 우리 군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정신 나간 일부군인과 국가관과 군인정신이 부족한 일부 지휘관들의 문제만 고치면 될 것입니다. 군기가 빠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인답지 못하고, 지휘관답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군기를 엄정히 세우고 교육 훈련만 잘 하면 우리 군을 믿을 만합니다. 다만 군기가 빠진 일부는 하루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는 군대가 되고 5000만 국민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은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적군을 많이 죽이고 이기는 것을 목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억제하는 군대가 가장 강한 군대입니다. 가장 잘 싸우는 것은 이기는 것이고, 이기되 사람을 하나도 다치거나 죽게 하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군기를 엄정히 바로 세우고, 사기를 진작시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강군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회초리를 들고 쳐야 하며,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국군을!
논산에 도착한 날 저녁에 8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구보로 수용연대로 들어갔습니다. 첫날 저녁, 막사 하나에 왕창 집어넣고 누워 자라고 하였습니다. 갓 입대한 장정들이 도저히 다 잘 수가 없을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데, 기간병 하나가 들어오자마자 질서를 잡아버렸습니다. 기간병은 <동작 봐라, 자리에 눕는다! 실시!>라고 말하고는 들고 온 '빠따'를 휘둘렀거든요.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맞으니까 잽싸게 침상에 쓰러졌습니다.
아주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그 시끄럽던 내무반을 평정해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0일간은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사역병으로 끌려 다니다가 겨우 교육연대로 넘어갔습니다. 그날이 21일, 정식 입대 날입니다. 지금은 집에서 군대에 들어 온 날이 입대 날이라는데, 그때는 교육연대로 넘어가는 날이 입대 날이었습니다. 6주간의 기본교육을 마치고 다시 김해공병학교로 갔습니다. 4주간의 특과교육을 이수하고 제3보충대를 거쳐 우리 형님들이 군대생활을 하였던 강원도로 갔습니다. 우리 중대는 양구의 어느 산에서 군용도로를 닦고 있었습니다. 공병이 된 나는 날마다 미제 야전삽과 곡괭이로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농사꾼으로 일하다가 입대한 나는 그 일이 그 일이었지만, 대학을 다니다 온 친구들이나 사무직으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온 친구들은 무척 힘들어하였습니다.
나는 농촌운동을 한답시고, 조국과 민족이 어떻고 하다가 입대하였습니다. 군대생활 3년간은 내가 조국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와 보니 엉망이었습니다. 군인들이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분간 일하고 10분간 휴식을 반복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정말 걱정스러웠습니다.
행동도 군인답지 않게 보였고,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면 산골짜기 천막 안에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꼴이라니. 일도 죽자 살자해야 할 텐데,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인지 막노동꾼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나날을 보낸다고 해야겠지요. 참 군인으로 헌신하고 기회가 되면 목숨까지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나는 적잖은 실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파견지 분대의 가장 졸병이었던 나는 혼자 초번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천막 안에는 남포등을 켜 놓고 질퍽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지요. 나는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깊은 산 속에서 혼자 보초를 서면서 이상한 새 울음소릴 들으면서,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도자 삽날을 방패삼아 서서 기다리는데, 군인 한명이 걸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손들어 뒤로 돌아!"
벼락같은 소리를 냅다 질렀습니다. 군대 들어와서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뒤로돌아 섰습니다. 다음 순서는 암구호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순간에 천막 안에 누워서 허접한 소리를 나누던 분대원 전원이, 빈총을 들고 다 뛰어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이런 것을 두고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삽질할 때는 삽질꾼이고 농담을 주고받을 때는 농담꾼이지만, 여차하면 다들 총을 들고 나온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다음은 그 2년 후의 일입니다.
우리 중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 후에 내무반에서 야간 교육을 하고 있었고, 나는 후배 한 명과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특별한 지시를 받고 보초를 서고 있었지요. 인근 부대가 야간 훈련을 하면서 우리한테 협조를 구하지 않았다며, 철저히 경계근무를 하라는 거였습니다. 사실 내무반에서 교육을 한다고 해 봐야 절도 있는 교육은 아니었습니다. 시간 보내기 교육이었지요.
보초를 끝낼 시각이 다 돼 가는 그때, 한 떼의 군인들이 야간훈련을 하면서 골짜기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후문에서 보초가 정지명령을 내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말소리를 내면서 오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서 있던 내가 힘찬 목소리로 다시 정지구령을 내렸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일은 초병의 구령을 무시한 것도 문제인데, 나한테 전등을 비추면서 돌을 던져 내 눈두덩을 깬 것입니다.
이때 내가 공포탄을 한방 쐈지요. 그랬더니 내무반에서 교육 중이던 중대원들이 다들 총을 들고 뛰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중대원들의 민첩하고 군인다운 경계출동 태세는 자랑스러운 정도였습니다. 나는 의무과로 가서 치료를 받고 당직 사령실로 가서 상황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무모한 짓을 감행한 그 훈련부대의 인솔 장교도 와 있었습니다. 그 장교는 당직 사령관과 나한테 백배사죄하고 갔고, 나는 상처 난 얼굴 치료를 마친 뒤 표창장과 함께 포상 휴가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두 번의 현장체험을 통하여, 우리 군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정신 나간 일부군인과 국가관과 군인정신이 부족한 일부 지휘관들의 문제만 고치면 될 것입니다. 군기가 빠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인답지 못하고, 지휘관답지 못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군기를 엄정히 세우고 교육 훈련만 잘 하면 우리 군을 믿을 만합니다. 다만 군기가 빠진 일부는 하루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는 군대가 되고 5000만 국민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은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적군을 많이 죽이고 이기는 것을 목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억제하는 군대가 가장 강한 군대입니다. 가장 잘 싸우는 것은 이기는 것이고, 이기되 사람을 하나도 다치거나 죽게 하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군기를 엄정히 바로 세우고, 사기를 진작시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강군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회초리를 들고 쳐야 하며,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국군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홈페이지 www.happy.or.kr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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